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 (1964년 10월 11일 강론)

성모님의 축일들은 모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축일들은 우리가 마리아를 사랑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도록 교회가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성 축일’을 고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중심 신비들을 몇 가지 성찰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성삼위의 업적인 말씀의 육화에 관하여 묵상합니다. 마리아의 흠없는 모태에서 우리 주님께서 육화하심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딸 마리아는 또한 성령의 정배요 성자의 어머니도 되십니다.

창조주께서 마리아에게 계시하신 계획에 복되신 동정녀께서 자유롭게 ‘예’ 하고 응답하심으로써, 거룩하신 말씀께서 인간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분의 이성적 영혼과 육체는 마리아의 지극히 순결하신 모태 안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위격,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하였습니다. 그분은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 성부의 영원하신 독생성자요 마리아의 참 아드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모님께서, 신성과 인성의 어떠한 혼동도 없이 우리 인간 본성을 스스로 영원히 결합시키신 복되신 성삼위의 제2위격, 곧 육화하신 말씀의 어머니이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복되신 동정녀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그분의 최고의 품위를, 곧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크고 분명하게 부르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라는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에페소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이 진실로 하느님이며, 이 때문에 거룩한 동정녀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파문될 것이다. 거룩한 동정녀는, 하느님에게서 나시고 강생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육에 따라 낳으셨기 때문이다”(에페소 공의회, 제1조: DS 252/113).

역사는 우리에게 기쁨의 목격담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믿었던 것을 재확인해 준, 분명하고 명확한 정의를 얻었을 때 기쁨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치릴로 성인의 말을 들어봅시다. “에페소의 공동체 구성원들은 모두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결정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 신성모독자들이 물러났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우리는 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시노드에 환호하였습니다. 신앙의 적들이 몰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당을 떠나면서 우리는 횃불을 들고 집까지 갔습니다. 때는 밤이었고, 온 도시는 기쁨과 빛으로 가득 찼습니다.” 1600년이 지났지만, 저에게는 당시의 충만한 경건함이 마음 깊이 느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똑같은 신앙이 우리 마음 안에 불타오르고 감사의 찬양이 우리 입술에서 터져 나오도록 허락하십니다. 복되신 성삼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인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간택하실 때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성모 마리아의 망토 아래 피신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그분이 받은 모든 특전과 성덕의 원천입니다. 그 신적 모성 때문에,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셨고 은총이 가득하시며, 평생 동정이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로 들어 올려지셨으며,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천사들과 성인들 위에 모후의 관을 받으셨습니다. 하느님 이외에 그분보다 위대한 존재는 없습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사실 때문에 무한한 선이신 하느님에게서 오는 무한한 품위를 지니십니다.” 이것은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를 복되신 성삼위께로 이처럼 가깝게 인도하여 주신 성모님께 어떠한 감사를 드려도 모자랄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죄인이요 하느님의 원수였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주님과 화해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말씀께서 인간 본성을 취하실 때 어머니가 되어 주신 그분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었습니다. 이보다 더 위대하고 더 너그러우며, 아낌없이 퍼붓는 사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셨기에, 무한한 지혜로써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을 이룰 수많은 방법들을 선택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려는 당신의 뜻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첫 아담이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흙에서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첫 아담의 상처를 치유할 마지막 아담도 거룩한 동정녀의 모태에서 몸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범죄한 인간들의 살과 똑같은 살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포도나무처럼 내가 아름다운 가지를 자라게 하고 향기롭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집회 24,23: 대중 라틴말 성경 불가타). 우리는 오늘 미사의 독서에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성모님께 바치는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차기를 바라며, 그 안에서 언제나 우리를 굽어 살피시는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아름다운 사랑과 경외심의 어머니요 지식과 거룩한 희망의 어머니다”(집회 24,24: 대중 라틴말 성경). 이 말씀이 오늘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아름다운 사랑, 깨끗한 삶, 예민하고 열정적인 마음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교회에 충실히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 자체입니다. 거기에는 배신이나 이해타산 또는 태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맑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은 삼중으로 거룩하신 분, 곧 지극히 아름다우시고 지극히 선하시며 지극히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관한 말씀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상상하는 유일한 두려움은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물론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헌신할 때에 불안해하거나 겁을 먹거나 머뭇거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담대하고 용감하며 품위 있기를 바라십니다. 두려움과 관련된 성경 구절로서는 다음 말씀이 떠오릅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아가 3,1).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 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주님 스스로 자신을 감추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실 때에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더욱 열렬히 찾으려는 마음을 지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발견하면, 기쁨에 넘쳐 이렇게 소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그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네”(아가 3,4).

