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생활

옆에서 조르면 조를수록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이니까. (역주: 서양속담) 그러니까 좀 더 가까이 다가서세요.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내적생활을 의상에, 복음서에서 말하는 결혼 예복에 견주기를 좋아합니다. 함께 천에다 힘을 주는, 실같은 온갖 경건한 습관과 행동으로 천은 짜입니다. 그러므로 찢어진 옷은 비록 나머지 재료가 좋은 상태로 있다 하더라도 거절당하는 것과 꼭같이, 만약에 그대가 기도하고 일하지만 회개하지 않는다면(또는 다른 길로 돈다면) 그대의 내적생활은 (말하자면) 완전하지가 않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진지하게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임을 언제 인식할 것입니까?

화내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진지하게 받들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대의 그 경박함은 만약에 그대가 그것과 싸우지 않는다면, 슬프고 모독적인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대는 가끔 당신 성격의 나쁜 쪽이 나오게 내버려 두고, 그것이 한가지 경우 이상으로 터무니없이 거칠게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그밖의 경우에는 그대의 마음과 그대의 머리를 지극히 거룩한 성삼위를 위한 훌륭한 거처가 되도록 준비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그 결과, 언제나 당신은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버립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계속 이렇게 하면 그대는 결코 내적생활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경탄하고 주로 따라다니지만 그 인성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겉모습은 진실로 믿음이 깊어 보이지만 초자연의 덕을 실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연덕을 몸에 익히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에든지 다 듣는 약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거룩함(聖性)입니다. 그러니 성인들은 평화, 강의, 기쁨, 확신 등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감추어진 내적생활의 경이로움.

그대는 그들 앞에다 엄청나게 경이로운 새 세계를 놓아 주고 있는 중입니다.

그대는 얼마나 많은 새로운 일들을 발견했는지요! 그런데 여전히 가끔 차라리 순진해서 그대가 이미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이미 발견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유일하고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보물에 도달해서 그것에 손댈 수 있게 될 것이고, 주님께서는 만약에 그대가 사랑과 민감함으로 호응한다면, 늘 “새 일들”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단지 시작에 불과함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은 자신을 하느님과, 무한하시고 다함이 없으신 우리들의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데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들”을 이해하기에 이르는 것은 공부라기보다는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대는 一애정을 가지고一 일해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질병을 받아들여야 하고, 맑은 정신으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대의 나날의 성찰을 위한 요점이 있습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 하느님과 이야기함 없이 한시간을 지나가게 내버려 두었는가? 저는 주님께 자녀다운 사랑을 가지고 말씀드렸는가? 그대는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기만 하고 나머지는 방치해 두는 그림자 같은 존재도 아니며,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주인 같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는 비록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지만 손으로 만져보고 목격할 수 있는 그 어떤 현실보다 더 확실합니다.하느님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현존하고 계십니다. 우리를보고,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고, 우리를 인솔하며, 우리의 가장 작은 행실과 마음 속 마음을 보고계십니다.

그렇게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삽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한마디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감정을 억제하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느님에게 사랑을 표시하지 않고 보답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죽은 신앙’으로 계속 살아 있어도 되겠습니까?

만약에 그대가 하느님과 함께 있다면 그대는 분명히 “구제불능”한 많은 일들을 구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 저것 눈길을 주는 일 따위로는 하느님의 현존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쓸데없는 일로 너무 취한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묵상’이라는 말을 듣고 당신은 놀랄지도 모릅니다. 낡은 검은 표지의 책과 한숨이나 단조로운 반복 같은 기도를 떠올리니까.그러나 그런 건 묵상이 아닙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아버지이시며 그대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미 주신 것과 장차 받게 될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알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대는 언제나 주님 안에서 당신 나날의 생활 중의 모든 훌륭한 행위에서의 아버지이심과, 친구이심과, 충고자이심과 원조자이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은 사랑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겨우 극히 한정된 지식 밖에 얻을 수 없는데, 당신은 매일 끈질기게 수업에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왜 악착같이 스승이신 예수님한테 가지 않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맛과 내실을 가진 내적생활을 가르치고 싶은데 말이죠.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나 지상 최고의 보상도 늘 그대를 기다려주시는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값어치도 없지 않겠습니까.

매일 잠시 동안씩 묵상하여 하느님과 우정으로 결합하는 것은 그들의 생활을 좋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기 신념을 따라 생활하는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립니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은 작별인사를 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언제나 서로 같이 있습니다.

당신과 그리고 저는 그와 같이 주님 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가요?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외모로 서로 기쁘게해 주기 위해 어떻게 옷을 입는가를 눈여겨보지 않았습니까? 네, 그것이 그대가 그대의 영혼을 장비하고 장식하는 방법입니다.

