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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하느님의 친구들»에 일 → 일을 기도로 전환하기 항이 있음.

여러 해 전의 이야기지만 오늘날에도 참으로 적절한 한 말씀으로써 이 대화를 계속하고자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나가는 모든 것, 하느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혼이 목표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도록 하느님께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온갖 평온과 평화를 잃게 되는 이유를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휴식 또는 여가 시간에도 초자연적 전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휴식과 여가가 일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직업에서 최고 위치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또 세상사에서 자유로운 선택과 노력의 보상으로서 최고의 칭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모든 인간적 활동에 생기를 주는 초자연적 전망을 잃는다면, 안타깝게도 그릇된 길로 빠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주제로 되돌아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비록 여러분이 사회에서, 공적 업무에서, 자신의 직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만일 영적 생활을 소홀히 하고 우리 주님을 무시하면, 결국 완전한 실패로 끝나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한, 그리고 참으로 중요한 최종 분석에서, 승리는 오직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올 것입니다. 어정쩡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마땅히 아주 행복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불안과 고통을 겪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행복에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자기 영혼을 할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쓸개즙보다 더 쓴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하고, 그분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그분의 왕국을 온 인류에게로 확장해 가려고 참으로 노력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겸손은 여전히 자신만을 챙기며 사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타격을 줍니다. 여기 로마에서 제가 종종 강조하는 것입니다만, 지금은 폐허가 된 아치 아래로 개선 황제들과 장군들이 행진을 하였겠지만 모든 것이 헛되고 교만과 자만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이 기념물 아래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이마가 아치 구조물에 부딪히지 않도록 머리를 낮추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겸손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은 절제와 겸손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이천 년이 흘렀지만 주님의 계명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 계명은 인간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가리킵니다. 제가 사제가 된 이래로, 자주 설교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참으로 많은 사람에게 주님의 계명은 여전히 새로운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계명을 실천하려고 전혀 또는 거의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슬픈 일이지만 진실입니다. 그럼에도 메시아의 말씀은 명약관화합니다. 주님은 늘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에게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이유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 우리가 낭비한 시간들을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우리는 쉽게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지 않고는 헛되이 변명만 늘어놓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주변에는 과중한 일에 시달리는 형제와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 도와주는지 알아채지 못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친절하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조심스럽고 세련되게 자선을 베풀면, 그들은 누구한테 고마워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것입니다.

가엾게도,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신들에게 자유 시간이 없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러 장터에 나온 일꾼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하는 일 없이 보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이른 아침 첫 시간부터 계속해서 긴급하게 일꾼들을 찾으셨지만, 그들은 어떤 유익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으실 때에, 우리는 ‘예’라고 응답합시다. 그리고 사랑을 위하여 기꺼이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마태 20,12)합시다.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고생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감실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를 비인격적 기도로 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의 명상을 바로 지금 우리 주님과의 인격적 대화로 승화시키고 싶다면(이를 위해 소리 내어 하는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익명의 망토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내맡겨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교회에 가득한 군중 속에 감추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무의미한 중얼거림, 진실한 내용이라고는 없는 반사적 습관에 지나지 않은 공허한 말소리로 추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일 또한 인격적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나누는 참된 대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일을 통해서, 일 안에서 거룩해지고자 한다면, 반드시 여러분의 일이 인격적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울이는 주의와 관심은 비인격적이거나 판에 박힌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날마다 여러분의 일에 영감을 주는 거룩한 자극이 곧바로 시들고 소멸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의 기억은 스페인 내전 당시 전선으로 향하던 여정을 떠올립니다. 저는 아무런 지원 물자도 없었지만, 사제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데가 있다면 어디든지 갔습니다. 그때는 매우 특별한 상황이었습니다. 도덕적 해이와 게으름을 정당화할 구실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지만, 제 역할은 단순히 금욕에 관한 충고를 주는 것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제가 전하고 싶은 말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하나입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일깨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 영혼의 구원뿐 아니라 여기 지상에서의 행복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강조하였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활용하여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또한 전쟁을 자신의 삶에서 닫힌 괄호로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게을러지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마치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는 대합실에서처럼 참호와 초소에서 시간을 때우는 일이 없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군 임무와 양립할 수 있는 일, 예컨대 외국어 공부를 하도록 제안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를 그치지 말도록, 자신들이 행한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일이 되도록 힘쓸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제가 큰 감동을 받은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저의 제안에 훌륭하게 응답한 군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굳건한 정신은 참으로 칭찬할 만합니다.

