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움

세상의 모든 곳에서 구원이 실현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의 실현에 공헌하는 사람들이, 그것이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있을 것이라는 점, 이것을 확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구원을 수세기, 혹은 수십세기의 미래에 실현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헌신으로 영원히 실현될 수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대도 다른이가 "눈을 뜨게 해주러" 오기 전까지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헌신은 희생과 기쁨, 사랑,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어지는 첫걸음입니다. 이렇게 다행스러운 광기로 일생을 채운다면,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부정, 괴로움, 슬픔밖에 보이지 않던 곳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까워하지 말고 전진해 스스로를 변화하고 언젠가 무언가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그대는 부탁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 결심이 실현되기 위해서 무슨 방법을 쓰고 있습니까?

그대는 자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어려서부터 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행복을 얻었으면서도 정작 생명이나 가족이나 꿈 등 자신이 가진 것 중 최고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데 주저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대는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 마음에서 터져나오는 감사의 뜻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눈먼 사람이 갑자기 시력을 회복하면 놀라지만, 평소 시력에 문제가 없던 사람들은 앞을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주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하고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날마다 그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그대가 ‘감사하고 있습니다’ 라는 등의 말을 저에게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이 점을 천천히 묵상하십시오, ‘곧 내가 받고 있는 분량에 비하면 나는 아주 적은 것만을 요구받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좀처럼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그대에게 잘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대의 형제가 나에게 써내려온 말입니다. “노력이 필요하지만 한 번 ‘결심'해 버리면, 확고하게 자신의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얼마나 행복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것인가!”

“지난 며칠간 행복하기 짝이 없습니다”라고 그대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슴없이 그대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적지만 평소보다 헌신의 정도가 짙은 ‘삶의 방식을 선택’ 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주님의 부르심 —소명— 은 언제나 이렇게 제시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그렇습니다. 소명은 자기 부정 즉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자기 봉헌이 완전하다면 그 희생이 —기쁨과 평화― 로 바뀌어지는 것이 그 얼마나 유쾌합니까.

자신을 얽매더라도 전념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하려고만 했다면 그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다른 것을 해야 할 텐데···”.

그랬더니 다음 대답을 얻었습니다. “자, 우리는 주님과 흥정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법, 즉 주님의 초청은 그대들이 바로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버리거나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뒤로 물러남 없이 전진하여라, 그렇지 못하다면 가 버려라. “누구든지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나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관용의 결핍과 미적지근함 사이에는 단지 한 발자국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어떤 편지에서 소심한 태도의 전형을 옮기겠습니다. 타산지석으로 삼으십시오. “물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많은 기도가 필요하니까요. 그러나 만약에 우리 주님께 저를 사도가 되도록 청하실 때, 제가 자유를 바칠 수 있도록 까지 기도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의 친지는 아주 유식하고 잘사는 좋은 사람인데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그대는 물론 죄를 져서는 안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굴하고 타산적이며, 고귀한 이상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지도 헌신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그 얼마나 슬픕니까!

그대는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고 또 그대는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이 당신에게 요구되어야 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너무 어렵다”라고 그대는 낙심해서 외칩니다.

들어보십시오, 만약에 그대가 하느님의 은혜로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신 자신의 이해관계를 한쪽으로 미뤄두면, 그대는 하느님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게 될 것이고, 바로 오늘 전쟁이 치뤄지고 있는 싸움터에서 교회를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거리에서, 공장에서, 작업장에서, 대학에서, 사무실에서, 당신 자신의 주변에서, 그대의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그대는 써 보냈습니다. “막히는 부분은 늘 똑같은 일입니다. 저는 아쉽습니다. 길을 찾았는데 -피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목적지를 보이지 않게 하는 흙먼지를 털어내려고도 하지 않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화내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당신입니다. 당신 자신과 용감하게 싸우십시오. 그대가 가지고 있는 방법은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이기주의에 패배해서 사람들의 건전하고 즐거운 생활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또한 이기적으로 이웃의 물적 혹은 정신적 비참을 보면서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다면 당신이 어떻게 하든 나는 엄한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동료들과 형제인 사람들에게 거룩한 형제애를 느끼지 않고, 그리스도인 자녀의 대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산다면, 당신은 불쌍한 버려진 아이라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정상(頂上)? 헌신을 결심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답파해야 할 정상입니다. 하루하루 새로운 목표를 발견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관한 한, 한도가 있다고 들어 본 적도 없고, 한도가 정해져 있는 듯한 태도는 취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아까워하는 마음을 없애 버릴수록 그만큼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시간을 잠깐이라도 남겨두고 싶다는 이런 유혹에 자주 사로잡힙니다. 그런 시시한 유혹에 속마음을 바로잡고 대처할 수 있도록 이번에는 어떻게든 해 보십시오.