오늘 미사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 가운데 감동적인 장면 하나를 만납니다. 소년 시절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남아 성전에서 가르치신 장면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루카 2,44-45).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탓 없이 아드님을 잃고 그토록 간절히 찾아다니셨으며, 아드님을 찾아내시고는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나 부주의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을 때에, 지나온 발자취를 되짚고 필요한 모든 것을 바로잡도록 성모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한 번 더 주님을 두 팔로 끌어안는 행복을 알고, 다시는 주님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또한 지식의 어머니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에게서 가장 중요한 교훈, 곧 우리가 주님 가까이 있지 않다면 그 무엇도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경이로움도, 우리가 지녔던 모든 야망의 성취도, 우리 안에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는 한, 천국 본향의 영원한 사랑을 미리 맛보게 해 주는 거룩한 희망의 빛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 안에서 가르침과 진리의 온갖 은총, 삶과 덕의 온갖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집회 24,19: 대중 라틴말 성경). 참으로 현명하게도 교회는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잊지 않도록 배려합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이고,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랑이며, 우리에게 언제나 열려 있는 피신처이고, 언제나 기꺼이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주는 손입니다.

초기 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우리가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걸으신 삶을 명확하게 요약한 내용을 기억과 마음에 담아 간직해야 한다고 당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의학, 수학 등의 과목에서 기초적인 실수를 피하기 위하여 신속하게 참고할 수 있는 즉석 해결 방법들이 수록된 참고서의 요점들을 자주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고요하고 조용한 기도 시간에 성모님에 관하여 들었던 모든 내용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성모님의 생애 이야기가 우리 영혼에 깊이 새겨질 것이고, 특히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 머뭇거림 없이 성모님께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이 우리의 이기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든 어머니는 자녀가 어느 정도 이기적인 성향이 있고 어머니를 마지막 의지처로만 가끔씩 찾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머니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분들에게는 별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들은 그런 분들이며, 그분들의 이타적 사랑은 우리에게서 뻔히 보이는 이기심 속에서도 자녀다운 애정과 신뢰를 구별해 낼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성모 신심이 그렇게 긴급한 때에만 필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수치스러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애정 표현을 기록해 두지도 않으며, 그들을 저울질하거나 잣대로 측정하지도 않습니다. 자녀들의 사소한 애정 표현도 어머니들에게 꿀처럼 달콤합니다. 어머니들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며, 자녀들에게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되돌려 줍니다. 세상의 좋은 어머니들이 이렇게 행동한다면,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실지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셨던 시기, 성모님 곁에서 지내셨던 그 시기에 관하여 상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로서 성모님과 입을 맞추고 함께 노시며, 성모님의 돌봄을 받으시는 모습을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성모님과 지상 양부이신 요셉 성인의 사랑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자라는 모습을 보기 좋아합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참으로 세심한 배려로써 예수님을 대하시고 어린 시절 내내 돌보시며, 그분에게서 많은 것을 조용히 배우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분들의 영혼은 점점 더 인간이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영혼을 닮아갔을 것입니다. 그 덕분에 성모님, 그다음에 요셉 성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성심을 더 잘 이해하십니다. 그러므로 두 분은 구세주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최선의 길,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리아의 영혼이 여러분 각자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우리 주님을 찬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정신이 여러분 각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이 교부의 이어지는 말씀이 처음에는 과감해 보이지만, 그리스도인 생활에 분명히 영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육으로는 그리스도에게 어머니 한 분이 계실 뿐이지만, 믿음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열매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성모님과 동화되고 그분의 성덕을 본받는다면, 우리도 은총에 힘입어 많은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낳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혼들도 성령의 활동으로 그리스도와 동화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모님을 본받는다면, 어떤 면에서는 그분의 영적 모성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성모님에게서처럼 침묵 가운데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거의 아무런 말도 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되고 진실한 삶을 보여 줌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내밀한 유대의 표현으로 새롭게 성모님의 ‘피아트’(루카 1,38 참조: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를 끊임없이 기꺼이 되풀이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훌륭한 그리스도인에게서 직접 들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신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성모님을 몹시 사랑하였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간결하게 보여 주는 그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말하였습니다. “저는 요즈음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을 보면서 몹시도 당황스럽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공의회 준비 모임과 공의회 회기 동안에 ‘복되신 동정녀에 관한 주제’를 포함하자는 제안들이 있었습니다. ‘주제’라고요? 자녀들이 어머니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합니까? 그것이 교부들이 신앙을 고백하는 방식입니까? 복되신 동정녀에 대한 사랑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가 언제부터 토론 주제가 되었습니까?”

