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내려놓음 (1955년 4월 4일 성주간 월요일 강론)

이제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온 인류를 위한 골고타 구원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에 관하여, 그리고 진흙으로 만들어진 우리 가엾은 피조물을 향한 그분의 설명할 길 없는 사랑에 관하여 묵상하기에 특별히 알맞은 시기입니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재의 예식: 창세 3,19 참조). 사순 시기 첫날, 어머니인 교회는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잊지 말라고, 그리고 언젠가 때가 이르렀을 때 우리 몸은 시골길 발길질에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처럼 흩어지고 “햇볕에 버티지 못하는 안개처럼”(지혜 2,4) 사라지리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엄숙하게 상기시켜 드렸지만, 여러분에게 또 하나의 찬란한 진리, 곧 우리를 지탱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위대함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을 조용히 성찰하십시오. 그로부터 우리는 한평생 묵상할 거리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으며, 더욱 관대하게 살아야겠다는 구체적이고 진지한 결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목표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고통을 겪으셨으며,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신’(1베드 2,21 참조)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목표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당신 사랑을 끝까지 퍼부어 주셨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바오로 사도께서 다시 한 번 그 답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자녀 여러분, 그 신비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그 신비로부터 배우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권능, 위엄, 아름다움, 무한한 조화, 위대하고 측량할 수 없는 부유함을 그리스도의 인성 뒤로 감추셨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영광은 당분간 빛을 잃었고, 이로써 우리 피조물은 구원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놀랍게도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갓난아기로 첫 모습을 드러내셨고, 그다음에는 다른 어린이들과 똑같은 어린이로, 나중에 성전에서는 똑똑하고 총명한 열두 살 아이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따르는 열광적인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선생님으로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사랑의 자취들을 조금만 성찰해 보아도, 우리의 영혼은 그분의 너그러우심에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 영혼은 마치 불 위에 놓여 있듯이 따끔하지만 부드러운 인도를 받아 여러 번이나 옹졸하고 이기적이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을 낮추시어, 부족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요 당신의 형제로 승격시켜 주십니다. 그분과 달리, 여러분과 저는 종종 어리석게도 주님께 받은 선물과 재능을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할 근거라도 되듯이 자랑합니다. 우리가 해낸 몇몇 성공적인 노력들이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 4,7)

하느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또 낮추시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신비를 묵상하고 하느님을 본받을 수 있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겸손 앞에서 교만한 인간의 허영과 무례함은 끔찍한 죄악으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모범과는 정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이신 그분이 자신을 낮추셨는데, 인간은 자신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가엾은 피조물임을 망각한 채 허망한 자기애에 빠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드높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렸을 때, 황금 꿩을 받은 농부의 우화를 들었을 것입니다. 농부는 처음에는 놀라고 기뻤지만, 곧 꿩을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닭장에 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닭들은 이 멋진 손님에 크게 놀라고 감탄하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을 대하듯 모여들었습니다. 한동안 소란이 계속되었고, 먹이 주는 시간이 되어 농부가 사료를 한 움큼 집어 던졌을 때, 오랜 기다림 끝에 굶주렸던 황금 꿩은 빈속을 채우려고 탐욕스럽게 뛰어올랐습니다. 마당의 닭들은 자신들의 멋진 영웅이 평범한 새들처럼 게걸스럽게 배를 채우는 천박한 모습을 보고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황금 깃털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물어뜯기 시작했습니다. 주제넘게 어느 누구의 도움도 거부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숭배의 환상은 더욱 비참하게 깨지고 맙니다.

