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충성

충성을 지키면 불안정해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과 행복이라는 것도 확실히 가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순간마다 이것이 실현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빛으로 채워주실 때도 있고, 그렇게 해주지 않을 때도 있다고 그대는 제게 털어놓았습니다.

장담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한없이 다정한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빛이 빛만 나면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빛이 빛나지 않을 때도 도움이 되어 더욱 더 당신을 빛나게 해줍니다.

땅의 소급.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은 一당신과 나도 역시一 땅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염을 예방하기 위하여,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 세상을 간맞추기 위하여.

그러나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보태셨습니다: 만약에 소금이 싱거워지면 그것은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힙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대는 이제 전에는 설명 할 수 없었던 일에 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도(使徒)가 이 현세와 사랑에 빠져 데살로니카로 가 버린 것을 슬퍼할 때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의 그 말씀은 저를 몸서리치게 합니다. 하찮은 일 때문에, 그리고 박해의 두려움 때문에, 성 바오로가 다른 편지에서 성인들 중에 넣어 언급했었던 이 사람은, 하느님의 사업을 배반하여 버렸습니다.

제가 얼마나 작은가를 인식하였을 때 저는 몸서리를 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저를 이끌어 나 자신에게 무관심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들에 있어서까지도 주님께 성실하기를 요구하게 하는데 —그것은 만약에 그 일들이 저를 도와 그 분께 더욱 결합하게 하지 않는다면, 저는 그 일들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스스로 나섰다 반복하는 역사상의 시기가 수없이 많지만 충성에 대한 그대의 생각이야말로 그런 시기에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종일 마음과 머리와 입으로 ‘로마’라는 사념을 반복하고 있다고 당신은 써 보낸 겁니다

대발견. 어중간하게밖에 몰랐던 것이, 사람에게 설명해야 할 단계에 이르러서는, 명백히 알게 된 것입니다.

쓸모없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과 천천히 침착하게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그때 물레방아를 돌리는 당나귀가 되어라, 즉 커다란 눈가리개를 했으므로 싱싱한 과수원 꽃과 열매 등 내 작용의 결과를 보거나 맛볼 수는 없지만 정확함의 효율성에 자신을 가지고, 성실하게 계속해 나가라고 끊임없이 제가 말한 이유를 당신은 더욱 똑똑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충성을 유지하고 싶다면 교육을 받겠다고 강하게 임해야 합니다. 모르긴 해도 진리와 일치하지는 못할망정 진리에서 멀리 떨어진 생각이나 태도를 확산시키거나 변호하는 위험은 성실한 사랑을 위해서도 절대로 범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확고한 영속적인 충성과 인내를 유지하고, 끊임없이 주의 깊은 사랑의 마음으로 섬김으로써 비록 얼마 안 되지만 당신의 기쁨과 쉼터가 되기를"이라고 당신은 적어 보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느님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쉼터가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당신의 결심을 굳히기를 바랍니다.

열심해진 어떤 사람들이 나중에 떠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서 천에다 실을 꿰는 데 사용하실 바늘입니다.

그건 그렇고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들이 계속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동요하고 있는 그대를 저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베낍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쓸모없는 도구라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삶의 방식과 문제 해결 방식은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의 저에게는 끝까지 견뎌내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기 때문이죠.”

하느님께 맡기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십시오.

그대의 인생은 봉사의 일생입니다. 다만 항상 무조건 완전한 봉사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일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은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인 것처럼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수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그런 생각에는 절대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술은 갖추었지만, 승진해서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서만 쓰는 사람을 보면 슬퍼집니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다른 사람의 정직하고 결백한 태도를 보고도 그것이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그렇게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대는 인내하고 올바른 뜻을 지키며, 그대의 뜻을 사랑으로 이룰 수 있도록 반복하는 힘을 스승이신 주님께 부탁드려야 한다. : 주님, 제가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사랑으로 수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교회와 교황과 교황좌에 대한 충성심을 키워야 합니다. 게다가 항상 한층 더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신은 교회를 좀 더 사랑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흉물스럽게 만들려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 희망은 커집니다. 당연합니다, 교회는 그대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교회와 사람들을 섬기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이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조만간 오히려 교회와 사람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게 됩니다.

교회 구성원이 취하는 특정한 사적 혹은 공적인 태도를 그리스도 신비체의 태도로 여기는 듯한 잘못만은 피하기 바랍니다.

태도와 행동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사람들을 그런 잘못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대의 일관된 태도와 충성심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 것입니다.

전 모르겠습니다. 왜 그대는 도덕과 신앙을 얘기할 때 스스로를 자주 독립한 가톨릭 신자라고 말합니까.

도대체 누구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잘못된 독립은 그리스도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관한 일에서는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합금을 만들었을 때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질 높은 쪽의 금속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보물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복음서가 말하듯이, 그대는 언제 어느 때, 소유자, 즉 하느님께 책임을 물을지도 모릅니다.

교회에 갈 뿐만 아니라 사람들 눈에는 신앙심이 깊어 보이고, 분명 진심으로 믿고 있는 가톨릭 신자겠지만, 어리석게도 교회의 적의 앞잡이를 메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나도 동감합니다.

에큐메니즘(교회일치운동)과 다양성, 민주주의 등 갖가지 이름을 마구 쓰다 보니 최악의 적, 즉 무지가 그들의 집에 잠입해 버린 것입니다.

비록 하나의 역설로 보여지기는 하지만, 자신들을 성교회의 자녀들로 부르는 자들이 크나큰 혼란을 심는 자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싸움에 지쳐있습니다. 신의를 저버린 분위기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누구나 쓰러진 사람을 덮쳐 짓밟으니까 말입니다.

저는 그대가 왜 놀라는지 모르겠습니다. 똑같은 일이 그리스도 주님께도 일어났지마는, 주님께서는 바로 병자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해 주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블충실한 자들은 충실한 사람들이 비활동적인 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데 열성입니다.

종파심에서 도망치십시오. 그것은 충성스런 협력에 반대됩니다.

진정한 일치를 밀고 나가려면 속속 분열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분열의 추진자가 정당한 권위자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으려는 속셈을 갖고 있을 때는 더욱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그대가 들었을 때 그대는 대단히 사려깊어졌습니다. “저는 알렉산더의 것도 아니고, 또는 샤를마뉴의 것도 아니고, 또는 그리스도의 일곱 성자의 그것도 아닌, 저의 어머니인 성교회의 피가 내 혈관에 흐르기를 바랍니다.”

인내하는 것은 사랑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per lpsum et cum Ipso et in Ipso··· 진실로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자신께서, 나와 함께,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 안에.

아마도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에는 일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혹은 그들과 어떤 특수한 순간에 접촉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여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대가 현실의 진실을 알고 실패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너무나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그대 자신의 비참함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더구나 소수 인간의 나약함을 이유로 예수님과 교회를 욕한다면 그런 태도는 공정하지 못하고 신의에도 어긋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알려지기 위해서 주님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여지는 것에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보여진다고 해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스무 세기가 지나가 버렸는데도 매일같이 그 광경은 반복됩니다: 그들은 계속 주님을 심판하고 매질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고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말로 계속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이오? 저는 주님을 모릅니다!

저는 모든 곳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일깨워 주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스러우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대단히 정의로우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남의 이목을 의식해 신의를 저버린다면 사랑의 부족이고 인격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대의 눈을 복되신 동정녀께로 돌려서 얼마나 성모님이 신의의 덕행을 실천하시는가를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도움이 필요로 할 때 복음서는 이르기를 “기뻐하며 서둘러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본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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