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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하느님의 친구들»에 겸손 → 하느님의 손에 들린 도구 항이 있음.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놀라운 방식으로, 곧 인간적이고도 신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을 따르며 우리는 고통과 헌신 속에서도 기쁘게 자신을 버리고 행복을 누립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것은 이미 우리가 들었던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굳은 실천 의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품에 안으시고 세상의 모든 교차로에서 소금과 누룩과 빛이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안에서 빛을 비추고 향기를 뿜으며 성숙하여 새 생명을 낳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빛의 근원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단지 빛을 반사할 따름입니다.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들이 선을 행하도록 이끄시는 이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다소간의 역할을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을 선의 주관자로 착각하면, 우리의 교만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소금은 맛을 잃고, 누룩은 부패하며, 빛은 어둠에 묻힐 것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 매우 사리에 맞는 대답입니다. 보통은 밤 시간이 고기 잡기에 좋은 때인데, 이번에는 허탕이었습니다. 낮 시간에 하는 고기잡이의 요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그는 그리스도의 제안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의존하여 일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루카 5,6-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바다로 나가셨을 때, 단지 고기를 잡는 것만 생각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말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8.10)라고 이르십니다. 이제 새롭게 사람을 낚는 일에 하느님의 모든 능력과 효력이 함께할 것입니다. 사도들은 인간적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놀라운 위업을 위한 도구로 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성인이 되려고 분투한다면, 우리 각자가 처한 세상 상황에서 자신의 일과 직업을 통하여, 일상생활 안에서 기적을, 필요하다면 지극히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로 하느님께서 쓰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눈먼 사람을 보게 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으나 시력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찬란한 빛을 받게 된 수많은 사례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예전에는 듣지도 전하지도 못하는 귀머거리, 벙어리였던 사람들의 사례를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감각은 정화되었고, 이제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서 듣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사도 3,6) 사도들은 예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불구자, 달리 표현해서 해야 할 일은 알지만 실천하지 않았던 사람을 걸어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또 다른 사람은 죽어서 썩고 있었고, 시체에게서 나는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나인 고을에서 과부의 아들에게 일어난 기적처럼, 그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그분의 첫 제자들이 한 것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러한 기적의 수혜자들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눈이 멀었거나, 귀가 들리지 않았거나, 몸이 마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죽음의 악취를 풍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절망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분을 진심으로 따른다면, 더 이상 자신을 추구하지 않고 그분만을 찾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자유롭게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요한 21,8). 그들은 그물을 끌고 오자마자 주님 발아래 놓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영혼들은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영혼들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을 선포하고 전달하는 교회의 사도직은 어떠한 인간의 특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의 배반에 대한 참회의 기회를 세 번 주시는 듯이, 세 번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비참한 경험을 통하여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하고는, 경솔하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리스도의 손에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7). 그리스도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베드로야, 너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그분께서 창조하셨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 피의 값으로 각각의 영혼을 모두 사셨습니다.

5세기에 도나투스파는 가톨릭 신자들을 조직적으로 공격할 때,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예전에 큰 죄인이었으므로 진리를 선언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신앙의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가톨릭 교회의 주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있으며, 그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설명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나는 좋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만났습니다. 만일 그가 나쁜 사람이라면, 그는 그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좋은 사람일지라도, 내가 그 사람을 신뢰하는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가톨릭 교회에서 배운 첫 번째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희망을 두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바라시고, 우리에게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잘못은 우리의 것이고, 열매는 주님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