여러분은 초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재능을 잘 이용하도록 위탁받은 사람으로서 매일매일 알찬 열매를 맺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마치 자기 노력의 결실인 양 여기던 헛된 망상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기억하고, 그것을 절대 무시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을 마음에 새기고 철저하게 믿으십시오. 우리 주님을 더욱 가까이 따르고 하느님과 온 인류에게 진정한 봉사를 하고 싶다면, 우리 자신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재능, 건강, 명성, 야망, 승리, 그리고 성공을 향한 자기 욕심마저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리겠다는 숭고한 지향을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떨쳐 버리려면 한 가지 규칙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따르면 됩니다. “주님, 무슨 일이든 오직 당신께서 원하시는 경우에만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저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꼬드기는 이기심과 허영심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느님을 더욱더 열렬히 가깝게 모시도록 이끄는 사심 없는 행동을 통해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한다면, 우리 마음이 온갖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4-26) 그레고리오 성인도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겼습니다. “자기 자신마저 버리지 않는다면, 사물들을 끊고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 자신 밖으로 나와서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자기 자신을 떠난다면, 자신을 버리는 사람은 누구란 말입니까? …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두 가지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죄에 떨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빚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되었을 때의 모습은 한 가지였는데, 우리 자신 때문에 또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죄에 떨어진 자신은 끊어 버리고, 은총으로 빚어진 자신은 굳건히 지키십시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하여 겸손해지면, 이미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욕정에 가득 찬 사람이 변하여 절제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예전의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수전노가 탐욕을 버리고, 남의 재산을 갈취하는 대신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베푼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을 부인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초연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교묘하게 붙들어 매고 있는 굵은 밧줄을 단호하게 끊어 버린다면,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숨김없이 말하건대, 이러한 삶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따라옵니다.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내려놓아야 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장 소중한 재산을 내놓는 것보다 더 어려운 포기를 감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시는 ‘내려놓음’에는 반드시 외적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동’과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사도 1,1 참조). 말씀으로 가르치시기 전에 행위로써 가르침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몹시 가난하셨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으며 처음 주무신 곳은 구유의 지푸라기들 위였습니다. 나중에 선교 여행을 하실 때에도,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어떤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안식일에 밀밭 길을 가던 굶주린 사도들이 밀 이삭을 뜯는 장면도 빼놓지 말고 묵상해야 합니다(마르 2,23 참조).

아버지께 받으신 사명을 다하시려고 우리 주님께서 걸으신 길은 날마다 자신이 가르치신 대로, 특히 그분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도발적이고 거룩한 말씀대로 사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은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소중하다. 까마귀들을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골방도 곳간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가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 그리고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들에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루카 12,22-24.27-28)

우리가 하느님의 거룩한 섭리에 더욱더 자신을 맡기고 하느님의 변함없는 보호를 굳게 믿기만 한다면, 수많은 근심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전형적인 이교인들, “이 세상 다른 민족들”(루카 12,30)의 모습입니다. 삶에 대한 초자연적 시야가 닫혀 있는 그들과 달리, 믿음이 굳건한 그리스도인에게 온갖 근심 걱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벗이요 사제요 아버지로서 상기시켜 주고 싶은 것은, 우리 삶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아버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루카 12,30). 그러므로 이 지상 여정에서 무척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철저히 떨쳐 버리고, 낙관적인 마음으로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는 점을 여러분에게 각인시켜 주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십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헛되이 내일 일을 걱정하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사람이 가엾게도 그 같은 노예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 대신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대로 세상 것들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창세 1,26-31 참조).

하느님 앞에서 저의 작은 경험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확신하건대, 저는 어느 누구의 본보기가 아닙니다. 저는 귀먹고 손이 서툰, 한낱 비천한 도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저 같은 넝마 조각 위에 책상 다리로도 완벽하게 글을 쓰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무슨 일을 하건 그것은 결코 저의 공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저를 인도하신 그 길을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강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일생 동안 하느님의 일에 헌신하였고 그렇게 일할 수 있도록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바가 저와는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손으로 만져보고 두 눈으로 보았기에 단언하건대, 여러분이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그분의 전능하신 팔에 자신을 맡긴다면, 하느님과 거룩한 교회와 세상 영혼들에게 봉사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임무를 하나도 빠짐없이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곧 세상의 온갖 좋은 것을 가져도 얻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요한 14,27 참조).

1928년 오푸스데이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저에게는 아무런 인적 자원도 없었거니와, 단 한 푼도 제가 개인적으로 관리한 적이 없습니다. 천사가 아니라 살과 피로 이루어진 사람에 관한 활동을 할 때에 일을 효율적으로 하려면 물질적 도구들이 필요하기에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재정 문제에도 직접 개입한 적이 없습니다.

