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겸손 (1965년 4월 6일 강론)

성주간 화요일 미사 전례문에서는 ‘참된 하느님다움’과 ‘거짓 하느님다움’을 구별하도록 도와줍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겸손’은 우리의 비참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깨닫게 이끌어 주는 덕목입니다.

우리의 비참함은 참으로 명백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의 자연적 한계, 곧 사람들이 꿈꾸었으나 시간 부족으로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위대한 야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피할 수 있었으나 피하지 않았던 잘못과 타락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개인적 결함들을 경험합니다. 더욱이 마치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분명히 깨닫게 하려고 모든 실패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주님께 바라라”(시편 27,14: 성주간 화요일 미사 입당송). 교회는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 가득한 희망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상동). 우리가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있다면,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어찌 중요하겠습니까? 어느 순간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곤경에 떨어질지라도, 마치 정상적인 치료 절차에 따르듯이 곤경에서 빠져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새롭게 시작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귀중한 장식품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예컨대, 꽃병이 깨지지 않도록 얼마나 애지중지합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아기가 꽃병 근처에서 놀다가 건드려 깨뜨리면 어떻게 합니까? 온 가족이 당황하겠지만, 곧바로 조각을 모으기 시작할 것입니다. 조각을 맞추고 접착제를 발라 마침내 이전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것입니다. 깨진 것이 한 조각이라면, 고정용 금속 핀 등으로 간단히 붙일 수 있고, 그렇게 수선한 그릇은 본래의 매력을 유지합니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자신의 내적 생활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나약함과 죄악과 실수들을 직시하게 되었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맡기며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제가 깨진 질그릇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여기 왔습니다. 주님, 저의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붙여 주시고, 슬퍼하는 제가 당신의 용서로써 더욱 힘을 얻고 이전보다 더욱 멋진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기도입니까! 우리의 나약한 질그릇이 깨질 때마다 이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우리 자신의 모습에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선한 행동을 하다가도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지 마십시오. 언제나 곁에서 도와주시는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시편 27,1) 우리는 아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다가가기만 한다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할 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잠언에 이르기를 “겸손한 이에게는 지혜가 따른다.”(잠언 11,2)고 합니다. 겸손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변명하지 않고 정직하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함에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시요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이 사실을 얼마나 잘 이해하셨습니까!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분이신 마리아께서는 이 땅에 계셨으며, 앞으로도 계실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루카 1,52) 우리 주님의 권능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섭리가 자신에게서 다시 한 번 실현되었음을 기뻐하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루카 1,48).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겸손을 보자마자 자신의 가장 순수한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거룩하게 변모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복되신 동정녀의 겸손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측량할 수도 없는 은총의 결과입니다. 이로써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태중에 오시는 거룩하신 성자의 강생에 협력하게 됩니다.

이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며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겸손을 본보기로 보여 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진실로 깨닫는 것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끌어올 수 있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음식이 되시고자 굶주림을 겪으셨고, 우리의 음료가 되시고자 목마름을 겪으셨으며, 우리에게 불사의 옷을 입히시고자 죽음을 겪으셨고,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고자 가난을 겪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1베드 5,5). 나이가 몇 살이든, 어떤 환경에 있든, ‘하느님답게’ 사는 유일한 방법은 겸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굴욕적인 모습을 기뻐하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유지하시는 분께서 우리의 굴복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그다음에야 우리를 가득 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장애물을 없애시어 당신께서 하시려는 일, 곧 당신의 은총을 부어 주실 더 많은 공간을 우리 가난한 마음 안에 마련하는 일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해지도록 인도하시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의 것으로 만드시고, 우리를 ‘참된 하느님다움’을 지닌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참된 하느님다움’인 겸손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거짓 하느님다움’으로 끌고 가는 중죄입니다. 교만은 아마도 매우 사소한 일에서, 사탄이 우리 원조에게 했던 교묘한 설득을 따르도록 부추깁니다.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창세 3,5). 다른 성경 구절도 있습니다. “인간의 오만은 주님을 저버리는 데서 시작된다”(집회 10,12). 참으로 이 악덕이 뿌리를 내리면 인간 생활 전체를 감염시켜, 요한 성인이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1요한 2,16)이라고 일컬었던 것에 이릅니다.

교만? 무엇에 관한 교만입니까? 성경은 극적인 표현으로 교만을 비웃습니다. “먼지와 재가 뽐낼 수 있는가? 인간의 오장육부는 살아생전에 벌써 썩어 간다. 오랜 병은 의사를 비웃고 오늘은 임금이어도 내일이면 죽으리라”(집회 10,9-10).

