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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느님의 친구들»에 마음 → 진심 항이 있음.

실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슬기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고치기 때문에 슬기로운 것입니다. 편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기보다 비록 스무 번 실패하더라도 거듭 도전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것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어리석게 돌진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터무니없이 무모하게 행동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할 것입니다.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좋은 일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사람, 흥분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국면을 전환시키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우리는 그들을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하고 조용하게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여는 덕목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움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는 사회적 조화도 아니고 아무런 마찰 없는 평화도 아닙니다. 슬기로움의 바탕에는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겠다는 의지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유치하지 않고, 진리의 친구답게 똑바로 나아가며, 결코 방황하거나 천박하게 살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슬기로운 마음은 지식을 구합니다”(잠언 18,15). 하느님에게서 오는 그 지식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궁극적 지식이며, 모든 피조물에게 평화와 공감을, 그리고 각각의 영혼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지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탕자가 방종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더욱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잊고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루카 15,22-23).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다가갈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끔찍한 처지에서 보물을 이끌어 내시고, 우리의 나약함에서 힘을 이끌어 내십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날마다 그분께 간다면, 그분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행동으로 사랑을 확인시켜 드린다면, 모든 것을 그분의 전능하신 힘과 자비에 의탁한다면,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준비하시겠습니까? 아버지를 배반하고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열어 주신다면, 언제나 그분 곁에 있으려고 노력한 우리를 위해서는 무엇을 마련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괴롭힌 자들이나 우리가 겪은 수모들을, 그들이 아무리 불공정하고 야만적이며 무례하였을지라도, 기억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불만 사항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쭉 읽어 내려가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옷처럼 입고 벗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약해지거나 더 강해질 수 있고, 또는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 초자연적 삶과 더불어 우리 신앙은 튼튼해지며, 하느님 없이 비참하게 헐벗은 자에 대한 생각은 영혼을 두렵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하고 감사합니다. 저의 하느님, 제가 저 자신의 가엾은 삶을 바라볼 때, 어떤 허영을 부리거나 더욱이 어떤 자랑을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저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제가 언제나 겸손해야 하고 뉘우쳐야 하는 수많은 이유들뿐입니다. 섬기는 삶이 인간으로서 가장 고상한 소명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