은총은 자연같이 정상적으로는 점진적으로 작용합니다.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은총에 앞서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달려있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허락하실 때 우리는 그 길을 준비하고 협조해야 합니다.

영혼들은 대단히 높게 목표를 잡도록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상을 향해서 강요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줄어들거나 약해지게 해서는 안되는 가장 높은 목표로 인도하십시오. 그러나 거룩함(聖性)은 원래 자기 자신의 손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은총은 정상적으로는 그 시간을 취하고, 폭력으로 행동하는 데로 기울지 않습니다.

그대의 거룩한 성급함을 격려하되 그대의 인내력을 잃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에 보답하는 것은 정의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관대함의 문제입니까, 라고 그대는 물었습니다.

사랑의 문제입니다

“저의 일들이 가장 나쁜 순간에 저의 머리속을 설칩니다.”라고 그대는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대에게 가끔씩 내적 침묵을 이루도록 해 보고, 그리고 그대의 외적이고 내적인 감각들을 지켜 보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이미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몹시다···” 글레오파와 그의 동반자의 기도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당신과 제가 우리 곁을 지나가고 계시는 예수님을 “붙들어 두지” 못 한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주님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제가 그대에게 신약성서를 읽고 하나하나의 장면으로 들어가서, 등장인물 가운데 또 한 사람같이 그 안에서 역할을 맡으라고 충고하였습니다. 이 방법으로 매일 소비하는 몇 분씩은 그대가 복음에 “살을 붙이”고, 그대의 생활에 그것을 반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반영하도록 도와 줄 수 있게 해 줍니다.

전에는 그대는 무척 많이 즐기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지금, 그대의 전체 생활은 진지하고 남을 감화시키는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매료합니다.

그대가 모든 사람들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주님을 더 잘 알게 되십시오.

주의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십시오. 당신 주위의 ‘영적’온도를 올릴 때 당신 자신의 온도를 낮추지 마십시오.

모든 일을 하느님께 맡기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대의 친구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룰 때에, 그 상대가 그들의 여자 친구이건, 그들의 아내이건, 그들의 자녀들이건, 그들의 가족이건 상관없이 무척 친절하고 사려깊게 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을 주의해서 본 일이 있습니까?

주님께 그렇게 해드릴 가치가 덜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에게 일러 주고, 당신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을 요구하십시오. 그들이 주님을 그 방법으로 대해 드리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그들이 계속 친절하고 사려 깊으면서, 오직 주님과 함께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면, 그들이 이곳 지상에서까지도 그들이 결코 꿈꾸지 못한 대단한 행복을 이룩하게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일러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대의 영혼에다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의 씨뿌림을 위해 주님께서는 기도라는 힘있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마주 대면하면서 그대가 감실 앞에 있는 동안, 주님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대의 영혼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그대를 주님 자신을 위해 원하시고, 그대가 모든 것을 버려야한다는 것을 듣게 하십니다. 만약에 그대가 그것을 지금 부인한다면 그대는 비참한 반역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대가 그것을 잊었다면 그대는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여지껏 그대가 의심한 적이 없으므로, 그대에게 그대가 무시할 수 없는 일들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한, 당신 지도자의 초자연적 충고와 제의를 주님께서 사용하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처음에도 역시 그대의 영혼 안에 좋은 씨앗을 축적해 두기 위해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채워진 몇 가지 가정적 진실을 그대에게 일러 준, 그 고상하고 성실한 친구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원수가 그대의 영혼에다가 잡초의 씨를 뿌렸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원수는 그대가 편안하게 잠들어 있고 그대의 내적생활에서 느슨해져 버리는 동안은, 계속 그 씨를 뿌릴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고 그것이, 가끔은 그대가 받은 좋은 밀의 나락을 숨막히게 하려는 듯이 보이는, 모든 종류의 세속적인 잡초들이 그대의 영혼에 달라붙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것들을 영원히 뿌리뽑아 버리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은 그대에게 충분합니다. 상처인,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거기에 주님의 새 씨앗을 심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형제애, 사도직의 열성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 잡초의 표시가 조금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아직 시간이 있는 동안 그대가 그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한층 더 좋은 것은 그대가 잠들어 버리지 않고 밤새도록 그대의 밭을지 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노상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저들 축복받은 영혼들은 그들이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듣고, 주님을 즉각적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인식할 때 행복합니다.

우리가 그 행복을 누리지 않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주님을 따르려는 결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임을 그대는 잘 압니다.

다시 한번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대단히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대는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해서 해야한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오십시오. 더 가까이! 주님께서 그대가 신뢰할 수 있는 그대의 친구로, 그대의 안내자가 되실 때까지요.