교만에 사로잡힌 영혼에게는 탐욕, 방종, 시기, 불의 같은 온갖 악덕이 따라옵니다. 교만한 인간은 언제나 모든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헛되이 왕좌에서 끌어내리려 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교만은 가장 어리석은 최악의 죄입니다. 환상에 빠져 교만에 사로잡힌 가엾은 희생양은 화려한 허울의 벽을 만들기 시작하고는 공허함으로 자신을 채웁니다. 그러고는 우화에 나오는 두꺼비처럼 우쭐하여 남에게 과시하려고 몸을 부풀리다가 터져 죽고 맙니다. 교만은 인간적 관점에서도 불쾌감을 줍니다.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는 이는 끊임없이 자신에 관하여 연구하고 남을 업신여기다가, 그 어리석은 허영심 때문에 상대방에게 조롱을 받습니다.

교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혹시 독재자나 지배자의 행동을 상상할지 모르겠습니다. 전쟁 영웅을 영접하는 군중의 환호성 가운데, 개선문의 하얀 대리석에 자신의 영광스러운 이마가 닿지 않도록 머리를 숙이는 로마 황제를 연상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봅시다. 이러한 유형의 교만은 오직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됩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교묘하고 더 빈번한 교만의 다른 형태와 싸워야 합니다. 내 것이 남의 것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교만, 허영에 가득 찬 말과 생각과 행동, 아무런 모욕 의사가 없는 말과 행위에 대하여 분노하는 거의 병적인 과민 반응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유혹입니다. 모든 것이 태양인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돌아가야 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 교만한 사람은 이 어리석은 착각을 충족시키려고 거짓으로 아픈 척, 슬픈 척하여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들이고 야단법석을 치르게 합니다.

많은 사람의 경우에 자신의 내적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자기가 상상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인정을 받고 있는지’ 등입니다. 그 불쌍한 영혼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이 가엾은 상황에서 그에게는 모든 것이 쓰라린 아픔이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겸손해지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바라봅시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 그분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요청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3-45).

또한 제자들이 카파르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보다 먼저 와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2-36).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사랑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주님은 가르침을 주시고, 그 가르침을 이해시켜 주시며, 살아있는 본보기를 보여 주십니다. 그분은 집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불러, 사랑스럽게 껴안으십니다. 우리 주님의 침묵이 얼마나 웅변적입니까! 이로써 주님은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린이 같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한 영혼, 겸손한 영혼이 받을 상이 무엇인지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영혼은 주님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껴안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수난의 때가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왕직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기를 바라시고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메시아는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마태 21,5; 즈카 9,9).

이제 최후의 만찬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작별하기에 앞서 모든 것을 준비하셨고, 반면에 제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뽑힌 이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습니다”(요한 13,4-5).

주님께서는 한 번 더 몸소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교만와 허영에 휩싸여 논쟁에 빠져 있는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기꺼이 종이 하는 일을 하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다시 식탁에 앉으시어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2-14). 우리 주님의 본보기에서 저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분은 ‘만일 내가 이것을 한다면, 너희는 얼마나 더 많이 해야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제자들 눈높이에 맞추고, 그들에게 관대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사랑스럽게 책망하십니다.

처음에 열두 제자에게 하신 것처럼, 또한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 귀에 거듭거듭 속삭이십니다.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내가 너희에게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나는 종이 되었다. 그러니 너희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이를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집회 3,18).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께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거만한 자들의 콧대는 꺾어 버리시지만, 겸손한 자들은 구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손이 결백한 이들, 무죄한 이들을 구원하십니다(욥 22,29-30 참조). 무한히 자비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겸손하게 간청하는 이들에게 서둘러 도움을 베푸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비록 수많은 위험이 있을지라도, 사방에서 적들이 우리 영혼을 괴롭힐지라도, 우리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은 과거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따르면,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들에게 던져졌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도움으로 살았습니다. 저는 비관적인 사람이 아니고, ‘옛날이 더 좋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느 시대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많은 사자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8).

