제12장 믿음의 삶 (1947년 10월 12일 강론)

요즘에는 기적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분은 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시편 2,8). 우리 하느님은 진리 자체이시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십니다. 그분의 위대하신 뜻이 아니라면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영광송). 주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는 모자란 것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활동하시며 지극히 아름다우시고 지극히 위대하십니다. 언제나처럼 오늘도 그러하십니다. “하늘은 연기처럼 스러지고 땅은 옷처럼 해지리라. … 그러나 나의 구원은 영원하고 나의 의로움은 꺾이지 않으리라”(이사 51,6).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인류와 맺으셨습니다. 당신의 전능하신 힘을 인류 구원을 위하여 쓰셨습니다. 우리가 신뢰심을 잃고 믿음이 부족하여 두려움에 떨 때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는 이사야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 손이 너무 짧아 구해 낼 수가 없다는 말이냐? 아니면 내가 힘이 없어 구원할 수가 없다는 말이냐? 보라, 나는 호령 한마디로 바다를 말리고 강들을 광야로 만든다. 물고기들은 물이 없어 썩어 가고 목말라 죽어 간다. 나는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고 자루옷으로 그 덮개를 만든다”(이사 50,2-3).

신앙은 초자연적 덕입니다. 이 덕으로써 우리의 지성은 계시 진리들에 대하여 동의하고, 복되신 성삼위의 구원 계획에 관한 충만한 지식을 전해 주신 그리스도께 ‘예’ 하고 응답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1-3).

저는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믿음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믿음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신약 성경을 펴고 그분 생애의 몇몇 사건들 안에서 함께 생생한 체험을 해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을 조금씩 조금씩 보여 주시면서 기꺼이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9장을 되새겨 봅시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1-2)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렇게 가깝게 지냈으면서도 가엾은 눈먼 사람에 대하여 여전히 좋지 않은 생각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교회에서 봉사를 하려고 할 때에, 여러분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 주님의 제자들을 만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걱정할 것도 없고, 오히려 복음서에 나오는 눈먼 사람처럼 신경을 쓰지도 마십시오. 오로지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손에 자신을 맡기십시오. 주님께서는 책망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십니다. 단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병자에게 냉정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하느님다운 성실함으로 치료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셨습니다.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요한 9,6-7).

이 눈먼 사람이 보여 준 확고한 믿음의 모범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볼 수 없을 때, 영혼이 근심에 휩싸이고 모든 빛이 사라졌을 때, 하느님께서 명령하실 때, 이 눈먼 사람처럼 행동합니까? 실로암 못의 물에 어떤 힘이 있어서 그 눈먼 사람이 눈을 씻었을 때 치료가 되었을까요? 물론 신비스러운 안약이나, 연구소에서 만든 값비싼 약들이 효과가 더 좋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믿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대로 행동하였고,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성경 구절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그 못의 이름인 ‘파견된 이’의 의미를 설명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파견된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파견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누구도 죄에서 해방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고쳐 주시려고 파견되신 거룩한 의사,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의 질병이 더욱 심각하고 희망이 없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물들을 판단하는 거룩한 척도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초자연적 시각을 잃어서도 안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우리의 나약함을 이용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기중심적 사랑, 지루함, 좌절 또는 격렬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곧바로 주님께 귀를 기울이며 반응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개인적 실패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만큼, 그러한 현실 때문에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길입니다. 우리는 굳건하고 겸손한 믿음으로 끊임없이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 저를 믿지 마십시오. 그러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와 부드러움을 마음속에서 느끼는 가운데,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만일 우리가 자신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결점을 가지고도 우리 주님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께 충실한 자녀가 될 것이고, 그분의 거룩한 힘이 우리 앞을 비추며 나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코 성인에게서 또 다른 눈먼 사람의 치유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마르 10,46). 그 눈먼 거지는 군중의 움직임을 느끼고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불타올라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여러분도 그렇게 외치고 싶은 열정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길가에서, 아주 짧고도 빠르게 지나가는 인생의 도상에서 주님께 외치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완덕에 이르려는 결심을 하는 데에 더 많은 은총, 더 많은 빛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고 싶지 않습니까? 이처럼 거듭거듭 외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이 기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천천히 묵상해 보도록 권고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자비하신 성심과 우리 자신의 천박한 마음이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지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특히 여러분이 시련과 유혹을 당할 때에,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조그만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할 때에, 또는 영웅적 행동이 요청될 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다”(마르 10,48). 예수님께서 여러분 곁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심장 박동은 더욱 빨라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을 향하여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때 여러분의 친구들, 늘 해오던 관행, 안락한 삶, 주변 환경 등이 모두 공모하여 여러분을 꾸짖습니다. “조용히 해. 소리치지 마. 예수님을 부르는 사람이 누구야? 그분을 성가시게 하지 마.”

