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maría Escrivá Ob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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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더 발전하고 싶거나 주님께 더욱 헌신하고 싶은 열망이 솟구칠 때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이끌어 줄 북극성 같은 무언가를 찾을 때마다, 성령께서는 복음 말씀을 상기시키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기도는 모든 초자연적 노력의 토대입니다. 기도와 함께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없다면, 기도를 등한시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길을 갈 때에나 일을 할 때에나 언제나 우리 하느님과 잠시도 멈추지 않고 대화를 계속 나눔으로써 명상적 영혼이 되겠다고 굳게 결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이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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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범이시며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찬히 바라봅시다. 주님 생애의 중요한 순간들에 적어도 외형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거룩한 복음서는 그분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가시어 40일을 밤낮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마태 4,2 참조).

제가 고집을 부리는 것 같더라도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보여 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 비록 가장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행동조차도 초자연적 차원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성을 생생하게 인식하면서 인생의 모든 순간을 사는 법을 배울 것이고, 하느님과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의 필요성을 더욱 깊이 이해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께 기도하게 되며,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의 행위를 하며,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아주 간단히 말해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우리 주님의 행동 방식을 성찰하면서 도달한 결론은, 사도직은 그 무엇이건 간에 내적 생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열두 제자를 선정하시는 방법을 보여 주는 성경 구절들은 저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동시에 아주 초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루카 성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고 합니다. 베타니아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시고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 일으키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요한 11,41).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면, 만일 우리가 참으로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참된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격려해 주고 싶다면, 무슨 일이든 기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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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이야기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직전의 긴박했던 시간만큼은 함께 성찰해 보고 싶습니다. 그 시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 줄 위대한 희생을 준비하시는 때였습니다. 그 친교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성심이 사랑으로 넘쳐흐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성령의 오심을 알리시며, 제자들에게 열렬한 사랑과 믿음을 한결같이 간직하도록 격려하십니다.

우리 구세주의 열렬한 기도는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수난이 시작될 것임을 알고 계십니다. 온갖 모욕과 고통이 임박하였습니다. 죄인들이 매달리는 무자비한 십자가, 주님께서 그토록 열망하시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42). 그러시고는 곧이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나중에, 영원한 사제의 모습으로서 두 팔을 넓게 펼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말씀하십니다.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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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분의 어머니이시며 또한 우리의 어머니이신 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어머니께서 골고타의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성모 마리아에게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자신의 소임을 완수하실 때나 가정을 돌보실 때에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일들을 하실 때에 마음은 늘 하느님께 두셨습니다. “온전한 하느님이요 온전한 인간”(퀴쿰퀘 신경)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은총이 가득하신 당신의 어머니를 완전한 피조물의 본보기로 삼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매 순간 눈을 들어 하느님의 사랑을 우러러보려 하는 열망을 키워 주시려는 것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러 온 대천사는, 기도에 전념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에게 인사하였을 때, 그녀는 온전히 하느님께 빠져 있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며칠 뒤에 마리아는 기쁨에 넘쳐 마니피캇을 노래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마리아의 노래를 루카 성인의 사랑과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이 노래는 마리아가 하느님과 나누는 친밀하고 지속적인 대화를 드러내 보여 줍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구약의 성인들의 말씀들과 그들이 겪은 사건들을 깊이 그리고 오랫동안 묵상하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한없는 자비로, 그렇게 자주 은혜를 저버린 당신 백성에게 하신 모든 위대한 업적에 놀라워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보여 주신 사랑에 감탄하신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은 사랑에 가득 차 이렇게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이 좋으신 어머니의 자녀들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에게서 배웠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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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에는 제가 즐겨 묵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즐겨 묵상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명확하고 불변하는 기도의 본보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그리스도의 첫 추종자들의 삶을 설명하는 구절에서 되풀이하여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베드로 사도가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들은 기도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사도 12,5).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당시에도 기도는 내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성 야고보는 묻고 답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야고 5,13). 성 바오로는 이렇게 요약하여 말씀하십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기도하는 일에 결코 지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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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자신 있게 말하건대, 기도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예수님께 비난받은 위선자들처럼 재잘거리지 않고 참된 기도를 올리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마태 7,21).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처럼 아마도 ‘기도하는 소리’는 지를 수 있겠지만, “그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열망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주님!’ 