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편안한 삶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20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리스도의 정신은 그 속죄의 힘, 인간 마음의 희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이것을, 자신만만하게 소리를 높여 퍼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먼저 이 진리를 당신의 마음에 새기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썼듯이 마음이라는 것은 남김없이 하느님 속에 넣어 버리지 않는 한 항상 불안감을 느끼기 마련이니까요.

사랑이란 한 가지 생각만을 따뜻하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만 살며,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기꺼이 자유롭게, 마음과 영혼을 담아서, 스스로의 의지가 된 타인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대는 아직 인색한사람이 자기 재물을 사랑하는 것같이,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사랑하는 것같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아직 당신 자신에 관해서, 그리고 그대의 사소한 일들에 관해서 너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대는 예수께서 이미 그대의 생활에 불가결의 존재로 되셨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주님의 부름에 철저히 부응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당신의 행동 하나에도 불가결한 존재가 되실 것입니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의 열광적인 외침이니까 큰 소리로 말씀드리십시오. “주여, 당신을 사랑하지만 저를 믿지 마십시오. 날마다 점점 더 강하게 저를 당신에게 묶어두십시오.”

마음은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이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우리 사랑의 모든 것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들이자는 거 아닙니까. "그러지 않으면 텅 빈 마음이 복수로 변해, 천하고 시시한 것으로 자신을 채우게 됩니다."

초자연적인 감각으로 넘쳐흐르는 사람의 마음보다 더 인간적인 마음은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생각하십시오. 주님은 은총으로 가득 차 있고, 아버지 하느님의 따님이시며, 아들이신 하느님의 모친이시고, 성령이신 하느님의 배필이십니다. 마리아의 마음 속에는 전 인류가 차별도 구별도 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모님의 딸, 아들인 셈입니다.

마음이 작은 사람은 자신의 열망을 초라한 상자에 넣어 그것을 옆에 두고 있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날마다 그대는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이해와 애정을 가지고, 물론 이와 함께 필요한 모든 정력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와 애정은 공모와 개인주의로 되어집니다.

거짓된 겸손이 없는 그 친구는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저는 어떻게 용서하는가를 배울 필요가 없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저에게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되 한 조각의 원한도 남기지 말고 진심으로 용서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항상 많은 결실을 맺는 훌륭한 태도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 덕분에 당신과 나에게 구원이 온 것입니다.

그대는 다음과 같은 극히 비그리스도교적인 비평을 들었을 때 매우 슬퍼했습니다. “네 원수들을 용서하라: 그대는 그것이 얼마나 그들을 성나게 하는지 상상도 못합니다!”

그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조용히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제 이웃을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사랑을 값싸게 만들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저는 주님을 본받기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해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조심해서 회피하십시오.

‘아니오’를 말하는 열 가지 방법 가운데서, 왜 그대는 언제나 가장 불쾌한 것을 택해야 합니까? 덕은 남을 해치지 않는 법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우리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것’을 가지고 모든 시대의 인류 전체의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스스로를 바친 사람들이 혼기를 놓친 홀몸처럼 되거나 남에게 그렇게 비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사랑인 주님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깊이 사랑해주시는 분을 사랑하지 못하면 그들은 진실로 나이 든 비열한 외톨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을 사랑과 정열의 바람으로 움직이는 풍차에 비교했습니다.

진실로 그 풍차는 밀이나 보리나 또는 마른 똥을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렸습니다.

거짓말의 아버지이며 자기 자신의 교만의 희생자인 악마는 주님께서 개종자를 찾으시는 방법으로까지도 주님을 흉내냅니다. 하느님께서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성스러움에로 인도하시기 위해 사람들을 활용하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탄은 그 일을 방해하고 그들을 멸망으로 끌어가기까지 하려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놀라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측근자나, 친척들이나, 친구들이나, 동료들을 도구로 되게하기 위해 찾으셨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악마는 역시 자주 우리들을 악으로 끌어 넣기 위해 우리가 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얻기를 시도합니다.

만약에 혈연의 속박이 우리들을 묶어내리고 하느님의 길을 따라가는 데 우리들을 뒤떨어지게 한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즉각적으로 끊어버려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대의 결심이 또한 반역 루치펠의 그물에 얽혀 있던 다른 사람들도 풀어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의 예수님, 사랑하셨고 극히 사랑스러우시며, 죽기까지 사랑하셨고 수난을 당하셨으며, 기쁨과 슬픔으로 충만하셨으며, 인간들의 일들을 기뻐하고 우리들에게 천국으로 가는 길을 보여 주셨으며, 당신 자신을 영웅적으로 의무에 내놓았고 자비롭게 행하셨으며, 빈자와 부자를 지켜보았고 죄인과 정의로운 자를 돌보아 준 마음을 가지고 완전한 인간이 되기로 한 당신의 결정에 대해 저는 감사드립니다.