그러나 가엾은 바르티매오는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욱더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처음부터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 주님, 그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하게 해 주십시오. 그는 주님과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저희의 외침을 듣고 계시지만, 기다리십니다. 저희가 주님을 필요로 한다는 확신을 갖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리코를 떠나는 길목에서 기다리던 눈먼 사람처럼 우리도 끈질기게 간청하기를 바라십니다. “그 사람을 본받읍시다. 비록 우리가 청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곧바로 주시지 않을지라도, 비록 많은 사람이 우리의 기도를 만류하더라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마르 10,49).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만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찾고 계심을 늘 명심하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너의 게으름과 안락함과 이기심과 어리석음과 사소한 문제들을 내려놓아라. 몰골사납게 엎드려 있는 땅바닥에서 일어나라.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해지고 초자연적인 일들에까지 시야를 넓혀라.’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마르 10,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여러분이 전쟁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래 전에 저는 한 가지 서약을 한 직후에 전쟁터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군인들의 외투, 수통, 그리고 기념품, 편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진 등이 들어 있는 배낭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패자들의 것이 아니라 승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적의 방어선을 뚫고 질주하는 이들에게 불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는 바르티매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가는 데에는 반드시 희생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데 방해가 되는 외투, 배낭, 수통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전투에서도, 그리스도 왕국을 확장시키는 사랑과 평화의 행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교황님 그리고 모든 영혼에게 봉사하려면,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기꺼이 버려야 하고, 밤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게 해 주는 외투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의 기념품도 없이, 기운을 차리게 해 주는 물도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에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제 놀랍고도 감동적인 대화,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는 대화가 시작됩니다. 여러분과 저는 바르티매오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시작하시며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그 눈먼 이가 대답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얼마나 논리적입니까! 여러분 자신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볼 수 있습니까? 여러분도 때때로 예리코의 눈먼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여러 해 전에 이 성경 구절을 묵상할 때를 저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예수님께서 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신다는 것을 깨닫고는 열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저는 주님께서 새로운 어떤 일을 제가 감당하기를 바라신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스승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외침에 힘입어 그리스도께 거듭거듭 간청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제 우리 주님께 한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의 뜻 따르도록 저를 가르치소서”(시편 143,10). 요컨대, 우리 입술은 창조주의 이끄심에 효과적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열망을 진심으로 표현해야 하며,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그분의 계획을 따르고자 힘써야 하고,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사랑한다면, 다음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곧 믿음의 가치는 단지 그것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예리코를 떠나는 길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당신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52). 이제 당신은 우리 주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였고, 그분을 따라 길을 나서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신은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그분의 옷을 입으며 그분 자신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서, 외적 행동과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당신이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이미 제가 이야기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어 너그럽게 일해야 하며, 동시에 길을 가로막는 것을 모두 뿌리 뽑고 제거해야 합니다.

성 마태오는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마태 9,20). 이 여자는 얼마나 겸손합니까!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태 9,21). 언제나 바르티매오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믿음을 큰 소리로 고백하는 굳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만나시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도 굳은 믿음을 지녔지만 크게 소리치지 않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예수님께로 다가갑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자신의 병이 치유되리라는 확신이 그 여인에게는 있었습니다. 여인이 그렇게 하자마자,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여인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이미 여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계시며, 그 여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그 여인은 조심스럽게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여인은 믿음으로 다가갔습니다. 그 여인은 믿었고, 자신이 치유되었음을 알았습니다. … 우리도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만져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우리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겠지요? 겸손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께 그러한 말씀을 들을 만합니까? 우리는 그분께 다가갑니까? 군중 속의 가엾은 여인에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옷자락 술을 조금 만지고 잠시 느끼도록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모두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분을 먹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말하듯이, 사랑 자체이신 분께 말하듯이 친밀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이 모든 것은 환상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우리는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오직 겸손한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만 초자연적 시야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방식은 초자연적 삶과 동물적 삶, 두 가지뿐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느님의 삶, 초자연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의 지성과 의지가 열망하는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든 것은 끝이 있고 눈에서 사라지며, 이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도 한낱 무대 소품과 화면에 불과하고, 이 모든 것이 지나가야 영원한 삶이 펼쳐진다면, 과연 무엇이 중요합니까?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영원’이라는 말 덕분에 위대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성녀가 오빠 로드리고와 함께 아다하 문을 통하여 아빌라를 나섰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할 수 있는 무어인들의 땅을 향하여 성벽을 뒤로하고 출발했을 때, 피곤해지기 시작했던 오빠에게 어린 성녀는 계속해서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하고 속삭였습니다.

