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기도’는, 스스로의 헤아릴 수 없는 비참함과 하느님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사람의 겸손입니다.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을 예배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기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이성의 겸손입니다. 이성이 겸손하면 스스로의 판단을 버리고 교회의 판단과 권위 앞에 엎드리죠.

‘순종’은 의지의 겸손입니다. 의지가 겸손하면 하느님 때문에 남의 뜻을 따릅니다.

‘정결’은 육체의 겸손입니다. 육체가 겸손하면 정신을 따릅니다.

외적인 ‘희생’은 감각의 겸손입니다.

‘속죄’는 하느님께 바친 모든 정념의 겸손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내적 싸움의 길에서의 진리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무(無)나 다름없는 자신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무(無)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 예수님의 겸손. 보잘것 없는 흙으로 빚은 그릇에 지나지 않는 그대에게 훌륭한 모범이 아닙니까. 항상 자애로운 주님은 그대의 천함을 무상으로 높여 은혜의 빛으로 빛나게 하고 일어서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존엄성과 정의 등을 위장한 채 수도 없이 스스로의 교만을 덮어왔습니다.주님으로부터 배울 얼마나 많은 기회들을 그대는 그것들을 초자연화할 줄 몰라서 낭비해 버렸는지오!

당신이 스스로 결점을 발견하거나 발견할 때마다 우울해지는데 우울할 이유가 없습니다.

참된 겸손을 청하십시오.

겸손의 부족함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표시를 몇 가지 생각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을 남들보다 잘 말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항상 내 마음대로 하길 바란다.

-안 통한다고 티격태격하거나 자기가 옳을 때 고집불통으로 우긴다.

-요구하지도 않고 애덕(愛徳)이라는 면에서도 필요치 않은데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다.

-남의 사물을 경멸한다.

-자신의 재능이나 소질이 모두 빌려쓴 것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의 긍지와 평판뿐 아니라 밟고 있는 땅과 가진 것도 당신에겐 지나치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스스로를 모범으로 나타낸다.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기 위해 자신을 일부러 나쁘게 말한다.

-혼났을 때 변명한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내려갈까 봐 부끄러운 것을 영적 지도자에게 숨긴다.

-자신에 대한 칭찬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좋은 소문에 기뻐하기도 한다.

-나보다 남이 더 좋은 평판을 받는 걸 알고 슬퍼한다.

-비천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거절한다.

-눈에 띄는 기회를 찾기도 하고 원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자찬의 말이나, 자신의 성실함, 재능이나 솜씨, 업무상의 평판 등을 암시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

-모종의 재산 등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

겸손해진다는 것은 고통스럽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락함’이라 칭해져야 할 거짓된 겸손으로부터 도망쳐 나옵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의 발을 씻으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너는 나중에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발을 결코 씻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설명하십니다: 만약에 제가 네 발을 씻지 않는다면 너는 나하고 관계가 없게 될 것이다. 시몬 베드로는 굴복합니다: 주님, 저의 발 뿐이 아니라 저의 손과 머리까지도요.

주저하지 말고 완전히 스스로를 바치라는 초대를 받으면 우리는 종종 베드로처럼 겸손한 척하고 싫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사랑에 대해서도 이 사도처럼 되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자기 이상으로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기에 베드로는 이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 여기 제가 있습니다! 저의 머리와 손과 발을 씻으시옵소서! 저를 철저하게 정화시키시옵소서, 저는 당신께 저 자신을 남김없이 봉헌하기를 원하옵니다.

그대를 위해서 편지 하나를 베껴놓습니다

“저는 복음서가 가르치는 겸손에 매료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이 무의식중에 위축된 태도를 취하고, 그 결과 교회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저 무신론의 작가가,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다…라고 말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확실히, 우리는 노예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녀 신분에까지 높여진 노예이므로, 정념(情念)의 노예와 같은 생활은 하지 않습니다.

“나쁜 자질”밖에 없음을 스스로 확신하고 있다면, 즉 자신을 잘 안다면 굴욕적인 일이나 경멸이나 중상 그 외를 받아도 초자연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기쁨과 평안이 더욱 더 확실히 마음속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경우에,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을 말한 후에 그대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가 말한 전부인가? 그는 별로 나를 모르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서 끝났겠는가…’

그대가 더 나쁜 대우를 받아 마땅함을 깨닫고, 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그대가 당하지 않았다면 다른 어떤 사람을 괴롭히게 만들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십시오.

