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1954년 3월 12일 강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본보기,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보기이십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에 관하여 이미 들었고 자주 묵상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사도직 활동을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형제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필요한 방법이라고 여기면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고, 여러분의 말을 경청한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아드님, 우리의 맏형의 행동과 비교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이십니다. 그분께서 몸소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유일한 덕목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덕목도 아니지만 우리 삶을 썩지 않게 해 주는 소금 같은 덕목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사도로 살아가는 영혼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 덕은 거룩한 정결입니다.

우리는 애덕이 최고의 덕목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면, 정결은 필수 조건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외면하고 포기하면, 결국 눈이 멀게 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1코린 2,14).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힘을 얻어 맑은 눈으로 보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이 말씀을 교회는 언제나 정결을 향한 초대로 이해하였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글처럼, “정결을 사랑하고 양심이 온전히 깨끗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순수하게 간직합니다. 하느님을 보는 데에 그것만큼 필요한 덕목은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온갖 모욕과 부당한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골칫덩이로 여기고 마귀 들렸다고 이야기하기도 한 것을 기억하십시오(마태 11,18; 12,24 참조). 또 어떤 때에는 예수님께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신 것을 보고는 교묘하게 그릇된 해석을 하고,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였습니다(마태 9,11 참조).

나중에는 속죄와 절제의 본보기이신 예수님을 두고 부자들의 식탁에 드나드는 사람이라고 투덜거렸습니다(루카 19,7 참조). 그분은 경멸의 의미로 “목수의 아들”(마태 13,55)로 불렸습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하여 먹보요 술꾼이라고 험담하는 것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분의 적들이 하는 모든 비난을 내버려 두셨지만, 정결하지 않다는 것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때에는 적들의 말문을 닫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정화를 위하여 불을 놓을 수 있는 사랑과 빛, 순수함과 깨끗함의 놀라운 본보기, 흠 없는 본보기를 우리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겨 주시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몸소 보여 주신 행동에 비추어 거룩한 정결을 묵상하는 것은 언제나 저에게 즐거운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세련되게 이 덕목을 실천하시는가! 요한 성인이 예수님에 관하여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요한 4,6).

차분한 마음으로 천천히 이 장면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온전한 하느님이요 온전한 인간”(퀴쿰퀘 신경)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교 여행 중에 지치셨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똑같은 일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능력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진하여 기진맥진했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스승님께서 그렇게 지치신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분도 배고픔을 겪으십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이웃 고을에 갔습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목마름도 느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몸이 피곤하실지라도, 영혼들을 위한 그분의 갈증은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죄인인 사마리아 여자가 왔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사제의 마음으로 그 길 잃은 양을 구원하시려고 진지하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곤함도 배고픔도 목마름도 잊으십니다.

제자들이 이웃 고을에서 돌아왔을 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시느라 바쁘십니다.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요한 4,27). 그분의 배려는 얼마나 세심하고, 그분의 사랑은 얼마나 크신지요! 주님께서 보여 주신 아름다운 덕목, 곧 거룩한 정결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더욱 인간답게 해 주고,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게 도와주며, 하느님의 일을 더욱 잘하게 하고, 더 큰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1테살 4,3-5). 우리의 모든 것, 곧 영혼과 육신, 살과 뼈, 모든 감각과 능력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여 있습니다. 믿음을 지니고 주님께 간청하십시오. ‘저희 마음의 수호자이신 예수님! 저희 마음을 더욱 크고 강하게 하시고, 더욱 따뜻하고 품위 있게 하시며, 주님을 향한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기꺼이 봉사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몸은 거룩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우리의 몸이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거룩해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을 상기시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우리 주님께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은총에 협력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생활 신분에 따라 하느님 자녀의 고유한 덕목들을 실천하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한 정결을 지켜야 한다고 할 때에 저는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혼인하지 않은 사람은 완전한 절제를 해야 하고, 혼인한 사람들은 자기 신분에 따른 의무를 다함으로써 정결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에게 정결은 귀찮거나 굴욕스러운 짐이 아니라 즐거운 확인입니다. 의지력, 절제, 자기 통제는 육체나 본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특히 하느님의 뜻에 결합되어 있는 의지에서 옵니다. (단지 금욕이나 예의뿐 아니라) 정결의 덕에 이르려면, 우리의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켜서 고상한 동기, 곧 사랑의 재촉을 받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저는 정결의 덕이 하느님의 가르침과 계명을 전혀 훼손하지 않고 아무 두려움 없이 이 땅의 어떠한 곳에라도 우리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날개라고 생각합니다. 구름보다 더 높이 날아오르는 큰 새들의 경우에도 날개는 무거운 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날개 없이는 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결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짐이라는 유혹의 속삭임이 들려올 때 포기하지 않고 마음을 굳건히 하기를 바랍니다. 태양을 향하여, 사랑을 향하여 높이 날아오르십시오!