오푸스데이는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사도직 활동을 끝까지 계속하려면 많은 사람들의 관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우리 활동에서는 금전적 이익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른 이유는, 비록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우리의 활동량이 증가한다고 해도, 사도직에 대한 요구는 몇 배로 늘어나리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한 번 이상 웃겨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요컨대, 우리 주님의 은총에 충실히 응답하면서, 그분께 더 많은 은총과 현금과 그 밖에 필요한 것들을 과감하게 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초창기에는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우리의 물질적 어려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노동자, 사무원, 대학생 등이 하느님의 불꽃에 끌려 저의 곁으로 왔습니다. 오푸스데이에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도움으로 우리의 희생과 기도가 풍성하면서도 은밀하게 작용해 왔습니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 저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감사의 마음이 흘러넘칩니다. 제 영혼의 느낌보다 무엇이 더 확실하겠습니까!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는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장담하건대, 어떠한 사도직 활동도 물질적 부족함 때문에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거룩한 섭리에 따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어디서나 얻을 수 있도록 안배하십니다. 우리에게 그분은 언제나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여러분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는 노력이 참으로 필요하며, 더욱이 아무런 두려움과 망설임도 없이 내려놓아야 합니다. 개인적 임무이건 가정과 관련된 임무이건 그 어떠한 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과 직업 그리고 온 인류에게 봉사한다는 관점에서 정직하게 인간적 수단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충분하고 무엇이 부족한가가 아니라, 여러분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배운 대로 재화들은 단지 수단일 뿐이라는 그리스도교 진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이 세상 재물 위에 행복을 쌓으려고 하는 사람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사례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그릇된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의 마음은 불만과 슬픔으로 가득 찼고, 끝없는 불행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조차 자신의 헤아릴 수 없는 노고로 얻은 재물의 노예요 피해자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결코 음란하거나 무질서하거나 공허한 사랑에 짓눌린 마음 안에는 거처를 마련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에 마음의 닻을 내립시다. … 하늘의 보물을 열망합시다.”

물론 여러분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권유하는 것도 아니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수행 중인 우리에게 그것은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성덕을 향한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만큼이나 비겁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품위에 맞게 사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특히 여러분의 일에서) 힘껏 노력해야 합니다. 때로는 빈곤 때문에 힘들어도, 낙담하지도 말고 항거하지도 마십시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을 이겨 내고자 할 수 있는 모든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의 섭리를 시험하는 셈이 됩니다. 여러분은 싸우는 동안에도, 모든 것이 함께 선을 이룬다는 것을, 심지어 결핍과 빈곤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로마 8,28)을 기억하십시오. 지금부터는 온갖 사소한 어려움과 불편함 정도는 웃으면서 맞이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이제 추위와 더위, 여러분이 느끼기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의 결핍,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는 것, 배고픔, 외로움, 배은망덕, 인정받지 못함, 모욕 따위는 쾌활하게 대처하십시오.

