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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친구들»에는 이기주의를 주제로 하는 6 항이 있음.

‘내 것, 내 것, 내 것’,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는 얼마나 형편없는 것입니까? 예로니모 성인의 주해에 따르면, “성경 말씀의 ‘악한 일에 기울어 나쁜 짓 하는’(시편 141,4) 것은 교만 죄에 빠진 사람뿐 아니라 게으르고 부주의한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내 것, 내 것, 내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사람을 쓸모없고 헛되게 만듭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을 향한 열망을 파괴하고 시간을 헛되이 쓰도록 유혹합니다. 여러분은 열매 맺는 사람이 되십시오. 자신의 이기심을 자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하느님과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하여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묻힌 재능을 다시 꺼내십시오. 그 재능으로 열매를 맺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초자연적 활동에서는 세상이 경탄할 만한 결과인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 놓는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재능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섬길 시간으로 딱 1년을 주셨다고 생각하십시오. 5년이 아니라, 심지어 2년이 아니라 딱 1년입니다. 오로지 이제 막 시작된 1년에만 집중하십시오. 그것을 하느님을 위하여 바치십시오. 그것을 땅에 묻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마태 21,33).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묵상은, 이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운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우리 인간의 불성실하고 배은망덕한 응답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였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저는 그 임자가 “멀리 떠났다”는 말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포도밭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포도밭 울타리 안에서, 포도 확 안에서 우리 앞에 놓인 일들에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그러고는 하루 일이 끝났을 때 탑에 올라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편안함에 안주한다면,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세요. 제 시간은 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포도밭을 돌보는 일에 저 자신을 붙들어 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이해력과 능력과 무한한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주님의 농장에서 일해야 하는 일꾼이라는 것을 잊을 권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먹거리를 마련해 주는 일에 우리를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농장의 울타리 안이 우리의 일터입니다. 이곳이 예수님의 구원 활동을 도와 우리가 하루하루 땀 흘려 일할 곳입니다(콜로 1,24 참조).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이 정말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여러분의 시간은 하느님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그러한 이기적인 생각이 여러분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심으로 투신하고, 교만을 이겨 내며, 바른 생각을 하십시오. 얄팍한 생각에 빠져 달아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장터를 배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탈렌트를 묻어 버리고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는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돌보아야 하는 포도밭을 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모두 주인이 맡긴 중요한 일을 무심히 넘겼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여기고 그에 어울리는 행동으로 그분의 구원 활동에 협력하며, 영혼들의 선익을 위하여 자신의 온 생명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봉헌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덕목들을 얻으려고 싸울 때, 그 영혼은 성령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자 성령의 작용에 힘입어 선한 인품이 그 영혼 안에서 더욱 강건해집니다. “영혼의 기쁜 손님”(성령 강림 대축일 부속가)이신 성령께서 풍성한 선물, 곧 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 경외의 은사를 부어주십니다(이사 11,2 참조).

성령의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평화”(갈라 5,22), 유쾌한 평화, 쾌활함이라는 인간적 덕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적 기쁨을 경험합니다. 눈앞에서 모든 것이 붕괴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반대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당신은 제 피신처 하느님이십니다”(시편 43,2). 하느님께서 내 영혼 안에 머무시면,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굳건하게 서 있습니다.

공경의 은사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확실하게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데 어찌 슬플 수가 있겠습니까? 슬픔은 이기심의 최종 산물입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살기를 바란다면, 우리에게 비록 잘못이 있고 비참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언제나 쾌활함이 넘칠 것입니다. 쾌활함은 우리를 기도 생활로 이끌고, 기쁨의 찬미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노래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교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혹시 독재자나 지배자의 행동을 상상할지 모르겠습니다. 전쟁 영웅을 영접하는 군중의 환호성 가운데, 개선문의 하얀 대리석에 자신의 영광스러운 이마가 닿지 않도록 머리를 숙이는 로마 황제를 연상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봅시다. 이러한 유형의 교만은 오직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됩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교묘하고 더 빈번한 교만의 다른 형태와 싸워야 합니다. 내 것이 남의 것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교만, 허영에 가득 찬 말과 생각과 행동, 아무런 모욕 의사가 없는 말과 행위에 대하여 분노하는 거의 병적인 과민 반응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유혹입니다. 모든 것이 태양인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돌아가야 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 교만한 사람은 이 어리석은 착각을 충족시키려고 거짓으로 아픈 척, 슬픈 척하여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들이고 야단법석을 치르게 합니다.

많은 사람의 경우에 자신의 내적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자기가 상상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인정을 받고 있는지’ 등입니다. 그 불쌍한 영혼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이 가엾은 상황에서 그에게는 모든 것이 쓰라린 아픔이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겸손해지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선적으로 어떤 구실을 내세워 뒤로 물러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려 드린 처방을 최대한 이용하십시오. 그리고 치료할 때에는 어머니의 손으로 하십시오. 우리가 어릴 적에 시합을 하다가 다치거나 넘어져서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겼을 때, 우리 어머니들이 하셨던 것처럼 거의 무한한 부드러움으로 치료하십시오. 몇 시간 기다리는 것이 더 좋을 때에는 그렇게 하여도 되지만, 꼭 필요한 정도로만 기다리십시오. 비겁하게도 자신에게 편안한 방법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그것은 지혜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누구나, 특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분들은 두려움 없이 상처에 다가가 상처를 소독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어쩌면 치료해야 하는 책임에서 멀리 달아나고 싶거나 머뭇거리는 사람의 귀에 어떤 교활한 사람이 속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신 줄 압니다”(마태 22,16). 그러한 아부를 용인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책무를 힘껏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승이 아닙니다. 참된 길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실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거짓 지혜는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거듭거듭 입증된 명백한 지침들을 무시하거나 과장된 것으로 여기도록 사람들을 잘못 인도합니다. 그 지침들은 인간의 나약함에 관한 지식이나, 통치에 관한 학문, 그리고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에 의해 올바른 것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또한 그 지침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소리치도록 하고, 개입하게 하며, 관심을 보여 주게 만듭니다.

거짓 교사들은 근본을 파고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고통을 주더라도 해독제를 사용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외면합니다. 확신하건대, 그러한 태도는 지혜롭지 못하며, 경건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비겁하고 무책임하며 어리석고 바보 같습니다. 나중에 재앙이 닥쳐서야 수습하려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들은 잊고 있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노련함과 오랜 경험 그리고 직관과 직설적인 말들에서 나오는 진지한 충고는 한창 좋은 시절에 해 주는 것이 지혜라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