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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친구들»에는 초자연적인 관점를 주제로 하는 5 항이 있음.

여러 해 전의 이야기지만 오늘날에도 참으로 적절한 한 말씀으로써 이 대화를 계속하고자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나가는 모든 것, 하느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혼이 목표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도록 하느님께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온갖 평온과 평화를 잃게 되는 이유를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휴식 또는 여가 시간에도 초자연적 전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휴식과 여가가 일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직업에서 최고 위치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또 세상사에서 자유로운 선택과 노력의 보상으로서 최고의 칭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모든 인간적 활동에 생기를 주는 초자연적 전망을 잃는다면, 안타깝게도 그릇된 길로 빠질 것입니다.

우리는 사물들을 판단하는 거룩한 척도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초자연적 시각을 잃어서도 안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우리의 나약함을 이용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기중심적 사랑, 지루함, 좌절 또는 격렬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곧바로 주님께 귀를 기울이며 반응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개인적 실패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만큼, 그러한 현실 때문에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길입니다. 우리는 굳건하고 겸손한 믿음으로 끊임없이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 저를 믿지 마십시오. 그러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와 부드러움을 마음속에서 느끼는 가운데,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만일 우리가 자신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결점을 가지고도 우리 주님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께 충실한 자녀가 될 것이고, 그분의 거룩한 힘이 우리 앞을 비추며 나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오직 겸손한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만 초자연적 시야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방식은 초자연적 삶과 동물적 삶, 두 가지뿐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느님의 삶, 초자연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의 지성과 의지가 열망하는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든 것은 끝이 있고 눈에서 사라지며, 이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도 한낱 무대 소품과 화면에 불과하고, 이 모든 것이 지나가야 영원한 삶이 펼쳐진다면, 과연 무엇이 중요합니까?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영원’이라는 말 덕분에 위대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성녀가 오빠 로드리고와 함께 아다하 문을 통하여 아빌라를 나섰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할 수 있는 무어인들의 땅을 향하여 성벽을 뒤로하고 출발했을 때, 피곤해지기 시작했던 오빠에게 어린 성녀는 계속해서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하고 속삭였습니다.

지상의 것에 대하여 ‘영원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만 유일하게, 전적으로 참되게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마다 하늘의 달콤한 꿀맛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믿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나무가 말라 버리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서 “어째서 무화과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마태 21,20). 첫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아 왔지만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불타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확실하게 밝히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태 21,21). 그리스도께서는 한 가지 조건을 내놓으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움직여야 할 것들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마음 안의 것을 움직여야 합니다. 은총의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에도, 희생에도, 겸손에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모든 능력을 받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2).

신앙인이라면 이 세상의 사물들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데레사 성녀의 표현을 빌리면 이 땅에 사는 동안은 나쁜 여관의 나쁜 밤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일하고 싸우며 우리 자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악으로 하느님의 정의에 빚진 것을 모두 청산해야 합니다. 또한 신앙인이라면 이 세상 것들은 모두 수단이며 그것들을 관대하고 영웅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관상의 길에 있다는 이유로 온갖 산란한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만나 알게 되고 그분 사랑의 달콤함을 즐긴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경험하였겠지만, 저도 이 진리를 상기시켜 주고 싶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원수인 사탄은 포기하지도 않고 쉬지도 않습니다. 우리 영혼이 하느님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을 때조차도, 사탄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때 영혼이 타락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을 악마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마는 또한, 만일 아주 사소한 일에서라도 영혼이 주님을 거스르게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의 양심에 절망을 안기는 결정적 유혹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한 가엾은 사제의 경험에서 배우고 싶다면, 이런 말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육신이 자신의 잃은 권리를 되찾으려고 노력하거나, 더욱이 교만이 고개를 세우고 반항할 때에, 여러분은 서둘러 십자가 위에서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린 그리스도의 몸에 난 거룩한 상처들로 피신하여야 합니다. 영이 움직이는 대로, 그분의 거룩한 상처 안에 여러분의 모든 인간적 신적 사랑을 내려놓으십시오. 주님과 일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그분의 피를 나누고, 우리를 예수님께 데려가신 성모님을 같은 어머니로 모시는 자녀임을 느낀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