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함

그대는 십자고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고, 이런 결심을 하였습니다: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나 때문에 진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

퍽 자주 진리가 사실이 되기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진리는 일관된 삶을 요구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대로 말한다고 싫은 내색을 할 바에야 왜 굳이 묻습니까?

혹시 당신의 실수를 정당화하고 싶어서 당신에게 맞는 진리를 기대했던 것은 아닙니까?

그대가 진리는 크게 존중하고 있다고 보증합니다. 그러니까 그대는 ‘공손한 태도로’, 항상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입니까?

바보 같은 행동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알고, 사랑하고, 지켜야 할 진리를 매일 더 깊이 알고, 강하게 사랑하고, 더 강한 확신을 갖고 지키기를 원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광신이 아닙니다.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드리지만 거꾸로 거짓 자유의 이름으로 이 정도 행동을 반대하는 사람이야말로 당파 근성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노(No)라고 하는 것은, 곧 신앙의 진리를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가톨릭 신자로 선언하는 그대는 예수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연구를 계속해 당신이 확신하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와 과학, ‘진리’와 생활 사이에 모순이 없는 것, 모순이 있을 수 없는 것을 나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대가 선입견에 가득찬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하더라도,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마치 논쟁의 근거나 말의 의미가 그들의 행위에 의해서 또는 그들의 주장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생각하더라도 맡은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들로 하여금 그대를 이해하게 시도해 보십시오. 그러나 설사 그대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 해도 하여튼 계속해 나가십시오.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을 납득시키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사람이 상대가 아닌 한 모순들을 제거해줄 가치는 있습니다. 인내와 인내를 거듭해도 밝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자기네들 자신의 머리 속에 가지고 다니는 것 이외의 것은 아무 것에도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귀기울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라고 남들에게 요구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가 없는 사소한 거짓말을 했을 때 불안을-불쾌한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면 진리를 사랑한다고 믿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해로운 거짓말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니, 작다거나 무해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대는 그토록 비열한 의도를 가지고 보고 듣고 말합니까? 왜 타인의 의향 가운데가 아니라, 실은 그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나쁜 일들”을 타인의 마음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것입니까?

읽는 사람이 바른 뜻으로 읽지 않는다면 쓴 사람의 바른 뜻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파벌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모든 활동에서 단지 파벌주의만을 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좁은 마음으로 자기 이웃을 잽니다.

저는 사무실에 있는 저 사람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는 어떤 문제들이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짐작했고, 그것들은 결국 인생에서는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음에도 그가 그 문제들에 관해 들었을 때 깜짝놀라고 불쾌해했습니다. 자기가 마음 편히 남아있게 되도록 자기 자신의 시각의 그늘이나 황혼 속에서 살기 위해, 그는 그 문제들을 모르는 채로 남아있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충고하기를, 이 일들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마주 대해서, 바로 이 방법으로 그 일들이 제거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정말로 평화롭게 살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확언하였습니다.

그대는 문제들을, 당신 자신의 것들이건 다른 사람의 것들이건 간에, 그것들을 무시함으로써 해결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게으름과 안락 추구에 못지않는 것으로, 악마의 행동에 문을 열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의 의무를 수행하였습니까? 그대는 올바른 의도를 지녔습니까? 그랬다구요? 그렇다면 만약에 자기네들 자신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악을 발견하는 뒤틀린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에 따르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당신의 결심을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나빴던 것인지 조사하듯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확신을 갖고 대답했다. “저는 그것이 순수한 의향이었고, 그리고 많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제 인생의 이유와 목적이십니다. 따라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게 제게는 분명해요.”

가톨릭 신자로서 확실하고 확고한 당신의 이상과 행동에 대해 그분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길을 받아들이고 이해해 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모처럼의 이해도, 그 사람의 그다지 확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습관에 빠져 버린 것은 아닐까라고 당신은 걱정이 되어 왔습니다.

다시금 그 사람을 방문하여 진리란 실천을 하거나 아니면 실행에 전념하기 위해 받아들이는 것임을 설명하십시오.

“일들을 먼저 엄밀히 시험해 보기를 원하는 그들은 누구입니까? 왜 그들은 믿지 않는 겁니까?”라고 그대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한 이 말을 그들에게 일러 주십시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비열함을 의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대는 조용한 마음으로 걸음을 계속하십시오.

그대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정직성의 완전한 결핍으로 그들은 돌을 던지고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은체합니다.

성령께서 그들에 관해 해야 할 말씀을 들으십시오. “잘못을 날조한 자는 혼란을 일으켜서 부끄러워지게 할 것이고, 그들은 전부 치욕으로 뒤덮힐 것이다.” 그것은 가차없이 수행될 심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도직의 사업을 중상하고 비방한다고 그대는 말하는 것입니까? 좋습니다. 그대가 진실을 선포하자마자 적어도 비판하지 않는 사람 하나는 있을 것입니다.

