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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친구들»에는 비참함를 주제로 하는 7 항이 있음.

성주간 화요일 미사 전례문에서는 ‘참된 하느님다움’과 ‘거짓 하느님다움’을 구별하도록 도와줍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겸손’은 우리의 비참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깨닫게 이끌어 주는 덕목입니다.

우리의 비참함은 참으로 명백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의 자연적 한계, 곧 사람들이 꿈꾸었으나 시간 부족으로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위대한 야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피할 수 있었으나 피하지 않았던 잘못과 타락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개인적 결함들을 경험합니다. 더욱이 마치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분명히 깨닫게 하려고 모든 실패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주님께 바라라”(시편 27,14: 성주간 화요일 미사 입당송). 교회는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 가득한 희망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상동). 우리가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있다면,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어찌 중요하겠습니까? 어느 순간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곤경에 떨어질지라도, 마치 정상적인 치료 절차에 따르듯이 곤경에서 빠져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새롭게 시작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귀중한 장식품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예컨대, 꽃병이 깨지지 않도록 얼마나 애지중지합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아기가 꽃병 근처에서 놀다가 건드려 깨뜨리면 어떻게 합니까? 온 가족이 당황하겠지만, 곧바로 조각을 모으기 시작할 것입니다. 조각을 맞추고 접착제를 발라 마침내 이전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것입니다. 깨진 것이 한 조각이라면, 고정용 금속 핀 등으로 간단히 붙일 수 있고, 그렇게 수선한 그릇은 본래의 매력을 유지합니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자신의 내적 생활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나약함과 죄악과 실수들을 직시하게 되었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맡기며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제가 깨진 질그릇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여기 왔습니다. 주님, 저의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붙여 주시고, 슬퍼하는 제가 당신의 용서로써 더욱 힘을 얻고 이전보다 더욱 멋진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기도입니까! 우리의 나약한 질그릇이 깨질 때마다 이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우리 자신의 모습에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선한 행동을 하다가도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지 마십시오. 언제나 곁에서 도와주시는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시편 27,1) 우리는 아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다가가기만 한다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거짓되고 불의한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시편 43,1: 성주간 화요일 미사 화답송). 다시 한 번 ‘참된 하느님다움’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하느님다움’이 있다면, 우리 눈은 우리가 하찮은 진흙으로 만들어졌음과 우리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하느님께 간청할 것입니다. “당신의 빛과 당신의 진실을 보내소서. 그들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그들이 저를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데려가게 하소서”(시편 43,3: 성주간 화요일 미사 화답송). 저는 이 화답송을 바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하느님다움’을 갖추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 7,1). 그분은 단순히 바라기만 하면 적들을 없애실 수 있으셨지만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으로서 단순히 바라기만 하면 상황을 바꿀 수 있으신 그분께서는 여기서 놀라운 가르침을 남기셨습니다. 유다 지방으로 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요한 7,3). 그들은 그분에게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입니까? 이것이 ‘참된 하느님다움’과 ‘거짓 하느님다움’에 관한 가르침인 것이 보입니까?

‘참된 하느님다움.’ 성주간 화요일 미사에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당신 이름을 아는 이들이 당신을 신뢰하니, 주님, 당신을 찾는 이들을 아니 버리시기 때문입니다”(시편 9,11). 이제 부서진 조각들이 다시 붙어 아름다워진 질그릇들이 겸손한 기도를 기쁘게 바칩니다. “가련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아니 잊으십니다”(시편 9,13).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연스럽게 지니는 신심은 영혼들이 갖게 되는 내적 태도이며, 마침내 우리의 존재 전체에 스며듭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심은 우리의 모든 생각, 모든 열망, 모든 애정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정 안에서 어린아이들이, 비록 깨닫지 못하더라도, 얼마나 자기 부모를 따라하는지 눈치채지 못하였습니까? 그들은 부모의 몸짓, 습관을 따라합니다. 자녀들이 하는 행동의 많은 부분은 그들 부모의 행동과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착한 자녀에게도 그런 일이 똑같이 일어날까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몰라도, 어떤 사람들은 놀랍게도 신앙이라는 초자연적 관점에서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얻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날마다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우리의 보잘것없는 처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 가득한 팔로 우리를 높이 들어 올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린이가 넘어지는 것과 어른이 넘어지는 것 사이의 큰 차이를 아십니까? 어린이들에게는 넘어지는 것이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들은 늘 넘어집니다! 그들이 울기 시작하면, 아빠가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사나이는 울지 않는 법이란다.” 그러면 아이는 아빠에게 잘 보이려고 점잖게 울음을 그치고 상황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렇지만 어른이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면 어떻게 될까요? 아주 불쌍해 보일 정도가 아니라면, 그 사람의 불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그 넘어짐 때문에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넘어진 사람이 노인이라면 치유되기 어려운 골절상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내적 생활에서도 ‘갓난아이처럼’ 되는 것이 유익합니다. 아이들은 마치 고무로 만들어진 것처럼 넘어졌다가도 바로 일어나 다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부모가 자기를 돌보아 주리라는 것을 압니다.