하고 외칠 때에, 성령께서 우리 영혼 안에 일으키시는 영감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려는 열망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거짓의 그늘을 모두 없애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토록 비난하시는 이 악을 몰아내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몸에 밴 태도이건 실제 행동이건 분명하게 죄를 싫어해야 합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 우리는 대죄에 대한 공포심을 마음과 정신 안에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의도적인 소죄에 대해서도 깊은 증오심을 키워야 합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비록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기지는 않을지라도 은총이 우리에게 오는 통로를 막아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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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도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에 결코 피곤한 적이 없으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30대 젊은 사제였을 때, 온갖 사람들이 우리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방법을 찾고자 저에게 왔습니다. 대학생이건 노동자이건, 건강한 사람이건 아픈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성직자이건 평신도이건 그들에게 저는 똑같은 충고를 하였습니다. “기도하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저는 도무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 저는 그에게 하느님 앞에서 똑같이 불평하면서 자신의 열망과 갈망에 관하여 말씀드리라고 했습니다. “주님, 저는 기도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때로는 이처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우정을 계속 유지하는 길의 시작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저는 아직 그것보다 더 좋은 처방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그분께 가서 말씀을 드리십시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여러분은 성령의 활동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이것을 말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떠한 말도 그 깊이를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확신의 원천이 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사제 생활 내내 사람들에게 기도에 관한 상담을 해 줄 때마다,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성경 안에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주님, 저는 주님께 말씀드리는 방법을 모릅니다!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에, 우리는 성령께서 베푸시는 온갖 다정한 도움을 받게 됩니다. 성령의 빛, 불, 힘찬 바람 덕분에 불꽃이 피어나고 사랑의 위대한 불이 타오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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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기도의 길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틀림없이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또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만족해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절거리는 잡담이며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에 관한 독백에 불과할 뿐,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엾게 여겨 주거나 존경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그 정도인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다면, 그리고 이 문제에 정직하고 진지하다면, 우리를 사랑하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 곧 아버지, 어머니, 아내, 남편, 형제자매, 친구의 충고를 구할 것입니다. 가끔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경청하기보다는 우리 감정을 표현하고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라도, 그렇게 해서 대화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과도 그렇게 시작합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 정신을 집중하고 우리의 영혼으로 겸손하게 대화를 나눕시다. 그분을 신뢰하며 우리의 기쁨, 슬픔, 희망, 짜증, 성공, 실패, 일상생활의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포함하여 우리 마음의 모든 것에 대하여 말씀드립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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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을 모두 이겨 내고, 그릇된 핑계로 기도를 나중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은총의 원천을 내일까지 미뤄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지켜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십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여러분과 저는 형제자매, 친구, 아버지에게 하듯이, 하느님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것처럼, 곧 “지극히 위대하시고 지극히 선하시며 지극히 자비하신 하느님”이라고 그분을 부르십시오. 또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이러한 하느님이시기에, 저는 행동도 불손하고 솜씨도 서투르며 세상 먼지와 때로 더럽혀지고 거칠어졌지만 주님과 사랑에 빠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거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속도로 강하고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고통과 자기부정과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음을 마음속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아버지께 그렇게 가깝다는 것을 안다면 그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저의 주님이시며 아버지시여,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저는 주님과 함께 견고하고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바위, 저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2사무 2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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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말씀이 아주 친숙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내용입니다. 제가 숨 쉴 힘이 있는 한, 저는 우리가 언제나 어느 기회에나 어떤 다양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기도하는 영혼이어야 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설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우정을 단지 마지막 의지처로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한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홀대하는 것이 정상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대화, 열망, 생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그런 분이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찾다 보면, 전 생애에 걸쳐 그분과 친밀하고 신뢰하는 사이가 됩니다. 이에 관하여 제가 수없이 많이 이야기하고 글도 썼지만, 기꺼이 다시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임을 주님께서 몸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또 밤부터 아침까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잘 될 때에는,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에는 “주님,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원을 무시하시거나 못 들은 체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그러므로 우리의 초자연적 전망을 결코 잃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곧 유쾌할 때나 불쾌할 때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처럼 슬플 때나 위로를 받을 때나 늘 하느님의 손길을 봅시다. 여러분이 언제나 본능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영혼의 깊은 곳까지 보고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사소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것은 심오한 내면생활과 사랑이 담긴 진정한 대화의 명백한 표지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병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심장의 박동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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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보석 같은 ‘소리 기도’ 안에서 생생하게 빚어집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처럼 신적 기원을 지닌 기도들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 신앙의 형제자매들이 초기 교회 때부터 암송해 온 경건한 기도들, 하느님과 성모님께 바치는 찬송, 묵주기도, 그리고 수많은 찬양들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시편 86편의 한 구절, 곧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으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3절)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온종일’은 ‘하루’가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십시오. ... 