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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느님의 친구들»에 인간의 존엄성 → 정의와 애덕 항이 있음.

성경을 읽으십시오. 우리 주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묘사하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묵상하십시오. 특히 땅끝까지 보낼 사도들을 준비시키는 격려와 경고의 말씀들을 깊이 성찰하십시오. 그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새 계명이 아닙니까? 타락한 이교 세계로 사도들이 뛰어들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인류의 중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정의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정의만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인간의 품위를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정의를 꿰뚫고 정의와 조화를 이룹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부드럽고 거룩하게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원동력은 하느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힘으로 이웃을 더 쉽게 사랑할 수 있고, 지상의 모든 사랑을 정화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정의의 엄격한 요구에서부터 사랑의 풍요로움에 이르기까지 머나먼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견디어 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턱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들은 정의를 제쳐 두고 낮은 수준의 복지를 충족시켜 주는 것에 머물면서도 그것을 자선 활동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가운데 단지 작은 부분만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느 바리사이가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2 참조)라고 하면서 율법을 모두 지켰다고 생각하듯이, 그들은 자만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관대함이 넘치는 정의 같은 사랑은 먼저 우리 자신의 의무를 완수할 것을 요구합니다. 첫째는 정의로워지는 것이고, 그다음 단계는 가장 공정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위해서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더 많이, 더 넉넉히 배려하고 존중하며 친절히 대해야 합니다. 달리 표현한 것으로, 사도의 충고도 있습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 그러면 우리는 참으로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예수님의 계명을 철저히 이행하게 될 것입니다.

정의와 사랑의 완전한 결합의 본보기로서 어머니들의 행동보다 더 뚜렷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동일한 정도의 애정으로 모든 자녀를 사랑합니다. 각 자녀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를 다르게, 다른 정의로써 양육하는 것도 그 동일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고 충만하게 합니다. 각 사람들의 특정 상황에 맞추어 다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을 주고, 지식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지식을, 외로운 사람에게는 애정을 주어야 합니다. 정의에 따르면, 각자 자신의 몫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뜻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토피아적인 평등주의는 가장 극심한 불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착한 어머니와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려면 우리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 이상의 영예를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영원한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싸우신 거룩한 주님께 우리 자신의 의지를 기꺼이 맡겨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보다 더 정의로운 길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