저의 예수님 저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성심에 합당한 마음을 베풀어 주십시오.

깨끗한 불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주시기를 예수님께 청하십시오. 그 속에서 당신의 가엾은 육체, 가엾은 마음은 다 태워지고, 이 세상의 모든 비참함에서 지워집니다. 그리고 자신을 비우고 마음이 주님으로 가득 차게 된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깊이 자리잡은 혐오감을 주님께 부탁드리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으로만 지탱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당신에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소명이 분명해 보였지만 실은 머릿속으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마음은 길밖에 생각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단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한눈을 팔고 때로는 뒤를 돌아보기까지 합니다. 여지없이 마음의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좀 더 마음을 세련되고 완전히 바치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만약에 그대가 주님께서 그대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수행한다면, 그대는 그대가 진정으로 그대의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는 개인적인 희생이 요구되는 순간이 닥쳐왔을 때 그대가 부모에 대해 가져야할 온 정성을 다하는 애정을 방패로 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대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하느님 사랑 앞에다 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는 당신 자신의 자기 사랑을 그대의 부모에 대한 사랑 앞에다 놓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이제 복음서의 그 말씀의 관련성을 더 깊이 이해합니까?

마음! 때때로 그대가 어쩔 수 없이 그대의 철저하게 인간적인 기억이 그대의 마음에 거칠고, 불행하고, “꼴사나운” 그림자를 던집니다.

최소한 정신적으로라도 감실로 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대는 광명과, 행복과, 생명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찾아뵙는 빈도는 다음의 두 가지 요인에 비례합니다: 신앙과 마음, 다시 말해 진리를 보고 그것을 사랑하느냐 마느냐 문제입니다.

사랑은 자기 부정과 희생에 의해 강화됩니다.

넓은 마음을 갖고 좀 더 성실해지면 작은 일에도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일부러 짜증을 낼 필요가 있을 것이고, 때로는 약점에 져서 짜증을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그 화난 상태가 아주 잠깐 밖에 지속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더구나 항상 애덕, 즉 애정이 담긴 화풀이를 해야 합니다.

꾸짖는다? 많은 경우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점을 고치도록 가르칠 목적으로 그래야 합니다. 화를 잘 내는 성격의 방패막이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잡을 때는 명료하고 부드럽게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미소를 잊지맙시다. 또 예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예의에 어긋나는 심한 방법이 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당신은 선과 절대적 진리를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악을 송두리째 뽑을 개인적 직함과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사랑하는 분이 용서해 주신 것, 또 지금도 많이 용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착한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들은 예수를 사랑하니까. 또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십시오.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불행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사랑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한데서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 있고 길을 잃은 저 땅의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 줍니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들과도 같다.”

그리고 당신도 그대의 마음속 깊이 강한 동정으로 채워집니다. 그대가 지금 있는 곳에서 그대의 목숨을 모든 사람을 위한 번제물로 내놓을 것을 결심하십시오.

우리들의 친구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저의 가장 좋은 영적인 책이고 저의 기도의 주된 동기입니다. 그들을 보는 것은 저를 아프게 하며, 그들 하나하나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프게 하기 때문에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만약에 하느님 사랑이 우정 속에 넣어진다면 우정은 정화되고, 보강되고, 숭고해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찌꺼기와, 모든 이기적인 견해들과, 과도하게 세속적인 사려가 불타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들의 애정에 질서를 잡아 주고, 우리들의 애정을 축소시키는 일없이 순화합니다.

그대에게 생긴 일에 대한 생각이 당신 안에서 불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대가 단지 불쌍한 문둥이였을 적에 그대에게로 오셨습니다. 그 때까지는 그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대한 관심만을 발전시켰을 뿐이었습니다. 그 만남 이후에는 그대에게는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보는 은혜가 주어져서 그대는 주님과 사랑에 빠졌고, 그리고 지금 그대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대를 강요하여 모종의 방법으로 그대의 이웃을 돕게하던 그 이타심은 퍽 작게 보입니다. 그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대의 가엾은 마음을 감미로우시고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속에 넣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성모님께서 그 많은 찌꺼기에서 그대의 마음을 순화시켜 그것을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인자로우신 예수 성심께로 이끌어 주실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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