우리는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이며, 사회의 혈액 순환에 참여하고 있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직업 활동 안에서 성인이 되고 사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으로 일을 성화하고, 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성화되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거룩하게 살도록 돕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요 친구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일 안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날마다 자신의 일을 책임지고 잘 수행함으로써, 여러분 자신의 살림살이뿐 아니라 사회 발전에도 직접 이바지하게 되며, 또한 국내외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복지 사업을 지탱해 주고 다른 사람들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행동하면서도 초자연적 전망을 지니고 그같이 행동한다면, 우리는 참 하느님이시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모범을 단순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의 삶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보십시오. 여느 노동자들과 똑같이 남들의 주의를 끌지 않은 채 30년을 지내시면서, 마을에서는 목수의 아들로 알려졌습니다. 그분의 공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이하고 별난 행동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태도에는 유별난 것이 없었기에, 유다는 그분을 지목하려고 표시를 해야 했습니다.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마태 26,48). 예수님에게는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살다 가신 우리 주님의 행동 방식은 저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특별한 성소를 받은 요한 세례자는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솔기가 없는 헐렁한 통옷을 있으셨고,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마셨으며,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하셨고, 친구들이 제공하는 안식처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계를 위하여 목수 요셉의 곁에서 여러 해 동안 일하신 사실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그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제 충고는 아주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깨끗한 옷을 입고, 깨끗한 외모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깨끗한 영혼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 것들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신 주님조차도 그것들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을 넉넉하게 먹이신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2-13). 이 장면을 주의 깊게 묵상한다면, 여러분은 인색한 수전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우지만,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과 재화를 잘 관리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델이신 주님의 본보기를 따르면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내려놓음’이란 ‘자신에 대한 다스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소란스럽게 과시하는 빈곤도 아니고, 게으르게 내버려 두는 방관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동료들처럼 자신의 사회적 지위, 가정적 배경, 직업에 걸맞은 옷을 입으십시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으로 매력적인 모습을 열심히 보여 줌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십시오. 모든 일을 사치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장담하건대, 이 문제에서는 모자란 것보다는 넘치는 쪽으로 실수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옷을 어떻게 입으셨다고 생각합니까? 성모님께서 만들어 주셨을 솔기 없는 통옷을 입으신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습니까?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씻을 물을 제공받지 못하셔서 서운해 하신 예수님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주님께서는 사랑은 사소한 일에서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하시고자 시몬의 결례를 지적하셨을 것입니다(루카 7,36-50 참조). 그러나 그분은 또한 자신이 당시의 사회적 관습을 따르고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세상의 재화와 안락함을 내려놓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또한 괴상하고 유별나 보이는 일을 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충실한 관리자요 땅을 잘 다스리는 일꾼인지 알아볼 수 있는 표지 가운데 하나는 사물을 소중히 다루는 것입니다. 곧, 상태를 양호하게 유지하여 되도록 오랫동안 최대한 활용하며,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푸스데이 센터의 장식은 단순하고 매력적이며, 특히 깨끗합니다. 집이 가난하다고 해서 비속하거나 먼지로 뒤덮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의 재력이나 사회적 가정적 배경에 어울리게 귀중한 것들을 소유하고, 절제와 내려놓음의 정신으로 돌보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25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저는 한 자선 단체에서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를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날마다 음식이라고는 그곳에서 얻어먹는 것뿐인 가난한 걸인들을 위한 시설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친절한 부인들이 봉사하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식사가 끝난 다음, 더 많은 걸인들이 남은 음식을 해치우려고 오곤 하였습니다. 두 번째 그룹에서 특별한 관심을 끄는 걸인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 숟가락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꺼내 흐뭇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서둘러 자기 몫을 먹은 다음, 마치 ‘이건 내 거야!’라고 감탄하는 듯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그것을 여러 번 핥아 깨끗하게 한 뒤, 자신의 낡은 옷에 넣었습니다. 물론, 그 숟가락은 그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한 동료들 가운데 자신을 부자라고 여기는 매우 가엾은 걸인이었습니다.