그대는 “전부가 아니면 그만둔다”고 하는 유형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그 얼마나 치욕스럽습니까!

아주 보잘것 없는 그대의 그 빈약한 자기 봉헌을, “전적으로” 유효해질 때까지 불을 댕겨 겸손하게 싸우기 시작하십시오.

우리들 가운데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사람들은 아무 것도 잃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주 많은 남녀들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 자녀들을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내놓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광과 기쁨입니다.

어려운 시련의 시간이 닥쳐오자 그 사람은 비탄에 빠져서 그대에게로 왔습니다.

그대는 기억하십니까? 그대에게 자신의 “분별하는” 조언을 해 주곤 하던 그 친구에게는 그대의 행동은 단지 일그러진 생각들의 결과이며, 의지의 조작이며··· 그러한 타입의 다른 “꾀”인 유토피아의 한 종류 일 따름이었습니다.

“하느님에게 헌신하는 것은 종교적 감성이 비정상적으로 심하다는 증거이다.”라고 단언한 그 사람은 잘못된 추론으로, 가족과 당신 사이에 타인 한 사람 즉, 예수가 끼어 들었다고 궁핍한 머리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그대가 그에게 퍽 자주 일러 주었던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영혼들을 갈라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긴급한 과업이 있습니다. 신자, 비신자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고, 선의의 사람을 모아서 영혼들을 위해 일하는데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고, 협력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엄청난 열성과 이해심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자신’이 초대되고 있다는 것, ‘자신’이 진심으로 공헌해야 하는 것을 깨달은 순간, 겁쟁이 같이 쭈뼛쭈뼛 물러나갑니다.

중대한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에, 거짓된 용기로 “전쟁이다! 전쟁이다!” 라고 외치기만 하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돈도 내지 않고, 입대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일부사람들이 ‘자선행위’를 두서너 푼이나 얼마간의 옷가지로 이해하는 것을 보면 슬퍼집니다. 그들은 복음서를 읽은 적이 없었던 것같이 보입니다.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굴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충분한 신앙과 용기를 갖추고 살아생전에 필요한 것까지 아낌없이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우물쭈물하는 사람에게는 설명해 주십시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게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다니, 인간적으로 봐서도 고상하지 않고 우아하지도 않는다고 말입니다.

“누구이든 무엇인가를 빌려 주고는 결단코 그것을 돌려받지 말 것이다. 만약에 그 사람이 그것을 돌려받는다면, 그것은 결코 전체 액수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전체라면, 그것은 정확하게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이 정확하게 맞는다면 그 사람은 생명에 대한 원수일 것이다.”

글쎄 그렇다면?··· 값을 헤아리지 말고, 언제나 하느님을 위해서 주십시오. 그러면 인간적으로 보더라도 한층 더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자라고, 거기다 헛되게 수고하는 일이 덜 해질 것입니다.

저는 그 단순한 사람의 얼굴이 벌개진 것을 보았는데 그는 거의 눈물을 쏟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번 정직한 돈을 내어 좋은 일들에 관대하게 기여했는데도 그는 “선한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부정직하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하느님의 전투에서 초심자의 솔직한 마음으로, 그는 투덜거렸습니다. “그들은 제가 희생을 치루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나를 희생시킨다!”

저는 그에게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내 고상(苦像: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 친구(親口:입맞춤)하였고, 그의 분노는 평화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대는 더 완전하게 헌신하고 싶은, 되돌릴 수 없는 형태의 헌신을 하고 싶은 강한 열망이 솟지 않으십니까?

그토록 사소한일들에서 주님을 거듭거듭 부정할 때 우리들 가엾은 인간들의 태도가 그 얼마나 우습습니까! 세월이 가고 그래서 우리가 사물을 참된 시각에서 보기 시작하면, 그 때에 부끄러움과 슬픔이 생겨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귀로 들으나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보지마는 깨닫지 못한다.” 이것들은 성령의 분명한 말씀들이다.

어떤 사람들이 사도직을 “보고”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기는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이 그것에 전념하지 않는다면 왜 근심합니까? 평온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대의 길을 따라 참아 가십시오. 만약에 그들이 나서기를 원치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가 “네”하고 말한 이래로 시간이 그대의 지평들을 넓혀 주었으며, 그 지평들에 새롭고 더 밝은 색채를 주었고 그리고 매일 그 지평들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그대는 “네”하고 말해야합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무한한 자기 봉헌의 스승. 그대는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면 그는 —그녀는—내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모님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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