저는 또한 그즈음에 부르고스에 머물렀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 도시에 주둔했던 많은 군인들 말고도 휴가 온 수많은 젊은이들이 저와 함께 며칠 시간을 보내려고 찾아왔습니다. 저도 무너진 호텔의 단칸방에서 몇몇 자녀들과 함께 지냈고, 비록 생활 편의 시설은 대부분 부족했지만 모여든 수백 명의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제공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를란손 강둑을 따라서 걷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저는 그들이 내면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결심을 굳건히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언을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생활로 들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 열망을 불러일으키고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라스우엘가스 수도원까지 걷곤 했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주교좌성당까지 가곤 했습니다.

저는 주교좌성당의 종탑에 올라가 꼭대기의 장식을 가까이 살펴보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 장식은 참으로 인내롭고 힘겨운 세공 작업의 걸작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동행한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이 아름다운 작품이 저 아래에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곤 했습니다. 예전에 그들에게 설명했던 것과 연관 지어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고자, 저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일이며,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참으로 아름답고 정교한 이 돌 장식처럼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마치도록 하십시오.” 우리 일행은 우리가 본 모든 것이 하나의 기도이며 하느님과 나누는 다정한 대화임을 이해하였습니다. 그 높은 종탑에서 일한 사람들은 저 아래 길거리에서는 자신들의 노고의 결실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일이 우리를 주님께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까? 여러분도 중세의 석공이 했던 것처럼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일은 하느님의 일이 될 것이며, 인간의 일이면서도 거룩함을 간직한 결실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면서 밭을 갈고,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면서 항해도 하고 장사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과 결합됩니다. 전장의 참호에 웅크리고 있는 병사처럼 낯선 환경에 내던져졌을 때에도, 열성을 다한다면 주님 안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 안에 머물며 노력하고 또 노력하였을 것이므로, 여러분의 노력은 기도가 된다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직업의 인간적인 면과 관련해서는, 우리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일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당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 말대로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을 믿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지 않을 것이며, 얼굴을 붉히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탑을 세우려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되지 않아야 합니다.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9-30).

저를 믿으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초자연적 관점을 놓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일을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전에 마지막 돌을 얹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마태 20,22)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도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일을 기도로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자마자, 하느님께서 벌써 들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우리 영혼은 일상생활의 한가운데서 침묵 중에 기도를 올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극기의 삶을 살도록 요구하십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작은 희생을 봉헌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누군가에게 미소를 건네라고 요구하십니다. 재미는 없더라도 중요한 일을 먼저 하고, 세세한 일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포기하고 싶더라도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자신의 임무를 끈기 있게 완수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이 모든 일로써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책상이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장소에 십자가를 두어 여러분이 내적 기도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정신을 일깨우고,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이 섬기는 삶에 관하여 배울 수 있는 교과서로 삼도록 하십시오.

이러한 관상기도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면, 여러분은 곧바로 주님의 친구가 되었다는 느낌을 지니게 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땅에서 거룩한 길들을 온 인류에게 활짝 열어 보이는 임무를 맡기셨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일로써 모든 대륙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하는 일에 협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하는 시간 시간을 봉헌함으로써 먼 지역에서 신앙의 싹이 트도록 도울 수 있으며, 신앙 고백을 잔인하게 금지하는 나라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빛이 희미해져가고 영혼들이 무지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전통적 그리스도교 국가들에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의 일하는 시간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일이 끝날 때까지 끈기 있게 몇 분이라도 더 오래 주님께 시간을 봉헌하십시오. 간단하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여러분은 침묵 속의 기도를 사도직으로 바꾸는 것이며, 이제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도는 지극히 감미롭고 자비하신 주 예수님의 성심과 하나 되어 고동치는 심장처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위와 같이 겁 많고 경솔한 방식으로도, 비록 초자연적 동기는 아니고 단지 인류애에 따른 것이지만,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는 강직한 개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온갖 역경에 부딪힙니다. 그들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줍니다. 저는 그들이 고귀한 이상을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해 끈기 있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나 감동하고 존경심까지도 생깁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려야 할 점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단지 우리 자신의 일이라면 그 시작부터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 손이 이룬 그 모든 위업과 일하면서 애쓴 노고를 돌이켜 보았다. 그러나 보라, 이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일. 태양 아래에서는 아무 보람이 없다”(코헬 2,11).