그는 계속해서 말하였습니다. “인색함보다 더 사랑과 상충하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크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모님을 모욕하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시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어머니이시므로, 교회의 어머니이심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세례를 통하여 당신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모든 사람을 한데 모으시는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을 찬송하는 호칭을 드리는 데 머뭇거리는 옹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교회의 신앙이 이다지도 다릅니까! 복되신 동정녀에 관한 ‘주제’라니요!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하여 토론합니까? 어린이들은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만일 그들이 착한 어린이들이라면, 어머니를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냉랭하게 접근하는 외부인들만이, 마치 연구 사례인 것처럼, ‘주제’니 ‘의안’이니 하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단순하고 믿음이 독실한 영혼은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모두 좋은 것은 아닐지 몰라도, 선의를 지니고 경건하게 마음속 생각을 거침없이 토로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마리아의 신적 모성의 신비에 관하여 성찰하며, 조용히 기도하고 마음 깊숙이 받아들입시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동정녀께서는, 온 세상이 담을 수 없었던 하느님을 태중에 감싸 안으시고 인간의 육신을 얻게 하셨나이다”(성모 미사의 복음 환호송).

오늘 전례의 기도문을 살펴보십시오. “영원하신 성부의 아드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의 모태는 복되나이다”(복되신 동정 마리아 공통 미사의 영성체송). 이 환호는 오래된 것인 동시에 새로운 것이며, 인간적인 것인 동시에 신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주님께서 곁에 계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세상에 오게 하신 어머니는 복되시나이다!”

“마리아의 사랑이 교회에 신자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머리의 지체들로서, 마리아는 육에 따라 실제로 그 머리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는 어머니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분은 어머니로서 조용히 가르치십니다. 그분은 말로 약속하시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영혼의 예민함과 세련된 감각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지니도록 가르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산악 지방의 한 고을로 갔을 때 엘리사벳이 드린 인사였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보여 준 믿음의 행동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그분은 아드님이 태어났을 때, 이 땅에서 하느님의 위대함을 관상하였습니다. 천사들이 찬미 노래를 부르고, 목자들뿐 아니라 이 세상의 중요한 인물들도 아기를 찬양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가정은 헤로데의 살육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여야 했습니다. 그러고는 30년 동안 조용하게 사십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작은 고을에서 다른 여느 가정처럼 단순하고 평범하게 사십니다.

거룩한 복음서는 성모님의 본보기를 이해하는 방법을 간략하게 몇 마디로 제시합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성모님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께 말씀을 건네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이야기합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그 모든 일을 성찰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며,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약하다면, 성모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요한 성인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모님의 요청에 따라 일으키신 기적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고 이야기합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아드님께 청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 주시며, 우리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소리칠 수 있도록 주님 자신을 보여 주시도록 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르치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루카 1,48). 인간적으로 말해서,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희망을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사람들의 눈에 그분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유딧, 에스테르, 드보라 같은 구약의 위대한 여성들은 당시 사람들의 환호와 칭송을 받으며 이 세상에서도 인간적 영예를 누렸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성모님의 화관은 당신 아드님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였습니다. 성모님에 대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으실 때까지 남은 지상 생애 동안 조용하게 지내셨다는 점입니다. 성모님을 잘 알았던 루카 성인은, 그분을 예수님의 첫 제자들과 기도 안에서 가까이 계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영원히 칭송받으실 분이 이 지상 생애의 끝 날까지 이렇게 사셨습니다.