어떤 한 사람이 세상의 끝에 도달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하느님을 향하여 외치는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쉬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지금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죽었을 때 하느님께 가서 간청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이 기도 안에서 그들을 따를 것입니다.” 이처럼 창조주를 향해 바치는 끝없는 찬양에 여러분도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특은을 입은 피조물로서 이 지상 여정의 모든 순간에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는 인간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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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고 특별히 시간을 내어 봉헌해야 합니다. 입을 열어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찬송이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위하여 시간을 충분하게 내십시오. 그리고 되도록이면 시간을 고정시키십시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감실 안에 남아 계시는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감실 앞으로 갈 수 없다면, 어디에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 속에 있는 모든 영혼 안에 신비롭게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충고하건대, 할 수만 있다면 그때마다 기도실로 가십시오. 저는 이때 경당이라고 하기보다 기도실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예식을 거행하는 공식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내밀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곳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확신하는 대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성체의 형태로 감추어져 계시지만 참으로 현존하시는 감실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여러분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방법이나 형식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의 자유도 구속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제가 하려는 일은, 모든 사람이 우리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도록 격려하고, 모든 영혼을 있는 그대로 각자의 특성대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 안에 당신의 뜻과 계획을 불어넣어 주시도록 간청하십시오. 우리의 머리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그리고 우리의 모든 외적 행동에까지 불어넣어 주시기를 간청하십시오. 단언하건대, 여러분은 이렇게 함으로써 수많은 실망과 이기심의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 곁에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는 온갖 장애물이 사라질 것입니다! 병들고 절뚝거리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늘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주님께서 “문제가 무엇이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에 우리는 “저의 문제는 ....”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빛이 밝아 옵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거나 내적 평화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말은, 특히 어려움들이 있을 때에 주님을 신뢰하며 마음을 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대부분 교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교만은 때때로 저 깊숙한 곳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대단히 중요한 사람으로, 특별한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모멸감을 느낍니다. 바로 이때가, 기도하기 좋은 때이고 우리의 그릇된 태도를 고칠 때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길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되도록 빨리 시작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교만은 겸손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기쁨이 마음속에서 샘솟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 영혼의 날개들에 진흙이 엉겨 붙은 것처럼 느낄지라도, 이제 우리 비참함의 진흙들이 마르기 시작합니다. 만일 우리가 극기와 고행을 실천한다면, 더러운 흙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고, 하느님 자비의 강풍에 힘입어 저 높이 솟구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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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놀라운 방식으로, 곧 인간적이고도 신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을 따르며 우리는 고통과 헌신 속에서도 기쁘게 자신을 버리고 행복을 누립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것은 이미 우리가 들었던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굳은 실천 의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품에 안으시고 세상의 모든 교차로에서 소금과 누룩과 빛이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안에서 빛을 비추고 향기를 뿜으며 성숙하여 새 생명을 낳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빛의 근원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단지 빛을 반사할 따름입니다.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들이 선을 행하도록 이끄시는 이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다소간의 역할을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을 선의 주관자로 착각하면, 우리의 교만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소금은 맛을 잃고, 누룩은 부패하며, 빛은 어둠에 묻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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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제 생활 30년 내내,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있으며 온 생애를 끊임없는 기도로 봉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당연히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참으로 언제나 가능한지 물었습니다. 그것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이루는 일치는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지 않습니다. 그 일치는 우리를 낯선 존재로 만들지 않으며, 우리를 둘러싼 것들로부터 떼어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셨으며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외아들까지 내주시고(요한 3,16 참조), 탕자의 아버지처럼 날마다 간절하게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이 사실이라면(루카 15,11-32 참조), 그분께서 우리의 사랑 가득한 응답을 바라신다는 것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은, 하느님께 말씀을 건네지 않고 그분에게서 멀어지거나 잊어버리며, 끊임없는 은총의 이끄심을 외면하고 바쁘게 다른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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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것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에서조차 서로 모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닮으라는 초대를 우리가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존경하는 분, 자신이 선택한 이상형과 조금씩 조금씩 같아지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행동 방식은 우리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정해집니다. 우리의 스승은 거룩하신 성삼위의 제2위격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곧 사랑의 친교에 참여할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이 열릴 것입니다.