그대가 저에게 말하기를 매일 그대는 하느님 안에 더 뿌리 박게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매일 그대는 그대의 형제들과 더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즉 주로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알기 위해 크게 눈을 뜨고 인생을 달려나가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턴 맑은 눈으로 달리십시오. 진정으로 당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주님과 함께 보기 위함입니다.

만일 내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혈액이 자연스럽게 상처를 향해 흘러가듯이 사소한 어려움에도 곧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 빵의 형상 속에 감추어진 예수님의 산 제사가 행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주님의 살을 가지고 그리고 주님의 피를 가지고, 주님의 영혼을 가지고 그리고 주님의 신성을 가지고 거기에 계십니다. 주님은 토마스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상처 안에다 자기 손가락들을 놓았던 그 날의 주님과 같으십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퍽 많은 경우에, 그대는 주님을 만났을 때 그대가 아는 어느 사람에게라도 보여 줄 만한 단순히 좋은 예절에서 나오는 가벼운 인사표시도 보여드리지 않은 채 어슬렁거리고 지나갑니다.

그대는 토마스보다 훨씬 덜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대에게 자유를 얻어 주기 위해, 그대의 절친한 친구가 교도소로 갔다면, 그대는 그를 찾아가고, 한참 동안 그에게 이야기하고, 그에게 어떤 선물을 가져가고, 그를 위로해 주고, 그에게 당신 우정의 따사로움을 보여 주려고 시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그 재소자와의 대화가 그대를 어떤 죄악에서 구해 주고 그대에게 선익을 준다면, 그대는 그 대화없이 해나가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한 친구 대신 그것이 그대의 아버지거나 또는 그대의 형제라면, 그 때에는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우리들 곁에 머물러 계시고, 우리들을 떠받쳐 주시고, 우리들을 인도해 주시기 위해 우리들을 위한 성체로 남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서만 갚아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매일 몇 분 동안이라도 주님께 우리들의 인사와 우리들의 자녀로서와 형제로서의 사랑을 가져다 드리기 위해 성체로 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늙은 하사관이나 혹은 한 젊은 위관이 훤칠하게 생긴 어느 신병이 그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보는데, 그 신병은 그 장교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이나 더 나은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경례와 답례는 여전히 행해집니다.

이와 대조되는 일을 묵상해 보십시오. 저 교회의 감실로부터, 그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그대에게 주시는,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대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대는 주님께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고 지나갑니다.

그대는 매일 성체를 조배하기 시작하였고, 그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습니다. “저는 감실등을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겪으시는 모든 신성 모독에 대한 보속으로 매일 적어도 한가지의 영적 교섭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그대는 그대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인사하고 그들에게 성실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그대와 나도 하루에도 몇 번씩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에게 그리고 수호천사에게 인사드립시다.

우리 성모님에 대한 살아있는 신심을 발전시키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선물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는 길을 아십니다.

거기다 또, 만약에 그대가 매일 거룩한 묵주기도를 믿음과 사랑의 정신으로 바친다면, 우리 성모님께서는 틀림없이 그대를 당신 아드님의 길을 따라 아주 멀리까지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모님의 도움없이, 어떻게 우리가 나날의 투쟁을 지속해낼 수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성모님을 찾고 있습니까?

수호천사는 특히 뛰어난 증인으로 항상 우리 곁을 지켜줍니다. 사심판(私審判)때 평생 동안 그대가 보여준 주님을 위해 행한 친절한 행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수호천사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대가 난처해짐을 느낄 때 원수의 무서운 고발이 있기 전에 그대의 수호천사는 —아마도 당신 자신이 잊어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를— 그대의 마음의 통고를, 그대가 아마도 성부, 성자, 성령께 지녔던 사랑의 증거들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수호천사이며 저 하늘나라의 왕자가 지금이나 또는 저 결정적인 순간에 그대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대의 영성체는 대단히 차갑습니다: 그대는 주님께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대는 극히 작은 하찮은 일로 주의가 산만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천사들이 현존함을 인식하기 시작해서부터는 그대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대가 자신에게 말하기를 “그들로 하여금 나를 이와 같이 보게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영원히—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할까?”하고 생각한 덕분에, 어떻게 그대가 주님의 사랑을 향해 적지만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할지 모르면서 메마른 마음으로 당신 자신을 볼 때, 자신을 가지고 동정녀 마리아께로 가십시오.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나의 원죄 없으신 성모님, 저를 위해 전구하여 주시옵소서.”

만약에 그대가 믿음을 가지고 청한다면 성모님께서는 그대로 하여금 메마름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을 맛보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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