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시간은 보물이다 (1956년 1월 9일 강론)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동안, 우리가 다 함께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저는 소리를 내어 제 개인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을 매우 자주 저 자신에게 상기시킵니다. 여러분도 영혼의 기도 생활을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언뜻 보기에 오늘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에서 목표로 삼아야 하는 ‘사랑의 대화’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언뜻 보기에’라고 말한 이유는, 물론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 우리 주변의 모든 일이 참으로 명상의 주제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시간’입니다. 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렇지만 한 살 더 먹으면 살날이 한 해 줄어든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라고 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아마도 이런 말을 들을 것입니다. “오, 신성한 보배인 젊음이여, 흘러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나.” 물론, 여러분은 더 심오하고 초자연적인 내용이 담긴 관점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짧음을 회상하는 것도 제 이야기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 여정의 덧없음은 오히려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활용하도록 돕는 자극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을 두려워하도록 이끄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되며, 죽음을 재앙이나 궁극적 종말로 여기도록 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덕분에 한 해 한 해는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로 가까이 다가가는 계단이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시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성 바오로께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1코린 7,29)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공감이 갑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은 얼마나 짧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씀은 너그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꾸짖음이요, 주님께 언제나 충실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참으로 짧습니다. 사랑하기에도, 베풀기에도, 그리고 속죄하기에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낭비하거나 무책임하게 내버리는 것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기신 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을 펴서 읽어 봅시다.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마태 25,1-2). 복음서 저자는, 슬기로운 처녀들이 그들의 시간을 잘 활용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현명하게도 필요한 만큼의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6)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등을 켜 들고 나가서 기쁘게 신랑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날이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그날은 우리 생애의 마지막 날이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굳게 믿고, 지금부터 너그럽고 용기 있게 사소한 일들까지도 사랑으로 돌보십시오. 환하게 빛나는 등을 들고 가서 우리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합시다. 축제들 중의 축제가 하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말씀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교회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성경 말씀으로 힘을 얻으며, 하느님과 결합한 교회 안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혼인 잔치의 예복을 입고 왔는지 자문해 보시기를 간구합니다. 주의 깊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장담하건대, 우리의 혼인 잔치 예복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가장 사소한 일들에서조차 그 사랑을 모읍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더 살펴봅시다. 어리석은 처녀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들은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기름을 사러 나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정은 너무 늦었습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나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습니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습니다”(마태 25,10-11).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무언가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그러나 결국 이런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마태 25,12). 그들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몰랐거나 준비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제때에 기름을 쓰려면 미리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인색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소한 일을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시간이 있었지만, 적절하게 쓰지 못하고 낭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되돌아봅시다. 우리의 성화에 필요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단 몇 분의 시간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는 않았나요? 왜 우리 가족의 의무를 등한시하나요? 기도할 때나 미사 참례를 할 때에 왜 그렇게 해치우듯이 하나요? 어째서 자신의 의무를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행하지 않나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처럼 여유 있게 할 수는 없나요? 여러분은 이것들이 사소한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 사소한 일들이 바로 기름이요 연료입니다. 이것으로 등불을 밝히고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일꾼을 구하려 여러 차례 되돌아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았고, 어떤 사람들은 거의 해 질 녘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분이 약속한 품삯은, 달리 말하자면 그분 자신의 모습이요 그분을 닮은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왕의 모습이 돈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그러합니다. 그분은 각 사람의 처지에 맞게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우리의 경우를 보자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고, 신앙 안에서 자랐으며, 우리 주님께 명백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손짓하는 것을 느낀다면, 아무리 마지막 시간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많이 있는 것처럼 오랫동안 시장에서 서성대거나 햇볕을 쬐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단 1초도 남는 시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은 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넓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듣지 못한 사람들도 아주 많습니다. 저는 여러분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남는 시간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초자연적으로 말해서, 영적 불구자일 수 있습니다. 움직임이 없이 정체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의 일터에서, 자신의 가족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선행을 소홀히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왜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까?” 여러분에게 대답해 주는 분은 제가 아니라 바오로 성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온 생애를 바친다고 해도 사랑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데에는 시간이 짧을 것입니다. 오푸스데이를 맨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저는 주님의 외침을 쉼 없이 되풀이하였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선의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 안에서 이것을 실천하도록 격려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일을 할 때에 분명한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순수함 자체이신 분이지만, 제자들에게 순수한 삶으로 유명해지라고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너무 냉철하게 사셔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었고(마태 8,20 참조) 기도와 단식으로 수많은 날을 보내셨지만, 사도들에게 “나는 너희가 대식가나 술고래가 아니기 때문에 선택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순수하다는 것은 지금처럼 타락했던 당시의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늘 그러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절제된 삶은 인생을 긴 잔치쯤으로 여기던 사람들에게 가책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먹기 위해서 이미 먹은 것을 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오로 성인의 말씀이 딱 들어맞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삼았습니다”(필리 3,19 참조).

