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그대는 마치 팔려고 내놓은 물건처럼, 그대의 마음을 들고 다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누가 그것을 원하겠습니까? 누군가에게 호소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그대는 그것을 하느님께 드리겠다고 결심할 것입니다. 

성인들도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대를 위한 피조물들? 하느님을 위한 피조물들입니다. 그대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그분을 위한 그대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올라가는 샘물로 갈증을 풀 수 있다면 왜 세속적인 위로의 흙탕물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구부리는 것입니까?

맨몸이 될 때까지 피조물들에서 초연하십시오. 성 그레고리오 교황의 말씀처럼, 악마는 이 세상에 자기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맨몸으로 싸움터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대가 놈과 싸울 때 ‘옷’을 차려입고 있다면, 그대는 곧 땅에 고꾸라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놈이 붙잡을 만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천사가 그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넌 인간적인 애착으로 가득 차있다!”… 그대의 수호천사더러 지켜달라고 청하는 것이 겨우 그겁니까?

초연함.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내 육신이 오직 세개의 못으로 고정돼 십자가 외에 다른 감촉은 못느낀다면 좋으련만!

완전한 초연을 요구하는 그 비범한 은총에 응답할 때 더 많은 평화와 더 많은 일치가 그대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합니까?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싸우되, 그대의 희망을 굳세게 하십시오.

가서, 거리낌없이, 어린애처럼 그분께 말씀드리십시오. 

“제게 ‘그것’을 요구하시는 대신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그대는 자신이 모든 사람을 멀리하고 또 냉정하게 대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대는 그렇게도 열심히 초연하고자 합니다! 

그런 두려움을 없애십시오. 그대가 그리스도께 속해있다면, 완전히 그리스도께 속해있다면, 그대는 모든 이들을 위한 불과 빛과 온기를 가질 것입니다. 이것들도 그리스도의 것이지만.

예수님은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십니다. 그분은 전부를 원하십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뜻에는 순종하지 않으면서… 대신에 하찮은 피조물의 비위는 잘 맞추고 있습니다.

분명 어딘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그대에게 주셨는데, 그대는 왜 세상사에 얽매여있는 것입니까?

이제 그대가 눈물을 흘리는군요! 아프지요? 당연합니다! 그렇게 되라고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입니다.

그대는 마음이 약해져서 이 땅에서 자신을 지탱해줄 만한 것을 찾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으려고 붙잡고 있는 것이 그대를 나락으로 끌어내리거나 그대를 속박하는 사슬이 되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말해보시오, 말해봐요. 이것은 우정입니까, 아니면 사슬입니까?

그대는 애정을 퍼붓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좋습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사도적인 영혼이여. 주님께서 그대 마음 안에 넣어주신 그런 느낌은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야 합니다. 

게다가, 그대가 마음의 자물쇠인 *일곱 개의 자물쇠 중 하나라도 열어두었을 때, 그대의 영혼에 미심쩍은 안개가 피어오른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음이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그대의 뜻은 순수했어도, 괴로운 마음으로 ‘내가 애정표현을 너무 심하게 한 것은 아닐까?’하고 자문했던 것입니다.

* 일곱 개의 자물쇠: 인간 내면에 있는 일곱 가지 죄원인 교만, 인색, 탐색, 분노, 탐식, 질투, 나태의 칠좌종을 막을 수 있는 마음 자세

온정을 제쳐놓으십시오. 의무가 먼저입니다. 그러나 의무를 수행할 때는 거기에 온정을 넣으십시오. 그래야 부드럽습니다.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 멀리 던져버려라!” 

가엾은 마음…. 그것이 그대를 죄짓게 합니다! 

그것을 잡고 손으로 꽉 짜버리십시오. 어떤 위로도 주지 마십시오. 그리고 위로를 청하면, 고귀한 동정심에 가득차 천천히, 마치 속삭이듯이, 이렇게 말하십시오. “마음을… 마음을 십자가에! 마음을 십자가에!”

마음이 어떠십니까?…. 걱정마십시오. 그대와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던 성인들도 그런 ‘자연적인’ 성향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만약 성인이라고 하여 그런 성향이 전혀 없었다면, 세상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마음(몸과 영혼)을 지킨 그분들의 ‘초자연적인’ 모습은 공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단 길을 발견한 후, 하느님 사랑에 완전히 빠져있고 결심으로 가득 찬 영혼에게는 마음의 나약함이 장애물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대가, 세속적인 사랑을 위해서 그렇게 엄청난 타락을 감수했던 그대가 주님을 위해 그 정도 모욕을 참지 못한다면, 과연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내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마음 속 ‘치통’을 앓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농담이라고 생각치 않습니다. 몇개를 ‘발치’해줄 훌륭한 치과의사가 그대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대가 허락만 한다면!….

“아, 내가 그것을 시초부터 끊어버렸다면 좋았으련만!” 그대는 내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때늦은 후회의 그런 외침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셈’을 하실 거라는 말을 나는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분이, 그 단어의 엄격한 뜻을 간직한 그런 심판관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이 되실 것입니다”

어느 거룩한 주교님이 쓰신 이 말씀이 누군가의 불안한 마음을 한두번 위로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대의 마음도 잘 위로해줄 것입니다.

고통이 그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겁쟁이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가지고 용감하게 그것과 대면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길이 얼마나 분명한지! 장애물들이 얼마나 뻔하게 들여다보이는지! 그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무기가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도 그대는 몇번이나 길을 잃었고, 몇번이나 비틀거렸는지! 그게 사실 아닙니까? 그대와 내가 알고 있지만 그대가 끊어버리려고 하지 않는 그 ‘가느다란 실(단련된 쇠사슬)’이 그대를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비틀거리게 하고 쓰러지게까지 합니다.

그것을 끊고 전진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는 겁니까?

하느님의 사랑은… 진정 가치가 있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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