이러한 불안함이 희망을 질식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세속적 노력이 무의미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참된 희망을 향한 길이 열립니다. 그 희망은 모든 인간적 노력을 승화시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지점으로 바꾸어 줍니다. 꺼지지 않는 불빛이 우리의 모든 일을 비추어 실망의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운 세속적 계획이 그 자체로 끝나 버리고 우리의 영원한 본향과 창조 목적,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미하며 하늘에서 영원히 그분을 차지하도록 창조되었음을 시야에서 흐리게 하고 만다면, 아무리 빛나는 노력도 반역에 불과하며, 심지어 동료들까지 타락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신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 밖에서 행복을 찾던 때의 쓰라린 경험을 탁월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을 위하여 저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채워 주시는 사랑이신 한 분 하느님 말고 다른 것에 희망을 둠으로써 자신의 희망을 더럽히고 타락시키고 말았다는 자기 환멸보다 더 큰 비극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 일어난 일이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의 감성과 지성으로 확신하는바, 제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제 마음을 참된 희망으로 가득 채웁니다. 그 희망은 초자연적 덕이지만, 우리에게 부어지면 우리 본성에 적응하여 매우 인간적인 덕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끝까지 충실하면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저는 행복합니다. 제가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주님은 선하신 분”(시편 106,1)이시고, 주님의 자비는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확신 덕분에 저는, 하느님을 담고 있는 것들만이 지워지지 않는 영원함을 드러내고 항구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저를 분리시키기는커녕, 새로운 방식, 곧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발견해 내는 그리스도인다운 방식으로 세상의 현실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도록 이끕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의 마음은 행복을 열망하며 사랑을 찾아 열심히 달려갑니다. 세상은 우리의 그러한 마음을 잡아끄는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곳곳에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성공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주변의 모든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아, 안타깝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목표는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낮고 그들의 이상도 빠르게 변질되고 사라집니다. 그들은 모든 것 가운데 최고 봉우리이자 무한한 것을 열망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의 바로 그 사랑이며, 끝없는 기쁨 속에서 그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여러모로 알고 있듯이, 이 세상에 종말이 오면 우리가 살아온 여기 지상의 일들은 모두 끝이 납니다. 각 개인의 경우로 보면, 그러한 상황이 더욱 빠르게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 자신이 지상에서 이룬 부와 특권을 무덤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으로 가득한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시편 31,2). 오, 주님, 저의 희망은 오로지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이제와 영원히 저를 이끌어 주소서.

우리는 이미 기도의 길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틀림없이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또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만족해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절거리는 잡담이며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에 관한 독백에 불과할 뿐,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엾게 여겨 주거나 존경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그 정도인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다면, 그리고 이 문제에 정직하고 진지하다면, 우리를 사랑하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 곧 아버지, 어머니, 아내, 남편, 형제자매, 친구의 충고를 구할 것입니다. 가끔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경청하기보다는 우리 감정을 표현하고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라도, 그렇게 해서 대화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과도 그렇게 시작합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 정신을 집중하고 우리의 영혼으로 겸손하게 대화를 나눕시다. 그분을 신뢰하며 우리의 기쁨, 슬픔, 희망, 짜증, 성공, 실패, 일상생활의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포함하여 우리 마음의 모든 것에 대하여 말씀드립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게으름을 모두 이겨 내고, 그릇된 핑계로 기도를 나중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은총의 원천을 내일까지 미뤄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지켜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십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여러분과 저는 형제자매, 친구, 아버지에게 하듯이, 하느님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것처럼, 곧 “지극히 위대하시고 지극히 선하시며 지극히 자비하신 하느님”이라고 그분을 부르십시오. 또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이러한 하느님이시기에, 저는 행동도 불손하고 솜씨도 서투르며 세상 먼지와 때로 더럽혀지고 거칠어졌지만 주님과 사랑에 빠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거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속도로 강하고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고통과 자기부정과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음을 마음속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아버지께 그렇게 가깝다는 것을 안다면 그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저의 주님이시며 아버지시여,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저는 주님과 함께 견고하고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바위, 저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2사무 22,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