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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하느님의 친구들»에 사도직 → 내적 생활의 풍요로움 항이 있음.

내적 생활, 우리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네시는 부르심에 응답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수염의 마지막까지(모든 면에서)’ 참으로 순수한, 시성될 수 있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분이시고 유일하신 스승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세우시고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일상의 세계에서 성덕을 위하여 투쟁하라는 뜻이며, 또한 사도직을 수행할 의무를 내리시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는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 당연히 다른 영혼들에 대한 관심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무언가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을 발견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에 관하여 말하고 싶어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따라 주님의 길을 가기를 원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집회나 목욕탕에 가다가 시간 여유가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에게 함께 가자고 초대합니다. 이 인간적 행위를 영적 영역에도 적용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을 향하여 갈 때에, 혼자서 가지 마십시오.”

만일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또는 상황의 어려움에 관한 변명을 늘어놓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언제나 어려움이 있었으므로―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동료 이웃을 끌어들이는 것의 성공 여부는 대개 우리 자신이 어떤 내적 생활을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성인이 되어야만,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실제로 성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충실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의 사도적 노력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하느님과 동료 이웃들은 모두 우리에게 변함없는 충실성을 요구합니다. 말 그대로 진정한 충실성, 미봉책이나 타협이 아닌 자세한 부분까지 한결같은 충실성,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기쁘게 실천하는 완전한 충실성을 요구합니다.

내적 생활. 일상적인 일들에서의 거룩함, 우리가 행하는 사소한 일들에서의 거룩함, 우리 직업에서의 거룩함, 세속 안에서의 거룩함, … 이러한 거룩함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친구 하나는 한 가지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제가 알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높이 날고 있었지만, 비행기 안, 객실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행기 밖 날개 위에 있었습니다. 가엾은 친구, 그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 높이 날아오르려고는 하지만 아무런 내적 생활 없이 살거나 내적 생활을 등한시하는 영혼들이 직면하는 불안과 위험을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듯합니다. 그들은 걱정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고, 끊임없는 사고의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활동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잃을 위험이 심각하게 존재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기도 생활, 자아 포기 등의 내적 생활 없이는 확고한 신앙심을 지닐 수 없습니다. 자주 성체를 받아 모시고, 묵상과 양심 성찰, 영적 독서를 계속하며, 성모님과 수호천사들에게 끊임없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은 기쁨에 가득 찬 것이 되고, 벌집에서 꿀이 나오듯 숨어 있는 보물창고에서 하느님의 달콤함과 기쁨이 넘쳐 나오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 안에서 휴식을 찾으십시오. 하느님은 참으로 부드럽고 무한한 사랑을 지니신 아버지입니다. 날마다 그분을 ‘아버지’ 하고 많이 부르고, 마음속으로 홀로 그분께 말씀드리십시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저는 당신의 자녀여서 자랑스럽고 힘이 납니다.’ 우리 내적 생활의 참 모습이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느님을 향한 신심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지향으로 몇 가지라도 항구하게 실행함으로써 착한 자녀의 마음가짐과 생활 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경고하고 싶은 것은, 신심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정형화된 틀입니다. 그러한 틀은 종종 훌륭한 업적을 이루려고 하거나 착수하려는 열망으로 거짓 위장됩니다. 반면에 일상적인 임무들에 대해서는 나태해지고 등한시합니다. 이런 일이 시작되려고 하거든, 우리 주님 앞에서 성실하게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언제나 피곤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자문해 보십시오. 혹시 여러분이 하느님 말고 다른 것을 찾지는 않았나요? 여러분이 일을 할 때에 그 성실하고 인내하던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이전의 관대함과 희생정신의 결핍 때문이 아닌지 점검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동안 여러분이 해 온 형식적 신심 행위, 보잘것없는 고행, 즉각적인 성과가 없는 사도적 노력들이 모두 아무런 선익도 없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공허함 속에서, 어쩌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곧 그분께 온전히 충실해질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은 흘려버리고 새로운 계획을 구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놀라운 것처럼 보이는 이 구상은 오히려 악몽에 가까워서, 우리는 현실을 망각하고 성덕을 향한 가장 확실한 길을 잃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초자연적 관점을 놓쳤다는 명백한 표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어린 자녀이며, 우리가 겸손하게 다시 시작하기만 한다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는 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마르 10,49).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만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찾고 계심을 늘 명심하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너의 게으름과 안락함과 이기심과 어리석음과 사소한 문제들을 내려놓아라. 몰골사납게 엎드려 있는 땅바닥에서 일어나라.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해지고 초자연적인 일들에까지 시야를 넓혀라.’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마르 10,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여러분이 전쟁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래 전에 저는 한 가지 서약을 한 직후에 전쟁터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군인들의 외투, 수통, 그리고 기념품, 편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진 등이 들어 있는 배낭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패자들의 것이 아니라 승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적의 방어선을 뚫고 질주하는 이들에게 불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는 바르티매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가는 데에는 반드시 희생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데 방해가 되는 외투, 배낭, 수통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전투에서도, 그리스도 왕국을 확장시키는 사랑과 평화의 행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교황님 그리고 모든 영혼에게 봉사하려면,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기꺼이 버려야 하고, 밤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게 해 주는 외투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의 기념품도 없이, 기운을 차리게 해 주는 물도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에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모범이시며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찬히 바라봅시다. 주님 생애의 중요한 순간들에 적어도 외형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거룩한 복음서는 그분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가시어 40일을 밤낮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마태 4,2 참조).

제가 고집을 부리는 것 같더라도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보여 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 비록 가장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행동조차도 초자연적 차원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성을 생생하게 인식하면서 인생의 모든 순간을 사는 법을 배울 것이고, 하느님과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의 필요성을 더욱 깊이 이해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께 기도하게 되며,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의 행위를 하며,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아주 간단히 말해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우리 주님의 행동 방식을 성찰하면서 도달한 결론은, 사도직은 그 무엇이건 간에 내적 생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열두 제자를 선정하시는 방법을 보여 주는 성경 구절들은 저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동시에 아주 초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루카 성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고 합니다. 베타니아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시고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 일으키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요한 11,41).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면, 만일 우리가 참으로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참된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격려해 주고 싶다면, 무슨 일이든 기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성인의 모든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하느님께서 주신 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 덕분에 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삶이 아니라면, 그러한 삶에 확고한 중심과 토대를 두는 사도직이 아니라면, 그러한 활동에서 초자연적 결실을 거두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터, 우리의 가정, 우리가 사는 거리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크고 작은 온갖 문제에서 도망치지 말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고정시키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말과 행동, 심지어 결점들까지도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를 발산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야.”

이러한 자아 포기와 더불어 우리의 사도적 열정에 불이 붙고 날마다 더욱 커집니다. 선(善)은 확산되는 것이므로, 이 열정은 그 열렬한 희망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 붙습니다. 우리의 비천한 본성으로는 하느님께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온 세상에 기쁨과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의 물(요한 19,34 참조)을 모든 곳으로 공급하려는 열망이 타오를 수도 없으며, 사랑을 위하여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이전에 슬픔과 고통과 눈물에 관하여 말하였습니다. 그 이야기와는 아무런 모순도 없이 제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주님을 찾는 제자에게는 슬픔, 걱정, 고통이 이제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신경이 한계점에 이르고 더 이상 고통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충실한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자마자, 그분의 계획을 기쁘게 실행하자마자,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