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도 특히 감동하는 장면이 있다고 그대는 말했습니다."예를 들어, 예수님이 살아 있는 인간과 접할 때나 괴로움에 몸도 마음도 풀이 죽은 사람들에게 평안과 건강을 가져다 줄 때 등입니다.” 또한 중한 피부병을 치유하고, 시력을 회복시키며, 연못 옆의 누구도 돌볼 수 없는 가엾은 중풍을 앓고 있는 사람을 치유하는 것을 볼 때마다 열중한다고 거듭 말했습니다.당신은 한없이 인간적이고 진실로 가까워지기 쉬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예수님은 지금도 당시 모습 그대로십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께 청하기를 그대가 주님을 위해 약간 환난을 당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뒤,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지극히 당연한 괴로움, 즉 가족과 관계되는 곤란이나 문제, 혹은 일상생활에 관련되는 무수한 문제가 오면, 그것들의 배후에 찾아오시는 그리스도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못’을 솔직한 마음으로 당신의 손에 받아 들이십시오, 그러면 고통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만약에 그대가 환난을 당하더라도 불평하지 마십시오. 연마 되는 것은 존중되고 높이 평가된 돌입니다.

아픕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공당하는 데 맡기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을 손에 쥐고 다이아몬드처럼 다루어 주시고 계십니다. 평범한 돌이라면 그런 취급은 받지 못합니다.

겁에 질려서 고통에서 도망치는 자여, 기꺼이 고통 받는 자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묵상하십시오. 고통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감내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의 모범을 본받읍시다.

탄식하고 있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당신은 탄식해야 마땅하다는 듯이 설명합니다. 한 차례 핀으로 찌르고는 또 한 차례가 뒤 따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미꽃이 가시 사이에 피는 것을 알고 놀라는 편이 어리석다는 것쯤은 당신도 알 것입니다.

제가 언제나 해왔듯이 그대에게 계속 허물없이 말하게 해 주십시오. 나 자신의 환난들에 관해서 이야기할 마음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내 앞에 고상(苦像예수의 시신이 달린 십자가) 하나를 마련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비록 언제나 명랑하게 당했기는 하지만, 제가 퍽 많이 환난을 당해왔다는 것을 덧붙여도 저는 개의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오해 받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진리이시고 빛이셨지만, 주님께 가까이 있던 사람들까지도 주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전에 퍽 자주 그대에게 요청하였던 것처럼,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반대와 비방은, 군인들이 싸움터에서 받은 상처들과 매한가지입니다.

그들은 당신에 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합니다··· 그러나 그대의 좋은 명성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나쁘게 다루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십시오.

가끔 그들은 이해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장님인 것같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제대로 이해되도록 애쓰지 않은 사람은 그대였습니다. 그대는 그 점을 고쳐야 합니다.

그대의 말이 옳은 것만으로는 소용없습니다. 더구나 주장이 위력을 발휘하고 사람들이 이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필요할 때는 '남이 어떻게 말할까'를 신경 쓰지 말고 항상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배움터를 자주 방문한다면 수많은 몰이해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조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당신을 많이 도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의 신체를 해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몇 번이나 그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그 사람이 마치 외지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으니까.

그게 신경쓸 일이 아니라고 말할 셈입니까?

박해하는 무리들은, 그런 것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희생자’를 성화합니다….그런데 이처럼 ‘타인을 성화하는 자’들이 불쌍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사례 대신에 중상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멋대로 상상하고 자신을 괴롭히고, 스스로 고통을 조성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중에 진짜 고통과 장애가 닥쳤을 때 성모 마리아처럼 십자가 아래서 그리스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희생, 희생. 하긴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십자가니 포기니 하는 말을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희생이요, 기쁘고, 십자가는 성스러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하고 이렇게 스스로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은 기쁨과 평화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위로를 구하듯 희생이란 말만 집요하게 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당신의 생명-은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데.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다운 삶,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어려움을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축복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면 신경쇠약과 히스테리는 거의 사라질 텐데.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그 사람-친척, 친구, 동료, 그대에게 낯선 그 사람-은 그대의 형제입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것을 여러 번 슬픈 마음으로 읽은 것을 기억하십시오. 심지어 친척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지상에는 단지 하느님과 당신만이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굴욕을 당하는 것이 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 그대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혼을 다해 병든 사람이 말했습니다. “가끔 몸이 반항하고 불평하지만 ‘그런 탄식’을 애써 미소로 바꾸려고 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그것들은 매우 효용있는 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불치병 때문에 활동이 제한됐지만 그 사람은 선뜻 잘라 말했습니다. “아픈 쪽에서 꽤 잘 처신해 줘서 병을 매일 더 깊게 사랑합니다. 선택할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이런 상태로 태어나고 싶어요.

예수님은 33년간, 즉 생애를 걸쳐 준비한 후에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제자가 진정으로 주님을 닮고 싶다면 능동적으로나 수동적으로 스스로를 부정해 전 생애를 사랑의 속죄로 바꿔야 합니다.

십자가는 어디에나 있고 예상치 못한 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유념해 두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는 그대가 능률이 나기 시작할 때에 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께서는 언제나 십자가로 강복하십니다.

"고통받는 마리아의 성심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대의 죄와 모든 시대 사람들의 속죄를 위해 성모님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삼도록 굳게 다짐하고 거룩하신 마리아의 성심께 간청하십시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성모님께 청하십시오. “성모님, 당신의 슬픔으로 인해 우리가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더하고, 또 매일매일의 물심양면의 어려움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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