조각상은 높은 곳에 있을수록 떨어질 때 타격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매번 더 한층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영적 지도를 받으러 가십시오. 그리고 시간에 맞춰서 가십시오. 그것 역시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一 말하고, 읽고, 꽃과 새의 이름을 알고,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고, 자기가 밟고 있는 땅을 알아보고 하는 것들을 교육받는 대단히 성실한 어린아이같이 말입니다.

“저는 아직도 형편없는 동물입니다”라고 그대는 저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그 점을 인식했을 때 한번은 그대가 그 점에 관해 퍽 나쁘게 느꼈습니다! 지금은 그 점에 익숙해지거나 그 점에 굴복함 없이 그대는 미소 짓고, 더해가는 기쁨을 가지고 그대의 싸움을 다시 시작하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현명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면 배움에는 끝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학하기 짝이 없는 사람도 일생을 마칠 때까지 배울 것이 있는 법입니다. 계속 배우지 않으면 현명함을 유지할 수 없다.

예수님, 제가 사도가 되어야 한다면 저를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태양이 닿는 곳 모두가 빛에 싸입니다. 주여, 저를 밝음으로 채워 주소서, 저를 거룩하게 하소서 제가 우러러야 할 당신의 뜻에 일치하고 당신이 원하는 도구로 바뀌기를. 당신께서 겪으신 굴욕의 영광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그것은 그대를 이끌어 가난하게 태어나고, 눈에 띄지 않게 일하고, 나무에 못박히는 불명예스러운 죽는 수치를 당하게 하고, 복된 성사에서의 당신의 자기 소멸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제가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즉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 수 있도록 하소서. 그렇게 되면, 제가 무(無)라는 것을 잊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고집 센 것은 어리석음뿐입니다. 고집이 세다면 지독히 어리석습니다.

세상에 관한 일에서는 남의 생각이 옳을 수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같은 문제를 다른 빛, 다른 그늘, 다른 윤곽 아래에서, 즉 당신과 다른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도덕에 있어서는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의 어머니 교회의 기준이 존재합니다.

바로잡을 줄 안다는 것. 얼마나 멋집니까. 그런데 바로잡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애덕(愛徳)에 어긋날 것 같으면 양보하십시오. 될 수 있는 한 저항하지 마십시오. 잔디의 겸손함을 따르십시오. 잔디는 누가 밟았는지 모르고 뭉개져 있지 않습니까.

회심(回心)의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겸손의 길, 즉 스스로를 낮추는 길을 지나야 합니다.

“자아의 목을 잘라내야만 합니다"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해지며, “저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거듭 말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억눌러야 합니다.

“사람아, 네가 먼지임을 기억하라···”당신이 티끌이라면 밟혔다고 왜 화를 내십니까.

겸손의 길을 따라가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겸손해지기 위한 확실한 길은 설령 재능이나 명성, 재산이 없더라도 선물을 달라고 성령께 청하면 어떻게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도 예수님의 적을 보고 부들부들 떨며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내린 후에는 채찍으로 맞아 감옥에 갇혀도 끄떡없고, 마침내 신앙의 증인이 되어 생명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끝까지 견뎌낼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그러나 이 불확실성이야말로 겸손해지기 위한 또 다른 동기이자 우리가 자유롭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쓸모없는 사람이지만, 주님은 그런 당신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결실을 맺어주셨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자만하지 마십시오. 예술가가 사용하는 강철 도구가 금이나 보석을 세공할 때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금 1kg과 구리 1kg, 어느 쪽이 더 가치가 높을까요. 그런데 때때로 금보다 구리가 훨씬 도움이 됩니다.

당신이 새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 이끌어가기 위해,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지도자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겸손과 그릇된 겸손 때문에 사람들을 떠나 자기 은신처에 틀어박혀 있다면,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당신은 선물 포장지에 불과한, 즉 찢겨지고 버려지는 종이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정년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도다…” 진정한 겸손이야말로 모든 덕의 초자연의 기초임을 날마다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성모님께 말씀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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