어떤 교사들이 (아니 많은 이들이!) 계속해서 정결을 거스르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면서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수많은 영혼을 지켜보았으나, 그 결과는 처음에 바랐던 것과 정반대였습니다. 그것은 검고 끈적끈적한 진액처럼 온갖 두려움과 강박관념으로 사람들의 양심을 흉측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영혼의 정결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거의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상상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려는 길이 아닙니다. 거룩한 정결에 이르려는 우리의 노력은 정상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어야 하며, 평범하고 명확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깨끗함에 관하여 토론하는 것은 참으로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인성에 의지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경이로움 속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셨고,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처럼 온갖 한계와 나약함을 지닌 육체를 취하신 것에 대하여 품위를 잃었다고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그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자신을 비운다고 해서 그분이 실제로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몸과 영혼을 들어 올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정결의 덕은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분명하고 열정적이며 합당한 애정을 담아 단지 ‘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말과 삶의 증거로써 온 세상에 크고 맑은 소리로 선포해야 합니다. 이에 관하여 어떤 그리스도인 저술가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저급한 본능에 지배되는 비참한 짐승들처럼 우리 마음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작은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아주 많은 것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위대함을 육체적 차원에서 측정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그 생각의 힘으로 수많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 안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가능하며,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가 지나가실 수 있도록 길을 곧게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영예롭고 나무랄 데 없는 행동들로써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평탄하게 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작용하고 주님의 신비들과 강생에 관하여 알려 주실 수 있도록 하십시오.”

성경에 따르면, 우리의 위대한 성화는 영혼과 몸 모두에서 일어나며, 성령께서는 경이롭고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이 일을 하십니다. 사도께서는 이렇게 외치십니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탕녀의 지체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께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15.19-20).

정결에 관한 말을 들으면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웃음은 기쁨 없는 죽은 웃음이며, 병든 마음의 산물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더 이상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마드리드 교외의 병원이나 빈민가에 가곤 할 때에 동행한 젊은이들에게 해 주던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광물계가 있고, 그 위의 단계로 식물계가 있습니다. 식물계는 단지 존재할 뿐 아니라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더 높은 단계로 동물계가 있는데 이에 속한 존재들은 감각과 움직임이라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과학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람들로 구성된 인간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성적 피조물들은 신적 지혜의 광채인 놀라운 지성을 지니고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놀라운 선물인 자유를 지니고 이것 또는 저것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저의 사제 생활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 인간계에서 보통 사람들은 성(性)을 네 번째나 다섯 번째 자리에 둡니다. 첫째 자리에는 각 사람이 추구하는 정신적 이상이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사람들, 곧 부모, 자녀, 가족 등에 관한 문제들이 자리합니다. 그다음 자리에는 일이나 직업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성적 욕망이 네 번째나 다섯 번째 자리에 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성을 대화의 중심 주제로 삼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비정상적이고 불쌍한 자들이며, 심지어는 환자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말을 하면 젊은이들이 웃음을 터트리곤 하는데) 저는 그들이 머리 둘레가 1미터쯤 되는 기형아처럼 보여서 몹시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형제애로써 그들이 몹쓸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성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남자답거나 더 여성스러운 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와 관련된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상기해 봅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코린 12,7).