그즈음에 저는 스페인 귀족 부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걸인이니 귀족이니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며,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장점과 단점을 지닌 나약한 피조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저버린다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우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뒤로는 민족, 언어, 인종, 빈부의 차별이 사라졌고,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제가 말한 귀족 부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저택에서 살았지만, 자신에게 쓰는 돈은 아주 적었고 자기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에게 넉넉한 대가를 지불하였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이 부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었던 엄청난 재화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가난하였고, 절제의 생활을 하였으며, 모든 것을 철저하게 내려놓았습니다. 분명하지 않습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만일 가난한 마음을 얻고 싶다면, 자신을 위해서는 아끼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충분히 넉넉해지십시오. 변덕이나 허영심 등에서 나오는 사치나 편안함을 위한 불필요한 지출은 피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을 생각해 내지 마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에서 배우십시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2-13). 우리 마음이 세상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사도처럼 영적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레고리오 성인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앙의 경기장에 들어간 우리는 모두 악령과 싸우게 됩니다. 악마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들과 싸울 때에는 우리도 맨몸으로 나가야 합니다. 만일 옷을 입은 사람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자와 싸운다면, 옷이 붙들려 금방 끌려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옷 종류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요구하신 ‘온전한 내려놓음’과 관련하여 특별히 중요한 측면, 곧 우리의 건강에 대해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은 대부분 젊습니다. 여러분은 넘치는 에너지로 인생의 화려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사정없이 흐르고,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게 됩니다.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마침내 노쇠해질 것입니다. 더욱이 언젠가 우리는 누구나 병에 걸리고 육체적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육체적으로 건강한 ‘좋은 시절’을 감사하게 여긴다면, 사람들이 나쁜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그러한 일들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세하게는 아니지만 간단하게나마 저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몸이 병들면 마음도 약해집니다. ‘저들은 나를 제대로 돌보아 주지 않는구나. 아무도 나를 배려해 주지 않아. 나는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어.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악마는 어느 각도에서나 우리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병들면, 악마는 일종의 정신병을 일으키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사람들을 멀리 떨어트리고 괴롭다는 생각이 들게 하며, 사람들이 초자연적 시각으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모아놓은 (자기 영혼을 위한) 귀중한 공로를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바라신다면, 우리가 구원의 십자가에 더욱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담금질을 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오랜 기간에 걸친 준비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날마다 자기 자신을 버리는 연습을 함으로써, 우리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에 질병과 불행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매일매일 기회를 활용하도록 합시다. 필요한 것들 없이도 지내보고, 자꾸만 찾아오는 작은 고통들도 감내하며, 자발적인 고행도 해 보고, 그리스도인 덕목들도 실천해 봅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묘한 가짜 문제들과 요구에 휘말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사기, 변덕, 편의주의, 게으름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빠른 걸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려면, 우리 앞길을 방해하는 장애물과 무거운 짐을 없애야 합니다. 세상 것들을 갖고 있으면 마음의 가난은 멀어집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것을 내려놓고,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헛된 망상에 속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여러분에게 무엇이 충분한지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바라지 마십시오. 적정선을 넘으면 마음의 편안함이 아니라 근심이 생깁니다. 그것은 당신을 드높게 해주기는커녕, 짓누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충고를 할 때에, 저는 예외적이거나 복잡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 종잇조각을 책갈피로 쓰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 종이에 하느님의 현존을 잊지 않게 도와주는 간절한 기도를 정성스럽게 쓰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그 보물을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결국 그 허접한 종이들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저의 부족한 점들을 낱낱이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도 저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기에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된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영적 지도자를 찾아가 상담을 받을 것을 권장하고 싶습니다. 때때로 최선의 치유책은 짧은 시간이나마 어떤 것 없이 지내는 작은 극기입니다. 또는 출퇴근 등 이동을 할 때에 가끔은 통상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절약한 돈으로 적은 금액이나마 자선을 베푸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여러분이 세상 것들을 내려놓을 마음을 참으로 지니고 있다면, 효과적이고 지나치게 야단스럽지 않은 방법을 찾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마음을 열어 고백하고 싶은 것 하나는, 제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저는 그것을 최고의 스승이신 분에게 배웠고, 그분의 모범을 참으로 충실하게 따르고 싶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과 부드러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복음사가는 그분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13,23)라고 묘사하지 않았을까요?

다음의 요한 복음 말씀을 되새기면서 강론을 마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1-3). 마리아는 지나친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통해서 크고 넓은 마음을 환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반면에, 유다 이스카리옷은 ‘저 비싼 향유를 저렇게 낭비하다니’ 하면서 한탄하였습니다. 그가 향유를 낭비한다고 생각한 것은 “삼백 데나리온”(요한 12,5)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내려놓음’은 우리를 하느님과 이웃에게 넓고 후한 마음을 갖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로 하여금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 데 적극적이고 지혜롭게 투신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과 가족을 위해 돈을 버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밝혔듯이, 그리스도인은 넓고 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 동시에 실제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신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 주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지고 있어서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았으면, 그들도 물질적인 것으로 성도들을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로마 15,26-27).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아무 대가 없이 내어놓는 이들을 색안경을 쓰고 보거나 못마땅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금전적인 면까지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2코린 9,7-8).

그리스도 예수님의 고난에 더욱더 가까이 동참하는 성주간 동안, 우리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신”(루카 2,19) 성모님처럼 될 수 있도록 복되신 어머니께 간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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