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하느님과의 대화 (1964년 4월 5일 부활 제2주일 강론)

부활 제2주일에 저희 마을에는 경건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날 전례에서는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1베드 2,2: 미사 입당송) 하며, 영적 음식에 대한 갈망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또한 이날에는 (반드시 중병은 아니더라도) 병자들이 부활절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성체를 영해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몇몇 대도시 본당에서는 성체 행렬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라고사의 대학생 시절부터 저는 거의 수천 명의 남성들로 이루어진 3개 대표단이 커다란 촛대들을 들고 지나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용감하고 튼튼한 남자들이 무거운 촛대들보다도 더 강인한 믿음으로 성체 안의 주님과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어젯밤 자다가 여러 번 깨었을 때, 저는 염원을 담아 “갓난아이처럼”(1베드 2,2: 미사 입당송)이라고 되풀이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절실하게 느끼는 우리 모두에게 오늘 교회의 초대 말씀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우리가 매우 튼튼하고 강건하며, 주변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패기도 지녔지만, 하느님 앞에서 어린아이임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1베드 2,2).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또한 전례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은 또 얼마나 적절합니까!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께! 환성을 올려라, 야곱의 하느님께!”(시편 81,2: 미사 입당송) 그러나 저는 오늘 예수님을 향한 최고의 찬미로 이끄는 제대 위의 거룩한 성사에 대해서보다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확신,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고상하고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결과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합니다.

지금 그 상황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감실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저는 살면서 제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특별한 방법으로 깨달았고,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체험하였습니다. 저는 하느님 사랑의 힘과 저의 비천함을 바탕으로 저 자신을 바로잡아 깨끗이 하고 하느님을 섬기며,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강조하건대, 우리는 그동안 우리를 안일함 속에 하게 살게 했던 무력함의 잠에서 깨어나 새롭게 되어야 하고, 더 깊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다시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이 진리를 충만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에 기록되어 있듯이,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1요한 5,9) 하느님의 증언은 어떤 내용일까요? 요한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3,1-2).

여러 해 동안 저는 이 즐거운 현실에 굳건히 의지해 왔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저의 기도는 비록 어조는 다양하더라도 언제나 똑같습니다. 저는 그분께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여기에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 또는 저런 일을 제게 맡기셨고, 저는 주님께 의탁하였습니다. 저는 당신이 제 아버지이심을 알고 있으며, 어린 자녀들은 언제나 자신의 부모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제가 사제로 살면서 깨닫게 된 것은, 이처럼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면 영혼은 강력하면서도 깊고 고요한 신심을 지니게 되며, 올바른 지향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1베드 2,2). 이처럼 하느님의 어린아이처럼 살아가도록,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들을 맛보고 즐길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은 저의 커다란 행복입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1요한 5,4). 하느님의 어린 자녀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자기 영혼과 사회의 평화를 위한 위대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하느님의 눈앞에서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음과 미소함을 깨닫는 바로 그곳에 우리의 지혜와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하느님의 힘이 우리를 움직여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게 합니다. 우리가 비록 잘못을 저지르고 비참한 처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나약함을 이겨 내려고 힘껏 싸워야 합니다.

“선행을 배워라”(이사 1,17). 제가 여러분에게 자주 강조하였던 성경의 충고 말씀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선행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 일은 우리 자신부터 시작해야 하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친구 하나하나,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선행이 무엇인지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이 그 출발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간단하고도 놀라운 사실에서 시작하는 것이 하느님의 위대함을 성찰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다시 주님께 눈을 돌려봅시다.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예수님의 부드러운 질책이 여러분에게도 들릴 것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이제 우리도 토마스 사도와 더불어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뉘우침 속에서 외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저는 절대적으로 당신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언제나 주님의 가르침을 참으로 소중히 여길 것이며, 충실히 따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복음서의 한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아마도 제자들이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대담하게 질문하였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 ’”(루카 11,2).