하느님의 도움 없이 깨끗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하게 당신의 도움을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바로 이 순간에 여러분은 마음에 홀로 성모님을 모시고 그분께 조그마한 소리로,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간청해야 합니다. ‘어머니, 가엾은 제 마음이 어리석게도 반역을 하고 있습니다. … 어머니께서 저를 보호해 주지 않으신다면 … ’ 그러면 성모님은 여러분이 정결을 지키고 하느님의 길을 따르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겸손, 또 겸손해지십시오. 겸손해지는 법을 배웁시다. 사랑을 지키려면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고 두려움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영성의 대가들이 집필한 수많은 저서에 보면, 악마는 사슬에 묶여 있는 미친개에 비유됩니다. 우리가 가까이 가지만 않는다면, 미친개는 크게 짖을지언정 우리를 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혼 안에 겸손의 덕을 키운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죄의 기회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용기 있게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하늘에서 오는 도움에 의지하여, 참된 사랑의 길로 힘차게 전진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으로 부패한 사람은 어떤 영적 진보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선행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불구자이고, 낡은 누더기처럼 버려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혼자서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진행성 마비 환자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때때로 그들은 자신의 머리조차 움직일 수 없습니다. 초자연적 질서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비겁하게도 욕망에 굴복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마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미친 사람 같습니다. 우리 각자는 주님과 성모님을 부르고, 우리에게 겸손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며, 경건하고 굳건한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통한 치유를 적극 활용하게 해 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오염이라도 여러분의 영혼 안에 스며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이 흐르면 깨끗한 채로 유지되지만, 막히면 오물 웅덩이가 됩니다. 일단 그 물이 스며든 땅은 벌레들의 번식지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과 제가 알고 있듯이, 정결은 가능하며 기쁨의 큰 원천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깨달은 바와 같이, 정결을 위해서는 이따금 투쟁이 요구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다시 귀 기울여 봅시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2-24) 과장할 것까지는 없지만 여러분도 필요하다면 사도보다 더 크게 외치십시오. 우리 주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때때로 저는 넘어야 할 장애물을 바라보는 운동선수의 눈이 얼마나 빛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그 너머에 우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는지 보십시오! 우리 주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싸우는 것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십니다. 우리는 마침내 이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투쟁해야 한다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싸움에 임해야 합니다. 기쁨과 확신으로 응답하고, 자유롭고 쾌활하게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단지 실수나 죄의 기회를 피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계산적이고 냉정하게 거부하는 것쯤으로 격하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결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덕목이며, 점점 키우고 완성해야 하는 것임을 믿지 못합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정결은 단지 각자의 신분에 따라 절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영웅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힘껏 정결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같은 적극적 태도와 행동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해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나에게 다오. 너의 눈이 내 길을 즐겨 바라보게 하여라”(잠언 23,26).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 싸움에 어떻게 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이긴 싸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정의 첫 불꽃이 느껴지자마자, 아니면 그 전이라도 위험에서 달아나십시오. 또한 여러분의 영성 지도자에게 바로 그 이야기를 하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미리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동 하나하나가 여러분의 습관과 성향을 이루고, 그러한 일을 더 쉽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결의 덕을 하나의 습관으로 만들고자 힘써야 하며, 극기도 하나의 습관으로 삼아 사랑 자체이신 분을 거부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티모테오에게 하신 충고를 성찰해 봅시다. “자신을 결백하게 지켜 가십시오”(1티모 5,22). 이렇게 우리도 늘 깨어 있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보물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제가 살아오는 동안에, 사람들이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오, 내가 처음부터 깨끗이 끊었더라면!’ 그들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부끄러움이 가득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행복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제쳐둔다면, 끔찍한 후회와 극한의 비참함을 경험할 것입니다. 의무를 등한시하고 하는 일들은 아무리 일상적인 일이더라도, 비록 합법적이고 조그만 행복을 주기는 하겠지만, 나중에는 쓸개처럼 쓰고, 식초처럼 시며, 악취가 심한 꽃인 아룸처럼 불쾌한 냄새가 날 것입니다.

저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각자는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립시다. “주님, 저는 싸울 준비가 되었고, 주님은 언제나 승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때로 제가 패배하는 이유는 제가 주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를 당신의 손으로 붙들어 주소서. 제가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저를 잡은 손을 놓지 마소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부님, 저는 지금 매우 행복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비록 제가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느님과 성모님의 도움으로 성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를 대비하여 미리 이러한 충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싶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랑을 향하여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사랑을 향하여 갈 수 있도록 순수하고 깨끗하고 고상한 것들을 공급해 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마음은 자신을 불결함으로 채워 복수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참 사랑과 생명의 순수함은 무감각이나 육체적 욕망과는 거리가 멀며, 또한 무정함이나 냉정함 그리고 감상에 빠져 있는 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드러운 사랑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신 분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비활성 물질처럼 무미건조하고 완고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흠뻑 젖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인간적 사랑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순수하고 고상한 사랑의 기회를 등한시하는 불행하고 슬픔과 실의에 빠진 독신 남녀와는 다릅니다.