때때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따라갈 힘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분의 지상 생애 동안 그분을 알았던 사람들에게 사랑스럽게 몇 마디를 건네 보십시오. 그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우리에게 낳아 주신 성모님께, 그다음에 사도들에게 말씀을 드리십시오.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렸다”(요한 12,20-22). 여러분은 이 장면에서 용기를 얻지 못하십니까? 그 이방인들은 감히 주님께 직접 다가가지 못하였지만, 좋은 중재자를 찾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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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죄가 너무 많아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까 봐 걱정이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므로,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진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비참함에 빠져 있다면, 저 세리처럼 그분께 가서(루카 18,13 참조)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제가 여기에 왔습니다.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또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하신 일에 대하여 마태오 성인이 전하는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병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그곳에,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참회하는 마음과 그를 가엾게 여기는 사람의 슬픔에 마음이 움직이시어 곧바로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제가 충고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 복음서의 여러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생각들을 기억해 내고 묵상하는 데 도움을 받으려고 선택한 장면 또는 신비를 떠올리십시오. 그다음에는 우리 주님의 자비하신 성심, 겸손, 순수함,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방식 등의 특정한 측면에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그다음에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러분의 영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려고 하시니, 정신을 바짝 차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어떤 암시가 느껴지고, 깨달음을 얻으며 주님의 부드러운 질책도 들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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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기도 방법 하나는, 아마 여러분에게도 유익할 것입니다만, 가끔 지극히 영적인 내용들조차도 물질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시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주변 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을 활용하시고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예컨대, 목자와 양 떼, 포도나무와 가지, 배와 그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가 우리 마음에 뿌려졌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하여 어떤 땅을 준비하였습니까? 돌밭입니까? 가시덤불입니까? 하잘것없는 인간적 근심들이 말씀의 씨의 숨을 막아 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 햇빛과 비가 알맞으며 비옥하고 좋은 땅을 준비하게 하소서. 여러분의 씨가 좋은 땅에 뿌리를 내려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하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9월이 오면 포도나무는 수확을 앞둔 포도들의 무게 때문에 구부러지고, 유연하게 얽히며, 길고 호리호리한 가지들로 풍성해집니다. 나무줄기를 통해서 오는 수액을 공급받기 때문에 그 가지들에는 열매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면, 몇 개월 전에 우리가 알던 그 조그만 싹에서는 우리 눈을 즐겁게 해 주고 마음에 생기를 돋우는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시편 104,15 참조).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반쯤 땅에 묻힌, 메마른 가지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지들도 한때는 나무에 붙어 있었으나, 지금은 시들고 죽어 ‘열매 맺지 못함’의 완벽한 표상을 보여 줍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여기 보물이 묻혀 있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행운아의 무한한 기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고생도 고통도 끝났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보물이 묻힌 밭을 삽니다. 그의 보물이 있는 곳에 그의 마음도 있습니다(마태 6,21 참조). 우리의 보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는 일을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쓸모없는 짐을 일단 버리게 되면, 우리의 배는 하느님 사랑의 안전한 항구로 직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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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야기하였듯이, 기도 방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자녀는 아버지 하느님과 대화하는 데 어떤 방법이나 인위적인 방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창의적이고 온갖 시도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사랑한다면,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인도하는 자신만의 내밀한 통로를 발견할 것입니다.

하느님, 오늘 우리가 묵상한 내용들이 여름철 폭우처럼 우리 영혼 위로 흘러 지나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비가 몇 방울 떨어지고 또다시 햇볕이 내리쬐면 땅은 예전처럼 건조해집니다. 하느님 은총의 물이 고이고 뿌리까지 스며들어야 덕행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일과 기도로 구성된 우리의 지상 생애 동안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흔들리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도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성모 마리아께,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요셉 성인께 의탁합시다. 이 세상에서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어머니에게 가장 가까운 분,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아드님과 가장 가까운 분이었습니다. 그분들은 함께 우리의 나약함을 예수님께 전해 주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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