이 대답에서 놀라운 점은 어떤 것입니까? 제자들은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우리 주님께서는 평범한 대화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비밀, 곧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계시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아버지를 신뢰하며 그분과 대화하고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안타깝게도 영혼 없는 찬양, 온갖 이론과 형식을 앞세우는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과 일대일로 나누는 인격적 대화가 아니라 허공을 향한 막연한 외침일 뿐입니다. 그럴 때면 우리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교부는 이 성경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가 이 구절에서 이해하는 바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긴 시간 동안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을 끝없이 늘어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 주님 자신이 과부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과부는 간절한 애원으로 불의한 재판관의 고집을 꺾었습니다. 또 다른 본보기는 한밤중에 먹을 것을 구하러 벗을 찾아간 사람입니다. 그는 우정 때문이 아니라 끈질긴 간청 덕분에 벗을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였던 것입니다(루카 11,5-8; 18,1-8 참조). 이 두 가지 본보기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끝없이 말을 늘어놓는 기도가 아니라, 필요한 것을 단순하게 끊임없이 간청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러분이 묵상을 해보려고 해도 집중을 하지 못해서 하느님과 대화를 할 수 없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는 마치 사막에 있는 듯 마음이 메마르고, 어떠한 생각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사랑하는 마음이 무뎌졌다면, 제 충고를 들어보십시오. 제가 그러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늘 하였던 일입니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 앞에 머무십시오. 그다음에는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님, 저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주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여러분은 분명히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연스럽게 지니는 신심은 영혼들이 갖게 되는 내적 태도이며, 마침내 우리의 존재 전체에 스며듭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심은 우리의 모든 생각, 모든 열망, 모든 애정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정 안에서 어린아이들이, 비록 깨닫지 못하더라도, 얼마나 자기 부모를 따라하는지 눈치채지 못하였습니까? 그들은 부모의 몸짓, 습관을 따라합니다. 자녀들이 하는 행동의 많은 부분은 그들 부모의 행동과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착한 자녀에게도 그런 일이 똑같이 일어날까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몰라도, 어떤 사람들은 놀랍게도 신앙이라는 초자연적 관점에서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얻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날마다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우리의 보잘것없는 처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 가득한 팔로 우리를 높이 들어 올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린이가 넘어지는 것과 어른이 넘어지는 것 사이의 큰 차이를 아십니까? 어린이들에게는 넘어지는 것이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들은 늘 넘어집니다! 그들이 울기 시작하면, 아빠가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사나이는 울지 않는 법이란다.” 그러면 아이는 아빠에게 잘 보이려고 점잖게 울음을 그치고 상황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렇지만 어른이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면 어떻게 될까요? 아주 불쌍해 보일 정도가 아니라면, 그 사람의 불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그 넘어짐 때문에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넘어진 사람이 노인이라면 치유되기 어려운 골절상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내적 생활에서도 ‘갓난아이처럼’ 되는 것이 유익합니다. 아이들은 마치 고무로 만들어진 것처럼 넘어졌다가도 바로 일어나 다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부모가 자기를 돌보아 주리라는 것을 압니다.

만일 우리가 아이들처럼 한다면, (결코 피할 수 없는) 내적 생활의 실패와 넘어짐이 단지 쓰라림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잠시 아파할 수는 있겠지만 좌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며 위대한 분이시고 무한한 지혜이시며 자비이심을 깨닫고, 자녀로서 참으로 기뻐하며 신선한 샘물처럼 솟아나는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아오면서 깨닫게 된 것은, 제가 하느님의 어린아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하느님의 ‘갓난아이처럼’ 그분의 말씀, 그분의 품, 그분께서 주시는 음식, 그분의 위대한 힘을 갈망하고, 마침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어린이처럼 되십시오! 더 어린이처럼 될수록 더 좋습니다. 사제로서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게 이행하려고 힘써 온 지난 36년 동안 (기나긴 세월이기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금세 지나간 듯합니다!) 수많은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때마다 저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바로 제가 어린이이며, 언제나 성모님의 무릎 위로 오르려 하고,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영혼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때로는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끼치는 중대한 타락은 언제나 자신이 어른이고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교만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뿐 아니라, 친구나 사제에게서 받을 수 있는 도움도 청하지 않습니다. 그 가엾은 영혼은 불행 속에서 홀로 헤매다가 길을 잃고 맙니다.

