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 싸우고 있다면, 그는 매순간마다 자기 의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직면할 때는 조용해지십시오. 신앙이 없는 사람의 금욕주의적 냉정한 자세가 아닙니다. 생명이 바뀌는 것이지 빼앗겨 버리는 것이 아님을 아는 열정을 갖기를 원합니다. 죽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법학과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획득하였고, 마드리드 대학의 교수직을 신청 중이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의 대단히 힘든 주제를 전공하였고 두 가지를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그는 저에게 자기가 병이 났고, 제가 와서 자기를 만나달라고 말을 전해 왔습니다. 저는 그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신부님, 저는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인사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애정어린 위로를 하였습니다. 그는 총고해를 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그날밤에 그는 죽었습니다.

건축가인 친구 하나와 의사 한 사람이 저를 도와 염을 했습니다. 순식간에 부패하기 시작한 저 젊은 육체를 바라보면서 우리 셋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방금 완성한 최종 학력에 비하면 두 박사학위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죽음 빼고는 다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것을 해결한다.

죽음은 가차 없이 찾아옵니다. 많은 남녀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생을 마감할 때가 되어서도 이 세상이 떠나기 어렵고 괴로워합니다. 다른 사람은 아직 평생이 계속되기 때문에 지루하고 괴로워합니다. 어느 것도 이승에서의 행보를 목적 그 자체인 것처럼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버리고 영원한 논리에 닻을 내려야 합니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즉, 자기 자신과 덧없는 자기중심적 동기를 비우고 영원한 그리스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대가 죽음에 관해서 생각할 때 그대의 죄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미 그대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그대가 무슨 재료로 만들어졌는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대가 주님을 찾는다면 주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환영한 그 아버지같이 그대를 환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영원한 도시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것을 잊을까바 죽음의 시간에, 이를테면 이해의 부족에서거나 또는 박해 중에서거나 또는 무시당하고 있는 중에 이 진리가 가끔 조잡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언제나 외로움의 느낌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들이 비록 애정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다 혼자서 죽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옭아매는 밧줄을 모두 버립시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앞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 항상 임종의 대비를 해둡시다.

시간은 우리들의 보물인, 영원을 사기 위한 ‘돈’입니다.

그대는, 생명이란 소모되어야 할 것이고, 하느님께 봉사하는 데 불태워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송두리째 주님을 위해 소모함은 죽음에서 풀려나는 방법이고, 죽음은 우리들에게 영생을 얻게 해 줍니다.

친구인 그 사제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손을 잡고, 또 사람들이 이런 소중한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그러니까 그 사제는 스스로에게 타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가 죽더라도 모든 것은 순조로울 것이다. 하느님이 모두 돌봐주시니까.’

죽음을 그렇게 비극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사실 그렇지 않으니. 사랑을 물리친 자식만이 부모와의 만남을 반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곳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한움큼의 먼지입니다. “최근에” 죽어 버리고 전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수백만의 “중요한” 사람들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혁명은 아픔을 결실많은 고난으로 바꾸는 것과 악한 것을 무엇인가 선한 것으로 되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악마로부터 이 무기를 빼앗아 버렸고, 그리고 그 무기로 우리들은 영원을 쟁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판은 길을 완벽하게 잘 알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거나 또는 그들에게 그것을 따라가라고 격려하지마는, 자신들은 그 길을 따라가려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두려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그들 자신의 입을 통해 심판하시고 처단하실 것입니다.

연옥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보여 주고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결함을 씻어 버립니다.

오직 지옥만이 죄에 대한 처벌입니다. 죽음과 심판은 단지 결과들일 뿐이고 하느님의 은총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 결과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대가 당신 자신을 영 형편없는 피조물이라고 보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들의 누이인 죽음에 대한 생각에 불안을 느낀다면 마음을 다잡으십시오. 하늘나라가 우리들을 기다리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무한한 아름다움과 위대함, 그리고 행복과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인 보잘것없는 진흙 그릇에 언제나 새로운 기쁨의 신선함으로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어지게 될 때 그 경지는 무엇 같겠습니까?

정직한 영혼이 현세의 잔인한 불의에 직면한다면, 그 영혼이 자기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정의를 기억 할 때 얼마나 기뻐뛰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그 영혼은 생산적인 열망으로 저 바오로의 감탄을 발합니다: “더이상 살아있는 것은 제가 아니고” 내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그들이 죽을 때에 엄청나게 행복한 것은 틀림없이 자기 생명의 일분마다를 영웅적으로 산 이들일 것입니다! 제가 그대에게 그렇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이 만남을 위해 조용한 조바심으로 여러 해 동안 준비해 온 이들의 기쁨을 제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주님을 저버리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바보짓을 하지 않는 한 그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이 우리들의 지상에서의 귀양살이를 단지 잠시 동안만 있게 만들어서까지, 모든 일에서 우리들을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관한 생각은 그대가 사랑의 덕행에서 자라나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이 사람이나 저 사람과 함께 있는 이 독특한 순간이 최후의 것이 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또는 당신 또는 저는 어느 한순간에 가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결합할 야망을 가졌던 영혼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다행히 우리들 인간들은 영원하지가 않다.”

이 한토막의 소식은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매년5천 1 백만명이 죽고, 1 분마다

97명씩이 죽는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이미 우리들에게 그 점을 일러 주신 것입니다: 어부는 자기 그물을 바다에다 던집니다, 하늘나라가 그 그물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잡힌 것 가운데 좋은 것은 골라지게 될 것이고 쓸모없는 나쁜 것들은 영원히 버려질 것입니다. 매년 5천 1 백만명이 죽고, 1 분마다

97명씩이 죽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러 주십시오.

우리 성모님은 육신과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자녀들인 우리들은 성모님과 떨어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대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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