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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고랑»에는 우정를 주제로 하는 24 항이 있음.

예수님의 기쁨에 찬 눈빛은 어땠을까요? 어머니의 걷잡을 수 없는 기쁨에 찬, 빛나는 눈빛과 같을 터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 하나이다!.’ 주님을 태중에 모시고, 곁에 모시고 생활하기 시작한 이래로 성모님의 영혼은 주님을 계속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을 놓치지 않는 기쁨을 항상 유지할 수 있기를.

제가 말하는 ‘우정의 사도직’이란, ‘개인적이고’, 희생을 아끼지 않는, 성실한, 즉 일대일의, 진심어린 마음의 우정입니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위해 호의를 베풀거나 봉사를 해 주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때에는, 그 사람 또는 그녀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과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기를 요구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의 명령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매일 노력하십시오. 겉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간단한 일이니 결심을 하고 매순간 네 행동을 그 요구에 맞추십시오.

“사람들이 몹시 분주하게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 그리스도의 이름만은 설교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이 드문 현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 예수님과 일치하여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할 그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가서 여러 나라 백성 모두에게, 모든 시대에 걸쳐 가르침을 전파하라고 주님께서 분부하셨는데 말입니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공통의 사명과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사람들은 결속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유일한 목적’이 별로 값어치가 없어보입니다.

그대에게 우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무리의 목자로서의 자각을 갖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이전에 저버렸던 사람들을 지금 다시 모아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였습니다.

단순히 수동적인 태도로만 유지해서는 안됩니다. 당신 친구의 진정한 친구가 되는, 즉 도움의 손길을 뻗쳐야 합니다. 우선 당신의 행실의 모범을 따르고, 이어서 당신의 권유와 친밀감을 더하는 영향력으로 말입니다.

그대가 의외로 발견한 우애와 우정의 정신이 그대에게 열성과 함께 채워졌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갈망하면서 꿈꾸어 왔었지만 경험해 본적이 없었던 그 무엇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우리들 모든 개개인을 위해 남김없이 우리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그 사랑스러운 우리들의 형제인. 그리스도의 형제들임을 사람들이 잊었기 때문입니다.

뜻밖에 발견한 우애와 우정의 정신에 당신은 푹 빠졌습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꿈에 그리면서도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당신이 그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것, 즉 타인을 위해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우리의 다정한 형제,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당신은 알고 싶은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진정한 선생님, 진정한 친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책략을 부려 그들의 지식을 ‘훔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힘든 고생과 고통 끝에 얻었지만, 당신은 더 편한 방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대가 저 사람, 이 사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을 해 줄 차례입니다.

똑바로 묵상하고 결과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그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당신이 그들을 ‘정말’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생각을 바꿀 겁니다. 당신 하기 나름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가시밖에 나지 않는 장미나무를 본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을 할까요?

미지근한 사람을 뜨겁게 하려면 열의라는 불로 감싸줘야 합니다.

“나의 상태를 한탄하지 마라, 너희들을 그토록 슬프게 하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달라”, 이렇게 외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가끔 그대는, 정신이 산만하거나 또는 넋을 잃곤 한다고 말하거나, 또는 무미건조하고 수줍은 것이 그대의 성격이라고 변명합니다. 심지어 그래서 함께 사는 사람들조차 깊게 알지 못한다고 덧 붙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설마 그런 변명으로 만족하는건 아니겠지요?

일상 생활의 사소한 모든 것을 초자연적인 눈으로 보라고 그대에게 권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덧붙였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하루 종일 여러 번 그럴 기회가 있을 거라고요.

애덕을 실천한다는 것은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하느님을 향해 가는 길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지, 남이 그대와 똑같이 생각하고 그대에게 동참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병행하여 나아가는 길로서, 각각 자기 고유의 길을 걸어 신에 이르는 것이지요. 따라서 길을 비교해서 누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지 궁금해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 중요한 것은 모두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니까.

그대는 말하기를 그 사람은 결점으로 가득차 있다고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들은 천국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신도 결점들이 있지마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참아 주고 그리고, 그보다도 더해서, 그대에게 감사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건하게 가지셨던 사랑을 가지고 그대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들이 적지 않은 단점들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서 배우십시오.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그대는 불평합니다. 그저사람은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언제쯤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할 생각입니까?

그래요. 인정합시다. 확실히 그 사람의 행동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열하고 비난할 만한 태도를 취했고, 무릇 품위가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리 경멸을 받아도 당연하다, 라고 당신은 덧붙였습니다.

거듭 말하겠습니다, 그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찬성은 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의 보잘것 없는 생활도 성스러운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목숨을 속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경멸하지 않으셨던 생명을 당신이 경멸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대가 우정을 이유로 남의 비열한 행위에 공범자가 되어버렸다면 값어치도 없는 서글픈 동료가 된 셈입니다.

원래 가혹하게 정해진 것이 없는 인생은 때때로 참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훨씬 더 초자연적이 되고 하느님의 손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인간적이 되고 주위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사면을 부여할 수 있는가, 이는 권위자의 권한에 비례합니다. 단순한 판사라면 설령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유죄 판결을 받고 죄를 인정한 범인에겐 형을 집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나라의 원수라면 때로는 사면이나 대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통회한 사람을 항상 용서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주님은 저의 어리석은 행동과 모욕적인 행위를 잊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이는 통회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20세기 돌아온 탕자가 형제들에게 쓴 말입니다.

그대의 작은 걱정과 꿈은 값싸고 숫자도 적지만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꽤나 고생한 후에야 그것들을 물리치고, 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대의 꿈과 관심의 대상은 형제자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웃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백배!” 그대는 며칠 전에 주님의 그 약속을 기억해냈습니다.

저는 그대에게 확언하거니와, 사도직에서 그대의 동반자들 사이에 살아있는 우애 속에서 그대는 그 일백배를 발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