지금 당장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우리가 결코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오히려 더욱더 그분의 도움, 그분의 말씀, 그분의 빵, 그분의 위로와 힘을 간절히 열망하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1베드 2,2). 어린이가 되고자 하는 열망과 갈망을 더욱 기르십시오. 제 말을 믿으십시오. 그것이야말로 교만을 물리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며, 우리의 행동이 선하고 고결하고 거룩해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제 대학생 시절의 기억이 또다시 떠오릅니다. 그 얼마나 신앙적인 모습입니까! 전례 성가가 들려오고 향냄새가 퍼지며, 자신의 비참함을 상징하는 커다란 촛대를 든 수천 명의 남성들이 행렬을 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어린이와 같으며, 눈을 들어 아버지의 눈을 마주볼 수 없을 만큼 어린아이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저버린 것이 얼마나 나쁘고 쓰라린지 보고 깨달아라”(예레 2,19). 다시는 이 세상 것들을 돌보느라 우리 주님을 저버리지 않도록 굳은 결심을 새롭게 합시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더 키우고, 일상 행위를 위한 구체적인 결심을 합시다. 어린이와 같이 되어,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필요한지 깨닫고 하느님 아버지를 바라보며 외치는 사람들이 됩시다.

이제, 제가 예전에 이야기하였던 것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는 어린이와 같이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이러한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본성적으로 나약하지만, “믿음을 굳건히 하여”(1베드 5,9) 선행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어떠한 실수로 극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하더라도, 결코 주저하지 않고 다시 하느님 자녀의 길로 되돌아가서 언제나 두 팔을 벌리고 계신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팔을 기억하십니까? 아마도 아버지의 팔은 어머니의 그것처럼 편안하고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억세고 힘센 아버지의 팔은 우리를 꽉 붙들어 안전하고 훈훈하게 지켜 주었습니다. 주님, 그 강력한 팔과 튼튼한 손에 감사드립니다. 그 강인하고도 부드러운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제 잘못들에 대해서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 잘못들을 바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해 주시고 변호해 주시고 또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지혜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영’(zero)에 불과하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 역시 가엾은 사람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상상하며 그분처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양심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결심하고 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심이 지금 어떠하고 또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하느님과 이루는 인격적 관계에서 어떤 점을 더 발전시켜야 하는지 깊이 생각할 때에, 만일 여러분이 제 말을 올바로 이해하였다면 어떤 환상적인 모습을 떠올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날마다 주님께 작은 사랑의 징표를 보여 드린다면, 그분께서 참으로 행복해하심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생활 계획을 세워 투신하고 꾸준히 이행하십시오. 몇 분이라도 묵상기도를 바치고, 가능하다면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자주 영성체를 하십시오. 비록 대죄가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하고, 성체 조배와 묵주기도, 그리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은혜로운 수많은 신심 행위를 실천하십시오.