성모님의 희망과 우리의 조급함은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느님께 우리의 작은 선행에 대한 보상을 당장 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우리 앞에 첫 번째 어려움이 보이자마자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자주 노력과 희망을 포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성모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봉헌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은 온 인류에 대한 참으로 위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말씀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교황님들이 성모님을 공동 구속자로 부른 이유가 있습니다. “참으로 충만하게, 성모님은 고통받고 죽어 가는 당신의 아드님과 일치하여 고통받고 거의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참으로 충만하게, 인류 구원을 위하여 성모님은 당신 아드님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힘이 닿는 한, 하느님의 정의를 위하여 아드님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님을 그리스도와 공동으로 인류를 구속하셨다고 올바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 수난의 순간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지치는 일 없이 이 순간을 거듭거듭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요한 19,25).

자녀들이 성공을 거두어 대중의 갈채를 받을 때에 마땅히 자부심을 느끼며 재빨리 그 곁에 나타나는 어머니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조차 뒤편에 머무르며 말없이 사랑을 보여 주는 다른 어머니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성모님의 방식이었고, 예수님도 그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때가 되었을 때, 성모님은 현장에서 들리는 소리를 슬픔 속에서 들으셨습니다.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39-40). 성모님은 고통받는 아드님과 하나 되어, 아드님이 부르짖으시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성모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은,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아드님의 사랑에 온전히 일치하여, 날카로운 칼에 심장이 꿰찔리는 무한한 슬픔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고요하고 사랑스러운 현존을 느끼며 새롭게 위안을 받으십니다. 성모님은 소리를 지르시지도 않고, 열광적으로 뛰어나가시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아드님 곁에 서 계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보시고, 그다음에 요한에게 고개를 돌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9,26-27).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이 대표하는 모든 인간, 특히 당신을 믿는 제자들을 어머니께 맡기셨습니다.

교회는 ‘복된 탓’(부활찬송)을 노래합니다. 우리에게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해 주었기에 복된 탓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마리아를 어머니로 얻게 해 주었으니 복된 탓이라고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안전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간청하시어 온갖 은혜를 얻어 주시니, 우리는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께, 그리고 당신 어머니의 자녀인 우리에게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자녀들은, 특히 어릴 때에는, 부모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그보다는 부모님에게서 무엇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 훨씬 더 마음을 씁니다. 우리가 어린이들처럼 매우 이기적인 경향을 보일지라도, 이미 언급하였듯이 우리 어머니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머니들은 참으로 마음으로부터 자녀를 사랑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사랑하며, 무언가를 되돌려 받으리라는 기대 없이 베풀기 때문입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분의 거룩한 모성 축일에, 우리는 평상시보다 더욱 마음을 기울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 좋으신 성모님께 예의를 차리지 않고 불친절한 때가 있었다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이제 제가 저 자신에게 자문하는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묻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얼마나 공경하고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일상 경험으로 되돌아가서, 우리가 혈육의 어머니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봅시다. 어머니가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준 자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머니의 가장 큰 바람은 자녀 곁에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자라서 더 이상 어머니 곁에 있을 수 없을 때, 어머니는 자녀의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가장 사소한 일부터 가장 중요한 일에 이르기까지 자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머니에게는 커다란 관심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모 마리아의 눈에는 우리가 늘 어린이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시는데, 그 나라는 오직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질 것입니다(마태 19,14 참조). 우리 자신을 성모님에게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모님을 공경할 수 있을까요? 언제나 그분 곁에 있음으로써, 그분께 말을 건넴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드림으로써, 그분 지상 생애의 장면들을 마음으로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투쟁, 성공과 실패에 관하여 그분께 이야기함으로써 성모님을 공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성모님에 관한 기도들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 기도들을 바쳐 왔습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이 기도들을 처음으로 바치는 것처럼 기도드립니다. 성모송과 삼종기도가, 성모님의 거룩한 모성에 대한 사랑스러운 찬송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듭 권장하는 거룩한 묵주기도를 우리가 바칠 때에,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마리아의 놀라운 삶에 관한 신비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신앙의 기본 신비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전례력은 성모님 공경 축일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러한 공경의 토대는 성모님의 거룩한 모성이며, 이 모성이야말로 복되신 성삼위께서 성모님에게 아낌없이 베푸시는 온갖 선물과 은총의 원천입니다. 복되신 동정녀께 드리는 공경 때문에 하느님께 드려야 할 흠숭을 소홀히 할 수도 있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 지식의 부족과 자녀로서 마땅히 드려야 하는 사랑의 부족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겸손의 본보기이신 성모님은 이렇게 노래하십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 1,48-50).

