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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친구들»에는 자기 희생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제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을 마음에 새기고 철저하게 믿으십시오. 우리 주님을 더욱 가까이 따르고 하느님과 온 인류에게 진정한 봉사를 하고 싶다면, 우리 자신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재능, 건강, 명성, 야망, 승리, 그리고 성공을 향한 자기 욕심마저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리겠다는 숭고한 지향을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떨쳐 버리려면 한 가지 규칙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따르면 됩니다. “주님, 무슨 일이든 오직 당신께서 원하시는 경우에만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저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꼬드기는 이기심과 허영심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느님을 더욱더 열렬히 가깝게 모시도록 이끄는 사심 없는 행동을 통해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한다면, 우리 마음이 온갖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4-26) 그레고리오 성인도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겼습니다. “자기 자신마저 버리지 않는다면, 사물들을 끊고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 자신 밖으로 나와서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자기 자신을 떠난다면, 자신을 버리는 사람은 누구란 말입니까? …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두 가지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죄에 떨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빚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되었을 때의 모습은 한 가지였는데, 우리 자신 때문에 또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죄에 떨어진 자신은 끊어 버리고, 은총으로 빚어진 자신은 굳건히 지키십시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하여 겸손해지면, 이미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욕정에 가득 찬 사람이 변하여 절제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예전의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수전노가 탐욕을 버리고, 남의 재산을 갈취하는 대신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베푼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을 부인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초연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교묘하게 붙들어 매고 있는 굵은 밧줄을 단호하게 끊어 버린다면,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숨김없이 말하건대, 이러한 삶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따라옵니다.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내려놓아야 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장 소중한 재산을 내놓는 것보다 더 어려운 포기를 감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시는 ‘내려놓음’에는 반드시 외적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동’과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사도 1,1 참조). 말씀으로 가르치시기 전에 행위로써 가르침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몹시 가난하셨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으며 처음 주무신 곳은 구유의 지푸라기들 위였습니다. 나중에 선교 여행을 하실 때에도,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어떤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안식일에 밀밭 길을 가던 굶주린 사도들이 밀 이삭을 뜯는 장면도 빼놓지 말고 묵상해야 합니다(마르 2,23 참조).

(생각나는 대로 이미 여러 이야기를 하였지만) 여러분이 날마다 하느님과 이웃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더 자세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가 위대한 참회를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길로 이끌어 주신다면, 오히려 그러한 참회는 매우 훌륭하고 거룩하며 필요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다만 언제나 여러분의 영적 지도자에게 허락을 받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교만의 결과인 타락의 심각성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참회를 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다른 한편, 여러분이 계속해서 자그마한 것일지라도 내적 싸움에서 승리하여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열망한다면, 자신이 위대한 영웅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이나 교만이 스며들 여지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웃고 싶지 않을 때에도 웃는 것입니다. 장담하건대, 웃음은 때때로 고행용 의복을 한 시간 동안 입고 있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도 드릴 것이라고는 거의 없지만, 무엇이든 기쁘게 받아주시는 아버지를 둔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극기 고행을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