그러나 그 행위들이 완고한 규정처럼 되어서도 안 되고 숨 막히게 하는 감옥이어서도 안 됩니다. 이를 유용하게 적용하여, 힘겨운 직업 생활과 사회적 책무에 시달리며 세상의 한가운데를 여행하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은 하느님과의 대화를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활 계획은 손에 딱 맞는 고무장갑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부디 중요한 것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날마다 할 수 있는 일을, 그것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만, 성심성의껏 하면 됩니다. 그러한 신심 행위들을 통해서 여러분이 거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관상기도로 들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더 많은 사랑, 열망, 감사, 참회의 행위들과 신령성체를 할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일상적인 일들을 수행하는 동안에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화를 받고, 버스를 타고, 문을 열거나 닫고, 성당 앞을 지날 때에 일어나는 일이며,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을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 안에서 휴식을 찾으십시오. 하느님은 참으로 부드럽고 무한한 사랑을 지니신 아버지입니다. 날마다 그분을 ‘아버지’ 하고 많이 부르고, 마음속으로 홀로 그분께 말씀드리십시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저는 당신의 자녀여서 자랑스럽고 힘이 납니다.’ 우리 내적 생활의 참 모습이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느님을 향한 신심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지향으로 몇 가지라도 항구하게 실행함으로써 착한 자녀의 마음가짐과 생활 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경고하고 싶은 것은, 신심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정형화된 틀입니다. 그러한 틀은 종종 훌륭한 업적을 이루려고 하거나 착수하려는 열망으로 거짓 위장됩니다. 반면에 일상적인 임무들에 대해서는 나태해지고 등한시합니다. 이런 일이 시작되려고 하거든, 우리 주님 앞에서 성실하게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언제나 피곤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자문해 보십시오. 혹시 여러분이 하느님 말고 다른 것을 찾지는 않았나요? 여러분이 일을 할 때에 그 성실하고 인내하던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이전의 관대함과 희생정신의 결핍 때문이 아닌지 점검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동안 여러분이 해 온 형식적 신심 행위, 보잘것없는 고행, 즉각적인 성과가 없는 사도적 노력들이 모두 아무런 선익도 없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공허함 속에서, 어쩌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곧 그분께 온전히 충실해질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은 흘려버리고 새로운 계획을 구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놀라운 것처럼 보이는 이 구상은 오히려 악몽에 가까워서, 우리는 현실을 망각하고 성덕을 향한 가장 확실한 길을 잃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초자연적 관점을 놓쳤다는 명백한 표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어린 자녀이며, 우리가 겸손하게 다시 시작하기만 한다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는 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제 어린 시절의 기억 가운데 가장 생생한 것 하나는, 우리 집 근처의 산 위쪽 언덕길을 따라서 쭉 세워진 표지판들입니다. 대개 붉은 페인트가 칠해진 커다란 표지판들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눈이 내려서 길과 밭과 초원, 바위와 산골짜기를 뒤덮었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그 표지판들을 기준으로 해서 어디가 길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내적 생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봄과 여름도 있지만, 겨울도 있습니다. 햇빛 없는 날도 있고, 달빛 없는 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맺은 우정이 변덕스러운 우리 기분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기심과 게으름이 스며들고, 틀림없이 사랑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릴 때에 몇몇 신심 행위를 확고히 하는 것은, 언제나 길을 뚜렷하게 표시해 주는 붉은 표지판처럼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만 그 신심 행위는 감상에 젖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특정 상황에 알맞고 굳건히 뿌리 내린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시기를 견디면, 우리 주님께서 다시 햇빛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눈은 녹고, 우리 심장은 다시 한 번 빠르게 뛸 것이며 결코 꺼지지 않았던 불로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그 불은 시련의 시기에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는 노력과 희생 때문에 생긴 재 아래에 작은 불씨로 숨어 있었을 뿐입니다.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은 저를 찾아와서 몹시 슬퍼하며 제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저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모르지만, 저는 지치고 차가워졌습니다. 예전에 저의 신심은 확고하고 명료했지만, 이제는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같은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연기라구요? 좋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땅 위에서 뛰놀았다”(잠언 8,31)고 하였고, 바로 뒤이어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잠언 8,31)고 덧붙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뛰노십니다! 우리 마음이 차가워지고 감동이 사라져서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느낄 때에, 그리고 자신의 임무를 이행하기 어렵다거나 처음 세웠던 영적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여길 때에,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뛰노시며, 우리가 우아하게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기를 바라시는 때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께서 가끔 저에게 큰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한 때에 저는 대개 제 기호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제가 가는 길은, 제가 좋아하는 길이라기보다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가야 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사람이 하느님을 위한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위선이 아닐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거룩하신 분 앞에서 연기를 할 때가 왔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인내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행동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십시오. 힘들어도 그렇게 하십시오.

하느님의 어릿광대가 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뛰노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희생하며 사랑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확신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 의탁하며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저는 이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만, 주님을 위해서 그것을 봉헌하고자 합니다.’ 그다음에는 비록 연기를 하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일에 마음을 다하십시오. 복된 연기여! 단언하건대, 그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선자들에게는 그들의 연극을 관람할 대중이 필요하지만, 우리의 연기를 보시는 분은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거룩한 동정녀와 성 요셉, 모든 천사와 천상 성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적 생활에서 보여 줄 것은, “남몰래”(요한 7,10) 지나가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께! 환성을 올려라”(시편 81,2: 미사 입당송). 주 예수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죄 또는 사악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한 영혼이 주님을 마주 보고 그분께 마음을 열고 그분께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예컨대,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어린 사람들, 여전히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저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저의 한탄은 신뢰의 한 표현입니다. 제가 하느님의 품에서 빠져나오면 바로 넘어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조용하게 마치 하늘의 뜻을 받기나 한 듯이 덧붙이고 싶습니다. ‘지극히 의로우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찬미받으시며, 만물 위에 영원히 찬양받으소서. 아멘. 아멘.’

이것이 바로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를 실행에 옮기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지혜롭고 거룩한 행위이며, 우리의 사도적 활동이 열매를 맺는 원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니는 평화와 사랑이 이 원천에서 흘러나오며,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안함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만 한다면, 우리의 삶은 사랑 안에서 끝을 맺게 될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들도 성화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밀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끄러움 없이 거룩하게 살 것이며, 아버지의 집을 떠나 형편없는 추락을 겪은 뒤에도 아버지께 되돌아오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위선과 수치를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하시어 우리를 아버지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주님의 인사말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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