성모님의 축일이 오면, 그분께 애정 표현을 아끼지 맙시다. 그분께 더 자주 마음을 들어 올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그분께 청하며, 어머니로서 끊임없이 돌보아 주심에 감사드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분께 맡겨 드립시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착한 어린이처럼 행동하기를 바란다면, 마치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듯이 하루하루가 성모님을 사랑하기에 좋은 날이라면, 그러한 애정 표현은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날마다 일터에 가고 오고 하는 것이 성모님처럼 순결하신 분 곁에 오래 머무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조금 더 성찰해 보도록 권고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일을 하는 내내, 비록 어떤 특별한 생각을 하지는 않더라도, 무엇을 추구합니까?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올바른 지향을 지니고 일을 한다면, 우리는 선하고 깨끗한 무엇, 우리 양심에 평화를 가져오고 우리 영혼에 행복을 가져오는 무엇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표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이전보다 더욱 명료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순간적 행복이 아니라, 인간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심오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입니다.

지상에서 그러한 행복에 도달한 유일한 피조물이 하느님의 걸작이신 거룩한 성모 마리아입니다. 성모님은 지금 살아 계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성모님의 몸과 영혼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팔레스티나에서 태어나셨던 똑같은 분입니다. 그분은 어렸을 때 가브리엘 대천사에게서 소식을 듣고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신 분이고, 구세주를 낳으신 분이며, 십자가 아래에서 아드님 곁에 서 계셨던 분입니다.

모든 이상이 성모님에게서 현실이 됩니다. 그러나 그분의 숭고한 위대함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신 분, 모든 완덕의 총합이신 동시에, 우리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뒤에 계시기에 그분의 능력은 놀랍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간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어 주실 수 있고, 여느 어머니들처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여느 어머니들처럼 우리의 나약함을 알고 이해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변명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편한 길을 만들어 주시고, 비록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해결책이 없는 걱정거리에 대해서도 언제나 해결 방법 하나를 우리에게 마련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참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 안에 초자연적 덕들이 매우 빠르게 자랄 것입니다! 하루 종일 그분께 짧은 기도와 바람을 되풀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크게 소리 지를 필요도 없고 마음으로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묵주기도 다음에 긴 호칭 기도를 모아 바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 자유롭게 새로운 호칭 기도들을 생각해 내고, 새로운 찬송을 드릴 수 있으며, 우리가 감히 큰 소리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마음으로 수줍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성모님의 사랑의 의미를 개인적 경험으로 찾아보십시오. 성모님이 우리의 어머니임을 알고 어머니가 그런 분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어머니이고, 당신은 그분의 아들딸입니다. 성모님은 마치 당신이 이 세상의 유일한 자녀인 것처럼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십시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분께 말씀드리고, 그분을 공경하고,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직접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서 또는 당신만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여정을 시작하여 쭉 나아간다면, 이른 시일 안에 그리스도의 모든 사랑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비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꿈꾸어 온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곧 사랑과 정의를 위한 활동에 투신하며, 행복하고 강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고 자신에게는 엄격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믿음입니다. 성모 마리아께 의지합시다. 그분은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가 견실하고 끊임없는 발전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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