우리 주님의 겸손은 여전히 자신만을 챙기며 사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타격을 줍니다. 여기 로마에서 제가 종종 강조하는 것입니다만, 지금은 폐허가 된 아치 아래로 개선 황제들과 장군들이 행진을 하였겠지만 모든 것이 헛되고 교만과 자만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이 기념물 아래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이마가 아치 구조물에 부딪히지 않도록 머리를 낮추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겸손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은 절제와 겸손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이천 년이 흘렀지만 주님의 계명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 계명은 인간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가리킵니다. 제가 사제가 된 이래로, 자주 설교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참으로 많은 사람에게 주님의 계명은 여전히 새로운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계명을 실천하려고 전혀 또는 거의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슬픈 일이지만 진실입니다. 그럼에도 메시아의 말씀은 명약관화합니다. 주님은 늘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에게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이유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 우리가 낭비한 시간들을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우리는 쉽게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지 않고는 헛되이 변명만 늘어놓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주변에는 과중한 일에 시달리는 형제와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 도와주는지 알아채지 못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친절하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조심스럽고 세련되게 자선을 베풀면, 그들은 누구한테 고마워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것입니다.

가엾게도,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신들에게 자유 시간이 없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러 장터에 나온 일꾼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하는 일 없이 보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이른 아침 첫 시간부터 계속해서 긴급하게 일꾼들을 찾으셨지만, 그들은 어떤 유익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으실 때에, 우리는 ‘예’라고 응답합시다. 그리고 사랑을 위하여 기꺼이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마태 20,12)합시다.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고생이 아닐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마태 25,14). 이 비유에서, 세 종은 주인이 없을 때에 관리할 돈을 각각 다르게 받습니다. 여기에서는,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소심하게도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습니다”(마태 25,18).

자신의 일을 내팽개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무책임하게도 쉬운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그대로 주인에게 반납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는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의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종들은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들은 성실한 사람들로서, 자신들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인에게 돌려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이자를 받을 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간단명료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 19,13). 그렇게 하지 않는 인간의 삶은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 받은 보화인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며 인생을 보내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러한 행동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단지 한 탈렌트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한 탈렌트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많건 적건 간에 하느님께 받은 탈렌트를 잘 활용하여 이자를 얻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는 탈렌트를 선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온 사회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는 스스로 ‘하늘나라를 멀리하는’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이기심 때문에 세상일을 외면하고 뒤로 숨어서 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가진 것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님의 일에 봉헌합니다. 그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니며, 자신의 건강이나 명성이나 경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내 것, 내 것, 내 것’,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는 얼마나 형편없는 것입니까? 예로니모 성인의 주해에 따르면, “성경 말씀의 ‘악한 일에 기울어 나쁜 짓 하는’(시편 141,4) 것은 교만 죄에 빠진 사람뿐 아니라 게으르고 부주의한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내 것, 내 것, 내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사람을 쓸모없고 헛되게 만듭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을 향한 열망을 파괴하고 시간을 헛되이 쓰도록 유혹합니다. 여러분은 열매 맺는 사람이 되십시오. 자신의 이기심을 자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하느님과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하여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묻힌 재능을 다시 꺼내십시오. 그 재능으로 열매를 맺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초자연적 활동에서는 세상이 경탄할 만한 결과인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 놓는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재능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섬길 시간으로 딱 1년을 주셨다고 생각하십시오. 5년이 아니라, 심지어 2년이 아니라 딱 1년입니다. 오로지 이제 막 시작된 1년에만 집중하십시오. 그것을 하느님을 위하여 바치십시오. 그것을 땅에 묻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마태 21,33).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묵상은, 이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운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우리 인간의 불성실하고 배은망덕한 응답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였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저는 그 임자가 “멀리 떠났다”는 말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포도밭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포도밭 울타리 안에서, 포도 확 안에서 우리 앞에 놓인 일들에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그러고는 하루 일이 끝났을 때 탑에 올라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편안함에 안주한다면,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세요. 제 시간은 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포도밭을 돌보는 일에 저 자신을 붙들어 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이해력과 능력과 무한한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주님의 농장에서 일해야 하는 일꾼이라는 것을 잊을 권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먹거리를 마련해 주는 일에 우리를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농장의 울타리 안이 우리의 일터입니다. 이곳이 예수님의 구원 활동을 도와 우리가 하루하루 땀 흘려 일할 곳입니다(콜로 1,24 참조).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이 정말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여러분의 시간은 하느님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그러한 이기적인 생각이 여러분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심으로 투신하고, 교만을 이겨 내며, 바른 생각을 하십시오. 얄팍한 생각에 빠져 달아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장터를 배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탈렌트를 묻어 버리고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는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돌보아야 하는 포도밭을 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모두 주인이 맡긴 중요한 일을 무심히 넘겼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여기고 그에 어울리는 행동으로 그분의 구원 활동에 협력하며, 영혼들의 선익을 위하여 자신의 온 생명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봉헌하여야 합니다.