만일 우리가 아이들처럼 한다면, (결코 피할 수 없는) 내적 생활의 실패와 넘어짐이 단지 쓰라림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잠시 아파할 수는 있겠지만 좌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며 위대한 분이시고 무한한 지혜이시며 자비이심을 깨닫고, 자녀로서 참으로 기뻐하며 신선한 샘물처럼 솟아나는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아오면서 깨닫게 된 것은, 제가 하느님의 어린아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하느님의 ‘갓난아이처럼’ 그분의 말씀, 그분의 품, 그분께서 주시는 음식, 그분의 위대한 힘을 갈망하고, 마침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어린이처럼 되십시오! 더 어린이처럼 될수록 더 좋습니다. 사제로서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게 이행하려고 힘써 온 지난 36년 동안 (기나긴 세월이기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금세 지나간 듯합니다!) 수많은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때마다 저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바로 제가 어린이이며, 언제나 성모님의 무릎 위로 오르려 하고,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영혼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때로는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끼치는 중대한 타락은 언제나 자신이 어른이고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교만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뿐 아니라, 친구나 사제에게서 받을 수 있는 도움도 청하지 않습니다. 그 가엾은 영혼은 불행 속에서 홀로 헤매다가 길을 잃고 맙니다.

지금 당장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우리가 결코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오히려 더욱더 그분의 도움, 그분의 말씀, 그분의 빵, 그분의 위로와 힘을 간절히 열망하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1베드 2,2). 어린이가 되고자 하는 열망과 갈망을 더욱 기르십시오. 제 말을 믿으십시오. 그것이야말로 교만을 물리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며, 우리의 행동이 선하고 고결하고 거룩해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제 대학생 시절의 기억이 또다시 떠오릅니다. 그 얼마나 신앙적인 모습입니까! 전례 성가가 들려오고 향냄새가 퍼지며, 자신의 비참함을 상징하는 커다란 촛대를 든 수천 명의 남성들이 행렬을 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어린이와 같으며, 눈을 들어 아버지의 눈을 마주볼 수 없을 만큼 어린아이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저버린 것이 얼마나 나쁘고 쓰라린지 보고 깨달아라”(예레 2,19). 다시는 이 세상 것들을 돌보느라 우리 주님을 저버리지 않도록 굳은 결심을 새롭게 합시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더 키우고, 일상 행위를 위한 구체적인 결심을 합시다. 어린이와 같이 되어,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필요한지 깨닫고 하느님 아버지를 바라보며 외치는 사람들이 됩시다.

이제, 제가 예전에 이야기하였던 것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는 어린이와 같이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이러한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본성적으로 나약하지만, “믿음을 굳건히 하여”(1베드 5,9) 선행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어떠한 실수로 극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하더라도, 결코 주저하지 않고 다시 하느님 자녀의 길로 되돌아가서 언제나 두 팔을 벌리고 계신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팔을 기억하십니까? 아마도 아버지의 팔은 어머니의 그것처럼 편안하고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억세고 힘센 아버지의 팔은 우리를 꽉 붙들어 안전하고 훈훈하게 지켜 주었습니다. 주님, 그 강력한 팔과 튼튼한 손에 감사드립니다. 그 강인하고도 부드러운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제 잘못들에 대해서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 잘못들을 바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해 주시고 변호해 주시고 또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지혜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영’(zero)에 불과하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 역시 가엾은 사람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상상하며 그분처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양심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결심하고 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아주 가까이 오셨으므로,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더 높은 곳을 열망하면서 거기로 올라가려 하고 선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그와 비슷한 열망을 불어넣으려고 애쓰는 것은, 주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심으신 믿음에 대한 확신을 여러분이 갖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도록 여러분이 응답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그 자리에서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유용하게 주님의 도구로 쓰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비겁해져서 하느님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어려움들을 과소평가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어려움들에 직면할 때에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타락한 결과, 우리 안에는 은총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원리가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원죄 때문에 입은 상처에서 비롯되며, 우리 자신의 개인적 죄들로 더욱 악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의 일들을 통하여 더욱더 위를 향해 올라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일들은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이며, 언제나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마음으로 깊이 뉘우쳐야 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탁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마치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듯이 최선을 다하여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지속될 이 투쟁에서, 우리 안팎의 적들이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마치 이러한 짐이 부족하기나 한 듯이, 과거의 수많은 잘못들이 아픈 기억으로 떠오르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어려움에 직면한다면(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필요도 없고, 대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만),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아 우리 주님과 더욱 가까이 결합하는 데 이용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뽑으셨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시련을 허락하신 것은, 여러분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의 변함없는 보호와 사랑을 더욱더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단언컨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고해성사를 통하여 한결같은 용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1요한 2,1-2).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우리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하느님께서는 결코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이유에서건 주님을 떠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금 겸손하게 돌아오십시오. 날마다, 아니 하루 24시간 동안 되풀이되더라도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로서 다시 아버지를 찾으십시오. 하느님 사랑의 참된 기적인 고해성사 안에서 깊이 뉘우치고 잘못을 바로잡으십시오. 이 놀라운 성사 안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을 깨끗이 하시고 여러분에게 기쁨과 힘을 가득 채우시어, 영적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도 여러분의 발걸음 발걸음을 지켜보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