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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느님의 친구들»에 성령 → 성령의 은사와 초자연적인 삶 항이 있음.

그러한 마음의 지혜, 슬기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결코 육에 관한 슬기가 아니며(로마 8,6 참조), 우리 주님을 찾고 사랑하는 데에 자신의 지성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슬기가 아닙니다. 참으로 슬기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음성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그렇게 깨어 기다림으로써 자신의 영혼 안에 구원의 약속과 실현을 맞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마음의 지혜는 다른 많은 덕들을 인도하고 지배합니다. 슬기를 통하여 우리는 경솔함 없이 담대해지는 법을 배웁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사는 노력을 등한시하는 (실은 게으름 때문인) 핑계를 대서는 안 됩니다. 슬기로운 사람의 절제는 둔감함도 아니고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정의는 냉혹함이 아니고, 그의 인내도 굽실거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덕목들을 얻으려고 싸울 때, 그 영혼은 성령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자 성령의 작용에 힘입어 선한 인품이 그 영혼 안에서 더욱 강건해집니다. “영혼의 기쁜 손님”(성령 강림 대축일 부속가)이신 성령께서 풍성한 선물, 곧 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 경외의 은사를 부어주십니다(이사 11,2 참조).

성령의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평화”(갈라 5,22), 유쾌한 평화, 쾌활함이라는 인간적 덕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적 기쁨을 경험합니다. 눈앞에서 모든 것이 붕괴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반대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당신은 제 피신처 하느님이십니다”(시편 43,2). 하느님께서 내 영혼 안에 머무시면,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굳건하게 서 있습니다.

공경의 은사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확실하게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데 어찌 슬플 수가 있겠습니까? 슬픔은 이기심의 최종 산물입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살기를 바란다면, 우리에게 비록 잘못이 있고 비참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언제나 쾌활함이 넘칠 것입니다. 쾌활함은 우리를 기도 생활로 이끌고, 기쁨의 찬미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노래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저는 기도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에 결코 피곤한 적이 없으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30대 젊은 사제였을 때, 온갖 사람들이 우리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방법을 찾고자 저에게 왔습니다. 대학생이건 노동자이건, 건강한 사람이건 아픈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성직자이건 평신도이건 그들에게 저는 똑같은 충고를 하였습니다. “기도하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저는 도무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 저는 그에게 하느님 앞에서 똑같이 불평하면서 자신의 열망과 갈망에 관하여 말씀드리라고 했습니다. “주님, 저는 기도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때로는 이처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우정을 계속 유지하는 길의 시작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저는 아직 그것보다 더 좋은 처방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그분께 가서 말씀을 드리십시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여러분은 성령의 활동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이것을 말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떠한 말도 그 깊이를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확신의 원천이 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사제 생활 내내 사람들에게 기도에 관한 상담을 해 줄 때마다,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성경 안에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주님, 저는 주님께 말씀드리는 방법을 모릅니다!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에, 우리는 성령께서 베푸시는 온갖 다정한 도움을 받게 됩니다. 성령의 빛, 불, 힘찬 바람 덕분에 불꽃이 피어나고 사랑의 위대한 불이 타오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어릴 때 배운 간단하면서도 매력적인 소리 기도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결코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시작한 기도가 이제 넓고 부드럽게 흐르는 시냇물 속으로 퍼져 갑니다. 우리의 기도는, “나는 길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신 분과 우정을 맺는 길로 들어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거룩한 두려움으로 창에 찔린 그분 옆구리에 난 상처 속으로 피신한다면, 그때 주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이제 우리 마음은 거룩하신 성삼위를 각각 구별하여 흠숭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어린이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눈을 뜨듯이, 영혼이 초자연적 삶에서 어떤 발견을 하게 됩니다. 이 영혼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더불어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며, 생명을 주시는 위로자 성령, 인간 측의 어떠한 공로도 없이 자신을 내어 주시는 분, 온갖 선물과 초자연적 덕들을 선사하시는 성령의 업적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시냇물을 그리워하는 암사슴처럼 달려 왔습니다(시편 42,2). 우리는 갈증에 시달리고, 입술은 바싹 말라 건조해졌습니다. 우리는 생명수의 원천에서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우리는 온종일 보잘것없는 일에 매달리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물이 풍성하게 솟는 맑은 샘을 향하여 움직입니다(요한 4,14 참조).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혀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성이 조용히 자랍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봅니다! 그러면 영혼이 한 번 더 새로운 노래를 시작합니다. 온종일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신다는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별한 상황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 영혼 안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일 것입니다. 이 열렬한 사랑은, 어떠한 소란이나 과장 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견디며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마태 7,14)에 들어선 우리들은 얼마나 침착하고 평화로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