마태오 성인은, 예수님이 어느 날 베타니아에서 성안으로 되돌아가실 때 시장하셨다고 전합니다(마태 21,18 참조). 저는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에 언제나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온전한 하느님이실 뿐 아니라 참되고 온전한 인간이심을 볼 때에 특히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약점과 인간적 나약함조차도 활용하도록 가르치시며, 우리의 번제물을 기꺼이 받아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분은 시장하셨습니다. 우주의 창조주요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신 분이 배가 고프셨다니요! 복음서 저자가 이 세심한 부분을 놓치지 않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셔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부분이 저로 하여금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듭니다. 당신의 거룩한 겸손을 더욱 열심히 묵상하도록 인도합니다. 주님은 “온전한 하느님이요 온전한 인간”이십니다(퀴쿰퀘 신경). 주님은 온전한 하느님이시면서, 우리와 똑같은 살과 뼈를 지니신 온전한 인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전날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안으로 다시 돌아가실 때에 시장하셨습니다. 시장하신 예수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거기로 가십니다. 마르코 성인은 그때가 “무화과 철이 아니었다.”(마르 11,13)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시기에는 아무 열매도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아시면서도, 가까이 가보십니다. 그러나 나무가 겉만 번지르르하고 아무런 열매도 없는 것을 보시고는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르 11,14).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니요! 하느님의 지혜이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자들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꾸짖으신 이유는, 그것이 열매는 없고 오직 겉보기에만 풍성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교훈으로 삼읍시다. 열매 맺지 못하는 데에는 아무런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제가 잘 몰라서요.” 그러나 그것은 이유가 안 됩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을 것입니다. “제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제가 재능이 없어서요, 여건이 안 좋아서요, 주변 상황이…” 이것들도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릇된 사도직의 잎들만 무성한 자기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은 얼마나 가엾은지! 그런 사람은 열매 맺는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잘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들을 정리하고 온갖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직접 노력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에 초자연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야 선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열매 맺는 방향으로 힘껏 노력하고 있는지 주님께 여쭈어 봅시다. 크고 반짝반짝 빛나는 나뭇잎만 무성할 뿐 가까이 가 보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단지 나뭇잎만 있을 뿐, 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많은 영혼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자신들의 갈망을 채워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가엾은 처지에 있지만, 하느님께 충분한 가르침과 은총을 받았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한 번 더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1코린 7,29). 지상의 생애는 짧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를 잘 활용하겠다는 선한 의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다음부터는,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책망을 우리에게 하실 필요가 없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나는 황새도 제철을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때맞춰 돌아오는데 내 백성은 주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구나”(예레 8,7).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에는 나쁜 날도 없고 시기가 좋지 않은 날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기에는 모든 날이 좋습니다. 나쁜 날이 되는 것은, 사람이 날을 망치는 경우뿐입니다. 믿음 부족, 게으름, 우상숭배 때문에 하느님의 일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시편 34,2). 시간은 녹아 없어지는 보물입니다. 시간은 산의 바위 사이를 흐르는 물처럼 우리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갑니다. 내일은 머지않아 또 하나의 어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무척이나 빠르게 지나갑니다. 어제는 지나갔고 오늘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에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떠한 변명도 소용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너그럽고 인내로이 우리를 가르치셨고, 비유들을 통하여 당신의 명령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 필립보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질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 14,9) 이제 우리가 열심히 일할 때가 왔습니다.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마태 20,12)할 때입니다.

우리가 오늘 묵상하고 있는 주제를 잘 마무리하는 데 루카 복음 2장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어린이입니다. 그분의 어머니와 요셉 성인은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하여 애가 탔습니다. 멀리서 이스라엘의 율법 교사들을 가르치는 아들을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잘 생각해 봅시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루카 2,49)

부모가 아들을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잃었다가 다시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영혼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제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하여 저의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오늘 우리 기도의 열매는 어떤 확신이어야 합니다. 그 확신이란, 우리 지상 여정의 목적이 어떠한 때에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여정은 영광스럽고 보배로운 것이며, 하늘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고, 놀라운 것으로서, 인간과 하느님에 대해 책임을 지면서 관리하도록 우리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 여건을 변경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 우리의 직업, 일자리, 가정생활, 사회적 관계를 성화할 수 있습니다. 단지 세속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성화할 수 있습니다.

스물여섯 살에 저는 오푸스데이에서 우리 주님께 봉사하는 것의 의미를 깊이 깨달으면서, 온 마음을 다하여 간청하였습니다. 여든 살 노인의 성숙함을 주십사 하고요. 초보자로서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하느님께 제가 더 나이 든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의 시간을 잘 사용하는 법을 알 뿐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일에 매 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풍요로움을 주시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아마도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입니다. “제가 노인들보다 현명하니, 당신 규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시편 119,100). 젊다고 하여 생각 없는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머리카락이 희다고 해서 반드시 현명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님,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당신은 우리 어머니시요 예수님을 기르신 어머니시며,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보낸 시간을 잘 활용하신 분입니다. 저에게도 교회와 온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는 데 저의 날들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좋으신 어머니여, 필요할 때마다 저를 부드럽게 꾸짖어 주소서. 제 시간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저의 온 마음으로 깨우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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