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

욕망을 억제하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기도하는 영혼이 될 수 없습니다.

농담을 삼가는 그 정중한 말. 그대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명랑하게 미소짓는 것, 부당한 비난을 받을 때 침묵하는 것, 재치없고 거북한 사람들과도 친절하게 대화하는 것, 함께 사는 사람들이 불쾌하게 하거나 무례하게 구는 것을 매일 봐주는 것…. 이 모든 것을 끈기있게 참아내는 것이야말로 단단한 내적 금욕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고 말하지 말고, ‘저 사람이 나를 성화시킨다’고 생각하십시오.

희생없이는 어떤 이상도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자제하십시오. 희생자가 되는 것은 자못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수없이 결심했는데… 

그런 쉬운 결심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실망감을 그분께 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대는 그렇게도 비참합니다.

자신의 판단을 기꺼이 양보하는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어렵지요…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외롭고, 주목도 끌지 못하고, 가치도 없고… 몸이 달리지 않은 초라한 나무십자가를 볼 때마다, 그 십자가가 곧 그대의 십자가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매일같이 짊어져야 하고 쉽게 눈에 띄지도 않고 광휘도 위안도 없지만 못박힐 몸을 기다리는 그 십자가의 주인공은 바로 그대여야 합니다.

남들을 괴롭히지 않는 금욕거리를 선택하십시오.

금욕이 없는 곳에는 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적 금욕. 그대가 감각의 금욕을 멸시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의 내적 금욕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 비참한 현세에서, 고통의 잔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마십시다. 나중에 하늘에서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기쁨을 누리게 된다면, 10년, 20년, 50년을 고통받는다 한들 어떠랴? 

무엇보다도 ‘적절한 보상 propter retributionem’을 바라기보다는 보속의 정신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과 일치하여, 우리 주 하느님을 위로하고,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한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고통을 받는다면 어떠랴?…

눈! 눈을 통해 많은 사악함이 영혼으로 들어옵니다. 다윗왕의 경우와 같은 그런 경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대가 눈을 지킨다면 그대는 마음도 잘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 안에 ‘그대의 세계’를 갖고 다닌다면서 주위는 왜 두리번거립니까?

세상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희생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굉장한 희생에만 경탄하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 전부를 바쳐야하고, 완전히 금욕해야 합니다. 우리의 희생은 반드시 전번제全燔祭가 돼야합니다.

역설.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마음이 배신자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 그 마음을 *일곱 자물쇠로 잠가두십시오.

* 161 참조

그대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지 않는 모든 것이 다 장애물입니다. 그것을 뿌리째 뽑아 멀리 던져버리십시오.

도량이 좁고 성질이 급한 상사 밑에서 일하는 어느 영혼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참으로 성스러운 이 보물을 주셨으니 말입니다. 친절한 행동 하나하나를 당나귀처럼 뒷발로 걷어차는 사람을 또 어디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단 1분도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정해진 시간에 즉시 기상함으로써, 매일 그 첫 순간부터 자신을 정복하십시오. 

만약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순간에 자신을 정복한다면, 그대는 낮에 할 나머지 일들을 그만큼 앞당겨놓은 셈입니다. 

처음의 작은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처럼 사기가 죽는 일도 없습니다!

그대는 항상 패배합니다. 

어느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의 성화를 위해, 그의 사도직을 위해 일하겠다고 매순간 결심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그대는 승리할 것입니다.

‘게으름과 나약함’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대가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그런 유별난 연민을 제거해야 할 때입니다.

지상에서 인간의 보물이 무엇인지 말해주겠으니 그것들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굶주림, 목마름, 더위, 추위, 고통, 불명예, 가난, 고독, 배신, 중상모략, 감옥….

“영혼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는 적이며, 또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친구다”라던 누군가의 말은 과연 옳습니다.

육체에게는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조금 덜 줘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신하니까요.

과거에 그들이 그대의 나약함과 결점들을 목격했었다면 그들이 그대의 보속행위를 본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금욕하는 영혼들의 달콤한 열매는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서는 관용과 이해를, 반면에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엄격함을.

밀알이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대는 한개의 밀알이 되는 것을, 금욕을 통해 죽는 것을, 그리고 풍성한 이삭을 맺는 것을 원치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대의 밀밭을 축복해주시길!

그대가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금욕하지 못하는 것은 그대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속죄의 삶을 산다구요? 교만은 속죄와 병존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이유를 더 대보겠습니다. 주님께 아낌없이 하지 못하여 죄에 떨어진 후에 느끼는 그대의 괴로움은 진정한 고통입니까, 아니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나약하다는 것에 화가 나서 말버둥 치는 것입니까? 

그대가 겸손하지 못하다면… 자신을 매질하며 매일 새로운 장미꽃을 피워낸다 해도 그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것입니다!

쓸개와 초맛, 혹은 재와 쓴맛이라니! 입이 마르고, 설태가 끼고, 갈라지는 것이라니! 그러나 그런 육체적인 느낌은 영혼의 쓴맛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대에게 더 많은 것이 요구되고 있는데도” 그대가 자신을 내놓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지십시오! 그대가 최선을 다하는 데도 육신과 정신에 그런 쓴맛이 남아있겠습니까?

자신의 나약함과 옹졸함 때문에 스스로에게 벌을 주겠다고요? 좋습니다. 그런데 그대의 적인 동시에 형제에게 가하는 것과 같은 공정한 보속이라야 합니다.

가련한 우리 인간들의 행복은 그것이 아무리 초자연적인 동기를 지녔다 해도, 항상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그대는 무엇을 기대했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고통이 곧 인생의 소금입니다.

수천명의 군중이 감탄하며 바라보는 가운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어줄 듯한 사람들이 매일 매일의 바늘상처를 그리스도인의 정신으로 참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쪽이 더 영웅적입니까?

그대와 나는, 하느님께 속한 그 사람의 평범한, 그러나 영웅적인 생애에 대해 읽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아침식사 때마다 수개월, 수년 동안 투쟁해온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 양심성찰 때 그는 어느 날은 이겼으며, 그 다음 날은 졌다고 스스로 평가해서 기록해두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버터를 바르지 않았다…. 나는 버터를 발랐다!” 

그대와 나도, 우리 버터의 ‘비극’으로 생활하기를.

영웅적인 순간. 기상시간입니다. 정확하게! 망설이지 말고 초자연적인 생각을 하며… 벌떡 일어나십시오! 영웅적인 그 1분. 여기에 그대의 의지를 굳세게 해주고 또 육체를 약화시키지 않는 극기의 행위가 있습니다.

특별한 호의에 감사하는 것처럼, 그대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그 거룩한 경멸에 감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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