여러분에게 자주 이야기하였듯이, 누가 그것을 알아도 개의치 않지만, 저는 우리 주님과 대화를 계속하기 위하여 사랑을 주제로 한 대중가요 노랫말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은 우리를 온전히 당신께 속하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 노래로 표현된 고귀한 사랑을 신적인 언어로 옮깁니다. 성령께서는 구약의 아가를 통해서 이 일을 하시며, 모든 시대의 위대한 신비가들도 이 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저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시면,

주님을 사랑하는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저에게 일을 하라고 하시면,

저의 유일한 바람은 죽기까지 일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언제, 어떻게, 어디서 일할지 말씀해 주소서.

오, 달콤한 사랑이시여, 당신께 간청하오니,

저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말씀해 주소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노래는 매혹적입니다.

한 작은 목동 소년은

홀로 외롭다네.

그에게 기쁨은 없고

슬픔과 고통만 가득하다네.

그의 마음에는 그저

짝사랑하는 목동 소녀 생각뿐이라네.

인간적 사랑이 순수할 때에는 무한한 존경과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탄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의 부모님께 드려야 마땅한 거룩하고 고귀한 사랑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분들 덕분에 하느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두 손을 들어 그 사랑에 축복합니다. 만일 누가 왜 두 손으로 축복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곧바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손이 네 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사랑에 복을 내리소서!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저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신학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내어놓는 것은, 비록 혼인이 참으로 “큰 신비”(에페 5,32)이기는 하지만 혼인의 사랑보다 더 숭고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어떠한 부르심을 받았든지 (독신이건 혼인이건, 사제직이건 관계없이) 각자는 자신의 처지에 따라 품위 있게 정결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결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정결을 지키려면 누구나 섬세하고 예민하고 강력하게 싸워야 합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그 사랑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때에만 온전히 얻을 수 있는 정결의 경지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때때로 유혹이 느껴지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혹을 느끼는 것과 유혹에 동의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유혹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쉽게 뿌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유혹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결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자원들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이 싸움을 천사로서가 아니라 건강하고 평범한 남자와 여자로서 감당해야 합니다! 저는 천사 신심이 돈독하고, 이 하느님의 군대를 진심으로 공경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천사들과 비교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우리와 본성이 다르고, 그러한 비교는 혼란을 일으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관능적인 분위기가 퍼져 있는 곳들이 많습니다. 여기에서는 교리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도 더해져서, 많은 사람들을 온갖 일탈에 빠지게 하거나, 적어도 온갖 종류의 타락한 관습들에 대하여 매우 부주의한 관용을 보여 주도록 호도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할 수 있는 한 몸을 깨끗하고 순수하게 두려움 없이 지켜야 합니다. 성(性)은 하느님의 창조 능력에 참여하는 고귀하고 거룩한 것이며, 혼인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순수하고 두려움 없이 거룩한 정결을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양심을 단련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충분히 노력함으로써 우리의 양심이 제대로 형성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하며, 하느님의 은총인 예민한 양심과 그것과는 다른 세심한 양심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정결과 그에 수반되는 다른 덕목들, 곧 겸손함과 고상함을 기르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우리가 하느님의 눈에 들 수 있도록 크게 도와주는 덕목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의 느낌과 마음을 주의 깊게 성찰하고, 죄 지을 기회에서 멀리 달아날 수 있는 용기를 기르며, 성사들 가운데서도 특히 고해성사를 자주 하고, 영성 지도를 받을 때에 최대한 솔직해야 하며, 죄를 범한 뒤에는 슬픔을 느끼면서 참회와 보속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꺼이 성모님께 의탁하며,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얻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죄에 떨어진다고 하여도, 곧바로 일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은 결코 부족함이 없으며, 우리는 그 도우심으로 되도록 빨리 회개하여 겸손하고 성실하게 보속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순간적 패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위대한 승리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요새의 성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싸움터를 옮기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선악의 갈림길에서 간신히 선을 선택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간접적으로 악에 참여하는 일을 단호히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서 가장 사소한 잘못도 저질러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상시에도 열매를 맺는 사도직을 개발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거룩한 정결은 이 사도직에 반드시 필요한 받침대이며 가장 특별한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 동안 열심히 책임 있게 일해야 하며, 그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큰 값을 치른 대가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며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또 어떤 조언이 필요할까요?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해 온 것을 그대로 하면 될 것입니다. 또 즉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사용한 방법들을 따라 하면 될 것입니다. 영성체를 통하여 우리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돈독히 하고, 어린이처럼 성모님께 의지하며, 감각의 절제와 극기와 참회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그 방법일 것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욕망이 허용되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인 생활 전체의 요약일 것입니다. 사실, 정결은 사랑이며, 우리 신앙의 본질에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하느님과 끊임없이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셨으며, 비록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지라도 당신 팔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포기할 수 없으십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4-15).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지 않습니까?