이 야수들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운명이 다니엘과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기적적인 해결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위대한 업적들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는 예언자의 배고픔을 잊게 해 주시거나 그 앞에 음식을 놔주시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른 예언자 하바쿡을 시켜 유다에서 기적적으로 음식을 가져다가 다니엘에게 주도록 하셨습니다(다니 14,33-37 참조).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자기 잘못 때문이 아니라 불의한 악마의 하수인 때문에 사자들에게 던져졌고, 다니엘이 하느님의 종이요 우상들의 파괴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도 많은 우상들을 파괴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일은 어떤 화려한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면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감으로써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해의 우상, 불의의 우상, 무지의 우상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자기만족에 빠져 거만하게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자들의 우상을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겁먹지 마십시오. 비록 사나운 짐승들이 으르렁거리는 굴속에 던져진 다니엘보다도 더 무섭고 위험한 환경에 있을지라도, 아무것도 두려워 마십시오. 하느님의 팔은 그 무엇보다도 강하시며, 필요하다면 기적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굳은 믿음을 지니십시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쁘게 믿고 사랑하며 책임감을 지니십시오. 우리 시대가 다른 세기들보다 더 나쁘지 않으며,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연로한 사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나는 말이야, 언제나 침착하고 평화롭다네.” 굶주린 사자들이 도처에서 으르렁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결코 평화를 잃어서는 안 되며 침착해야 합니다. 언제나 사랑하고 믿고 바라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온갖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 다시금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만일 여러분이 성실하다면,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 준다면, 만일 여러분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참된 하느님다움’을 갖춘다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안전하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전쟁에서 이겼다고, 우리는 승리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승리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의 승리이며, 영혼에게 평화와 이해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승리입니다.

겸손은 우리에게 위대한 일들을 하라고 박차를 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부당하고 무력한 사람인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암브로시오 성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많은 일을 수행해야 하는 종이라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로 불린다고 하면서 으스대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주님의 은총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본성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일을 잘해냈더라도 우쭐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자기 일을 하고, 달은 순종합니다. 천사들도 자기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민족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뽑힌 사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1코린 15,9). … 우리는 또한 칭찬받기를 마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공로는 언제나 초라하고 보잘것없기 때문입니다.

“거짓되고 불의한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시편 43,1: 성주간 화요일 미사 화답송). 다시 한 번 ‘참된 하느님다움’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하느님다움’이 있다면, 우리 눈은 우리가 하찮은 진흙으로 만들어졌음과 우리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하느님께 간청할 것입니다. “당신의 빛과 당신의 진실을 보내소서. 그들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그들이 저를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데려가게 하소서”(시편 43,3: 성주간 화요일 미사 화답송). 저는 이 화답송을 바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하느님다움’을 갖추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 7,1). 그분은 단순히 바라기만 하면 적들을 없애실 수 있으셨지만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으로서 단순히 바라기만 하면 상황을 바꿀 수 있으신 그분께서는 여기서 놀라운 가르침을 남기셨습니다. 유다 지방으로 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요한 7,3). 그들은 그분에게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입니까? 이것이 ‘참된 하느님다움’과 ‘거짓 하느님다움’에 관한 가르침인 것이 보입니까?

‘참된 하느님다움.’ 성주간 화요일 미사에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당신 이름을 아는 이들이 당신을 신뢰하니, 주님, 당신을 찾는 이들을 아니 버리시기 때문입니다”(시편 9,11). 이제 부서진 조각들이 다시 붙어 아름다워진 질그릇들이 겸손한 기도를 기쁘게 바칩니다. “가련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아니 잊으십니다”(시편 9,13).

겸손의 덕이 우리의 기를 꺾는다고 생각하거나 겸손의 덕을 멸시하는 사람은 절대 믿지 마십시오. 우리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깨졌다가 다시 본모습을 회복하게 된 그릇임을 아는 것은 끊임없는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눈에 우리가 작다는 것, 우리가 작은 어린이요 자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이 가난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알고, 또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도 아는 사람보다 더 기쁜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낙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의 삶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여러 장애물들이 우리의 개인적 야망을 가로막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초자연적 삶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거듭 강조하듯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불쌍합니다.

끝으로, 성주간 화요일 미사의 두 가지 청원, 우리의 입술과 마음에서 화살처럼 튕겨 나오는 기도를 다음과 같이 바칩시다. “오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신비를 끊임없이 경축하는 저희가 하늘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영성체 후 기도). “오 주님, 저희가 주님 뜻에 따라 끊임없이 봉사하게 하소서”(보편 지향 기도). 자녀 여러분, 봉사야말로 우리의 역할입니다. “저희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이 시대에 믿는 이들이 공로를 쌓고 믿는 이들의 수가 더욱 많아지게 하여 주소서”(보편 지향 기도).

이제 성모님을 바라봅시다. 그 어떠한 피조물도 성모님보다 더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가리켜 ‘우리 즐거움의 샘’이라고 칭송하는 이유는 그분이 보여 주신 “주님의 종”(루카 1,38)의 겸손 때문입니다. 하와는 하느님과 똑같이 되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 때문에 죄를 범한 다음에, 주님께 몸을 숨겼고 부끄러워했으며 슬퍼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고백함으로써 거룩하신 말씀의 어머니가 되었고 기쁨에 넘쳤습니다. 우리 좋으신 어머니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도 널리 퍼지게 하시어, 저희로 하여금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께 인사를 드리고,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처럼 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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