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밭고랑»에는 그리스도교 윤리 (도덕)를 주제로 하는 7 항이 있음.

유행을 기준으로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이걸 납득하고 싶으시면 옛날 초상화 몇 장을 보면 충분합니다.

그대를 위해서 편지 하나를 베껴놓습니다

“저는 복음서가 가르치는 겸손에 매료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이 무의식중에 위축된 태도를 취하고, 그 결과 교회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저 무신론의 작가가,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다…라고 말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확실히, 우리는 노예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녀 신분에까지 높여진 노예이므로, 정념(情念)의 노예와 같은 생활은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관한 일에서는 남의 생각이 옳을 수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같은 문제를 다른 빛, 다른 그늘, 다른 윤곽 아래에서, 즉 당신과 다른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도덕에 있어서는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의 어머니 교회의 기준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받았으니 하느님 안에 있으면서 세상일에 종사해야 합니다. 다만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주는 데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대가 피해야 할 근본적인 실수를 하나 알려주겠습니다. 즉, 당신이 사는 시대나 환경의-존귀하고 정당한-습관과 요청을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성스러운 도덕에 맞추도록 인도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존귀하고 정당한’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다른 것과 분명히 구별한 점에 주목해 주었으면 한합니다. 고귀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일에는 시민권이 없는, 즉 시민이 받아들일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전 모르겠습니다. 왜 그대는 도덕과 신앙을 얘기할 때 스스로를 자주 독립한 가톨릭 신자라고 말합니까.

도대체 누구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잘못된 독립은 그리스도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한복판에서 생활하고 일을 하고 있는 한, 정결을 유지할 수 없다, 라고 스스로의 슬퍼해야 할 경험을 바탕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런 사람을 보면 슬퍼집니다.

만약에 그들이 자기네들의 비논리적인 추리의 결과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부모, 형제나 자매, 아내나 남편의 기억을 모욕한다 하여도 기분상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