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움

승천하신 그리스도: 가장 위대한 기적들은 단지 몇몇 사람에게만 보여졌습니다. 자연성은 신적 사업의 징표입니다.

철저하게 독점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때에는 바쁜 사람처럼 그리고 “대단한 구경거리의 일을 만듦”으로써 지체하지 않는 사람처럼 모든 일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이 방법으로 유일하고 비길 데 없는, 주님의 동반자됨을 잃지 않습니다.

그대가 분개해서 묻습니다. 저 사도직이 수행되어야할 주위 환경과 으례 하는 일들은 추악하고 더럽고 —그리고 뒤엉켜야 합니까? 그리고 그대는 덧붙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 일을 잘 해내는 데 그다지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텐데!”

저는 그대의 분개가 퍽 이유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마다 어떻게 말씀하셨고 그들 모두: 가난한 사람과 부자, 현명한 자와 무식한자, 명랑한자와 슬픈 자, 젊은이와 늙은이의 마음을 어떻게 끌어 들이셨나를 저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고 자연스러우시고 ―초자연적이시고— 하신지요.

능률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연스러워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위대한 화가의 손에서라 할지라도 —화필이, 만약에 비단덮개에 씨여져 있다면 거기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성인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느끼게 만듭니다.

성인들이, 비정상적이라고요? 그 선입견을 없애 버릴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수덕생활의 초자연적인 자연성을 가지고, 다음 점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신비스러운 현상들까지도 비정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현상들은 바로 다른 심리적이거나 또는 생리적인 사안처럼 그런 현상의 자연스러움일 뿐입니다.

저는 그대에게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지평선과 우리가 따라가야할 길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마치 아무 것도 갖지 않은 데 놀란듯이, 저는 반대 의견이 없습니다”라고 그대는 말했습니다.

문제 따위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명심하세요.

그 어처구니없는 아첨은 피했으면 좋겠어요.아마 의식하지 않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때때로 당신은 위에 선 사람의 어떻게든 좋은 것에 대한 취향이나 의견을 자동적으로 퍼뜨리는 확성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윗 사람의 결점을 재미있고 타인에게 가르치는데 열심해서 그 사람의 권위를 잃어버릴 정도로 스스럼없이 행동하고, 나쁜점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슬픈 태도는 더욱 삼가야합니다.

당신은 주위에 부자연스럽고 불신과 의심에 찬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냐면 체스 두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네 수 앞을 내다보고 내뱉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복음서를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의 깊은 위선적인 율법 학사나 파리사이파의 사람들이 슬퍼해야 할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질문하고 의문점을 제시하는데, 이는 '예수의 말꼬리를 잡기' 위해 곡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은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자연스러움이란 거칠고 지저분함이나 빈약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비참한 세상, 그리고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이빨 투성이의 세계를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지금도, 장래도 필요하고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을 버리는 것이 됩니다. 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구제한 뒤에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무시할 것인가요.

그대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지오? 그렇다면 가치있게 되도록 시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목적이 되게 하십시오.

그대는 무척이나 특별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야망이 가져 오는 문제는 그것이 무척이나 엄청나게 저속하다는 것입니다.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라고 엘리사벳이 우리 성모님께 말했습니다. 초자연적 덕행인 하느님과의 일치는, 언제나 그것과 함께 매력있는 인간적 덕행의 실천을 가져옵니다: 성모님은 자기 사촌집에 기쁨을 가져갔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데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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