지상의 것에 대하여 ‘영원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만 유일하게, 전적으로 참되게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마다 하늘의 달콤한 꿀맛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믿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복음서로 돌아가서 마태오 복음 21장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성안으로 되돌아가실 때에 시장하셨다. 마침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가까이 가셨다”(마태 21,18-19). 주님께서 목마르시다니, 시카르의 우물가(요한 4,7 참조)에서 목마르신 주님을 뵙다니,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께서는 저와 똑같은 살을 지니신 참 인간이시요 참 하느님이십니다(퀴쿰퀘 신경).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그러므로 그분이 저를 이해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우리가 일하거나 공부하거나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면서 피곤에 지칠 때마다, 눈앞이 먹구름으로 캄캄해진다면 예수님께 눈을 돌려봅시다. 그분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셨지만 또한 피곤에 지치셨고, 시장하셨으며 목마름으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참으로 저희에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이해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사랑받으실 만한 분이십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이 죄 말고는 저희와 똑같은 분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과 더불어 저희도 온갖 악한 성향과 결점들을 이겨 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피곤함도 배고픔도 목마름도 눈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피곤함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눈물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의 도움을 받아 좋은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요한 4,34 참조).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로 가십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나에게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영혼 때문에 목마르시고 시장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목마르다”(요한 19,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목말라하시고,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영혼에 목말라하십니다. 또한 하늘의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어 주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우리가 인도해야 하는 모든 영혼에 목말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로 가셨는데, “잎사귀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마태 21,19).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벌어지지 않나요? 우리에게 믿음과 겸손의 힘이 부족하다면 슬픈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주님께 보여 드릴 만한 희생과 선행이 있나요? 우리의 그리스도 신앙이 속 빈 강정에 불과한 것이면,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 맺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자 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다”(마태 21,19). 이 복음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신앙을 굳건히 하고 그에 걸맞은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께 열매를 맺어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적 노력의 결실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운 가장 원대한 계획도 주님 눈에는 한낱 어린이의 놀이에 불과합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고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인간이 그분께 와서 영원히 당신 나라에서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또 잘 해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일상적인 일들을 성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주님을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자랑하려고 일을 한다면,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잎사귀들이 아무리 무성하다 한들, 주님께서도 우리 동료들도 그 사이에서 아무런 열매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무가 말라 버리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서 “어째서 무화과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마태 21,20). 첫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아 왔지만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불타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확실하게 밝히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태 21,21). 그리스도께서는 한 가지 조건을 내놓으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움직여야 할 것들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마음 안의 것을 움직여야 합니다. 은총의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에도, 희생에도, 겸손에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모든 능력을 받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2).

신앙인이라면 이 세상의 사물들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데레사 성녀의 표현을 빌리면 이 땅에 사는 동안은 나쁜 여관의 나쁜 밤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일하고 싸우며 우리 자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악으로 하느님의 정의에 빚진 것을 모두 청산해야 합니다. 또한 신앙인이라면 이 세상 것들은 모두 수단이며 그것들을 관대하고 영웅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단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에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아마도 때로는 우리에게 힘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한 번 더 복음으로 돌아가서) 더러운 영이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한 것처럼 합시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치유를 간절히 바랐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아들을 고쳐 주시기를 희망하였지만, 그러한 행복이 가능하다는 믿음까지는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고 동시에 인간 영혼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를 도우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모든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 아버지는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여 아들의 병을 고치지 못할까 봐 걱정합니다. 그는 눈물을 흘립니다. 이러한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 눈물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열매이고, 참회의 열매이며, 참된 겸손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아이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이번 성찰을 마치면서 우리도 주님께 똑같은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주님을 믿으며 자랐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거듭거듭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주님께서 자녀들의 마음에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더 많이 더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 어머니이신 분, 그리고 믿음의 스승이신 성모님께도 같은 간청을 드립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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