아름답고 훌륭하게 여물어, 풍년을 기대하게 하는 밀밭이라도, 운반차 몇 대 분량의 겨자나 병아리, 버무리 등의 잡초를 쉽게 모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결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도 역사의 흐름 중에는 다수의 페이지를 날려서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반하여 말씀하시고 쓰여졌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밀밭의 경우처럼 희고 훌륭한 이삭, 즉 진짜 진리를 모으도록 당신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싶다고 보증하는 당신이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즉, 반론하지 않고 중상을 받아 들이는 것은 쓰레기 수집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의 말에 의하면 ‘열린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당신은 그 기울기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불리한 것을 모두, 사전에 본인에게 확인하지도 않고 믿어 버립니다.그런 태도는 애덕에 부합한다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의의 덕에도 위배됩니다.

비방은 가끔 그것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비방은 그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정말로 치욕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후에는 그들이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 한 가지 중압을 가지고 다닙니다.

“왜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퍼뜨립니까?”하고 괴로워하며 그대가 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으로나, 열광으로나, 또는 악의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야기를 타성과 천박함과 무지로 전해 나갑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강조합니다: 그대가 찬양할 수 없고, 그리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때에는, 조용히 하십시오!

중상모략의 희생자들이 침묵 속에서 고통을 참는 동안 ‘사형집행인’들은 겁을 집어치우듯 허세를 부리며 흥분합니다.

당사자와 이야기해 볼 수도, 말할 의지도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면 설령 단언된 것이라 해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앙케이트를 실시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약간의 악의만으로 아무리 고결한 사람이나 경의를 표해야 할 단체에 대해서도 중상을 들어 모아 두툼한 책 열 권으로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사람이나 단체가 효과적인 일을 할 때 욕설은 더욱 심해지지만 그 효과적인 일이 사도직이라면 더욱 그것을 부추기는 듯 심해집니다.

장본인들은 참으로 슬퍼해야 할 짓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이처럼 사악하고 천박한 패거리의 스피커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성을 갖추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탈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적인 기준을 모르고,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결실을 맺지도 못한다고 서글프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들, 하느님의 자녀들은 주님께서 “누구이든 너희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가 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비슷하게 다른 예수가 되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른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누구나 자신을 옳다고 생각하고 일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즉 개개인의 생각을 초월하여 헤아릴 수 없이 사랑해야 할 하느님의 섭리가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을, 주님의 계획들에 반대함 없이, 비록 주님의 계획들이 그대의 “기본적인 생각”에 반(反)해서 진행된다 하더라도, 주님에 의해 인도되도록 내맡기십시오.

일부 인사들이 과학에 의해 얻어낸 귀중한 사물들을 차지하고 배우는 데는, 그것들을 다소 임의적인 과정을 통해 자기네들 자체의 입맛에 맞추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 관심을 덜 갖는 것을 보는 일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 점을 깨닫는 일은 틀림없이 그대를 이끌어서 진리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그대의 노력을 배가하도록 해 줄 것입니다.

스스로 연구에 종사하는 것보다 학문이나 기술에 대한 새로운 공헌이나 연구자에게 반론하는 것이 여간 편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 ‘비평가'들이 지식의 절대주인을 표방하며 무식한 자들에게 의견을 떠넘기는 사태를 묵인할 수는 없습니다.

‘모르겠어요, 이해할 수 없어요'라고 다른 사람의 확실한 발언에 반박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 사람의 무지가 분명해진 것입니다.

당신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분열을 일으키거나 편협한 태도를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기에 별거 아닌 견해나 사안에 있어서 양보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런 양보가 많은 사람들에게 싫은 결과를 가져올 텐데 말입니다.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그런 태도를 계속 취한다면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편협, 게다가 가장 싫고 가장 해로운 편협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즉 진리가 선언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한없이 완전한 정의와 자비 그 자체인 하느님은 각기 다른 아이들을, 같은 사랑을 가지고서이기는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니까 평등이란 모든 사람을 같은 저울로 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죠.

그대는 정말로··· 거짓말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퍽 많은 해석이 가능한 반진실(半眞實)을 말합니다.

의심이란 그것이 지식 분야에 관계되거나 다른 것들의 좋은 이름에 관계되거나 간에 뿌려지기는 쉬우나 뿌리뽑기는 매우 어려운 식물입니다.

그대는 저에게 빌라도에 관해서 일깨워 줍니다: “제가 쓴 것은 바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가장 무서운 범죄를 용인한 후에 말입니다. 당신은 부동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습니다…, 나중이 아니라.

자기 결심대로 행동하는 것은 한가지 덕행입니다. 그러나 만약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사실들이 바뀐다면, 그것에 따라 역시 문제를 보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고쳐서 행동해야 합니다.

성스러운 비타협을 거친 고집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조금 자만하고 득의양양하게 "부서져도 굴복하지 않겠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잘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망가진 도구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게다가 겉으로는 타협적이지만, 나중에 심하게 비타협적인 주장을 해오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하게 됩니다.

“거룩한 마리아여, 상지의 옥좌여”. 우리들의 성모님께 자주 그런 방법으로 호소하여, 주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의 공부와, 일과, 사회적 관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가져다 주신 진리를 채워 주시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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