우리 삶을 기쁨으로 채워 주고 하늘의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신앙에 대한 충실성이며, 둘째는 우리 각자가 받은 부르심에 대한 충실성이며, 셋째는 정결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그 충실성은 확고하고 품위 있고 기쁨에 넘치고 의심할 여지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길가의 덤불(음탕, 교만 등)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자신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등을 돌린 그의 삶 전체는 비참해질 것입니다.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결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점들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결점들 덕분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며, 갑옷을 입은 옛날 전사들처럼 하느님의 선하심 안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렇게 소리 내어 말함으로써 그 보호를 받습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1사무 3,6.8). 우리의 나약함은 결코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믿고 계시는 하느님 그분 때문에 우리 결점들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못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미 이야기하였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므로 다시 요약해 보겠습니다. 겸손해지고, 영성 지도를 충실히 받으며, 고해성사에 충실히 임하십시오. 마음을 넓게 열고 여러분의 영혼을 지도해 줄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마음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벙어리 영이 들어가면, 그 영을 내보내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겸손과 성실함이 서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덕목은 함께 작용하여 확고한 승리를 얻어 내는 바탕이 됩니다. 만일 벙어리 영이 영혼 속으로 들어오면, 모든 것이 파괴됩니다. 다른 한편, 만일 벙어리 영을 바로 내쫓는다면, 모든 것은 좋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고 삶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언제나 철두철미 빈틈없이, 그러나 예의를 갖추어 성실하게 살아갑시다.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제 마음과 육신에 대한 걱정보다 교만함이 더 걱정입니다. 겸손해지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완전히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은 판단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열고 영성 지도를 받으러 가십시오. 마음을 닫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듭 강조하건대, 벙어리 영이 들어오면, 그를 내보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가엾은 아이를 기억해 봅시다. 제자들은 그 아이를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기도와 단식으로 그를 해방시켜 줄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님께서는 세 가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첫째, 소년이 들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벙어리 영이 아이를 사로잡고 있을 때에는, 영혼이 듣기를 거부합니다. 둘째, 소년이 말할 수 있게 해 주셨고, 셋째,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숨기고 싶은 것을 말하십시오. 벙어리 마귀를 몰아내십시오! 덫에 걸려 있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작은 것부터 계속해서 바꾸어 나감으로써, 작은 눈덩이를 크게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영혼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실하게 임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을 충실히 따르면서 반드시 행복해지리라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명료성과 단순성, 이 두 가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입니다. 우리 영혼을 완전히 열어야만, 하느님의 광채와 사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항상 나쁜 의도 때문에 온전히 솔직하지 못하게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때로 잘못된 양심 때문에 솔직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양심을 너무 기형으로 만들어서, 자신에게 단순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그들은 침묵을 좋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훈련을 받아서 하느님에 관하여 제법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무언가가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그릇된 확신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성실함은 언제나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늘어놓더라도 핑계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마칠 시간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대화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결의 덕을 기쁘고 굳건하게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였습니다.

정결하신 동정녀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지극히 아름다우신 성모님께 의지하며, 제가 수년 전부터 강조했던 충고를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날마다 겸손하고 정결하고 성실하고 기쁘고 관대하게 살아가려고 힘껏 노력하지만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드렸던 충고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살면서 저지른 모든 죄들이 여러분에게 항의하며 대드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오히려 모든 것을 엄마에게 맡기는 어린이의 믿음으로 거룩하신 어머니를 부르십시오. 성모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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