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일상생활의 풍요로움 (1960년 3월 11일 강론)

아주 오래전 일이 생각납니다. 제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카스티야(스페인 중부의 고원지대)에 있는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때 멀리 들판에서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그 장면이 당시 저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고, 그 뒤로도 자주 제 기도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몇몇 사람이 큰 망치로 땅에 나무 말뚝들을 박고 있었는데, 그 말뚝들에 그물을 걸어 양 우리를 만드는 것이었죠. 그다음에 목자들은 자신의 양들과 함께 와서, 양들의 이름을 불렀고, 그러자 양들이 하나하나 우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양들은 우리 안에서 모두 함께 있으면서 편안하고 안전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그 당시의 목자들과 양 우리를 떠올립니다. 왜냐하면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많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주님의 양 우리에 불리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 주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어 하는지, 얼마나 그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양들과 함께 있는 모습은 저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는 성당에 그 장면을 그려 넣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도 예수님의 말씀, 곧 “cognosco oves meas et cognoscunt me meae.”(요한 10,14: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를 새겨 넣어, 하느님의 현존을 일깨워주도록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분께서 마치 목자가 양 떼에게 하는 것처럼,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꾸짖으시고 훈육하시고 가르치신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줍니다(집회 18,13: “그분께서는 그들을 꾸짖고 훈육하고 가르치시며 목자처럼 당신 양 떼를 돌아오게 하신다.”). 제가 떠올린 카스티야의 장면은 이러한 의미와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의 가족에 속해 있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우리가 선택을 받은 것은 우리 주님의 호의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선택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명백한 목표를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성화’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시듯,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 4,5). 그러므로 잊지 맙시다. 우리는 이 목표를 달성하려고 우리 주님의 양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결코 잊지 못할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발렌시아에 있는 주교좌성당에 기도하러 가서 가경자 요한 리다우라의 무덤 옆을 지날 때였습니다. 제가 듣기로, 이 사제는 이미 여러 해 전에, 얼마나 오래 사셨냐는 질문을 받고 아주 자신 있게 발렌시아 사투리로 “아주 조금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섬기는 데 쓴 시간은 아주 조금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여기 있는 많은 분들에게,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의 직업과 업무에서 주님을 가까이 따르고 섬기기로 결심한 해를 헤아리는 데 한쪽 손의 다섯 손가락도 여전히 충분하지는 않은가요? 얼마나 오래 사는가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초대를 영혼에 깊이 새기고 그 확신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거룩함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적 생활을 바르게 연마하여 그리스도인 덕목들을 날마다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무를 간신히 이행하거나, 평균적으로 이행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뛰어난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가장 엄격하고 정확한 의미에서, 영웅적 실천을 목표로 싸워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 제시하는 목표는, 아니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정해 놓으신 목표는 환상에 불과하거나 달성이 불가능한 이상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 같은 보통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구체적 본보기를 찾아 여러분에게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아주 평범한 교차로처럼 보이는 곳에서 “남몰래”(요한 7,10)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집니다(마태 16,24 참조). 우리 시대와 같이 전반적으로 타락한 시대, 타협과 좌절의 시대, 또한 방종과 무질서의 시대에는, 제가 사제 직무를 시작할 때부터 계속 지녔던 단순하지만 깊은 확신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확신 때문에 저는 불타는 열망, 곧 모든 인류에게 “이 세상의 위기는 성인들의 위기”라고 말하고 싶은 열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내적 생활, 우리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네시는 부르심에 응답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수염의 마지막까지(모든 면에서)’ 참으로 순수한, 시성될 수 있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분이시고 유일하신 스승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세우시고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일상의 세계에서 성덕을 위하여 투쟁하라는 뜻이며, 또한 사도직을 수행할 의무를 내리시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는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 당연히 다른 영혼들에 대한 관심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무언가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을 발견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에 관하여 말하고 싶어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따라 주님의 길을 가기를 원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집회나 목욕탕에 가다가 시간 여유가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에게 함께 가자고 초대합니다. 이 인간적 행위를 영적 영역에도 적용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을 향하여 갈 때에, 혼자서 가지 마십시오.”

만일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또는 상황의 어려움에 관한 변명을 늘어놓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언제나 어려움이 있었으므로―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동료 이웃을 끌어들이는 것의 성공 여부는 대개 우리 자신이 어떤 내적 생활을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성인이 되어야만,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실제로 성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충실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의 사도적 노력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하느님과 동료 이웃들은 모두 우리에게 변함없는 충실성을 요구합니다. 말 그대로 진정한 충실성, 미봉책이나 타협이 아닌 자세한 부분까지 한결같은 충실성,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기쁘게 실천하는 완전한 충실성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제가 선택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겁을 먹지도 말고 마음을 느슨하게 갖지도 맙시다.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그 대신에, 하느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또 하나의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이 되도록 촉구하고 계심을 느끼십시오. 간단히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행동이 우리 신앙의 요구에 걸맞아야 한다고 촉구하십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거룩함은 2류 성덕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또 우리의 본성에 참으로 어울리는 핵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콜로 3,14). 우리 주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그대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성덕의 모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고 저 높은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룩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맙시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이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 가운데 한 분은 하느님과의 일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자라는 모든 것은 작게 시작합니다. 그것이 점차 크게 자라는 것은 꾸준히 계속해서 영양분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비록 여러분이 종종 자기 자신을 극복하거나 나약한 몸으로 저 높은 곳에 계속 오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성덕은 여러분의 노동과 일상 의무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으며, 이것들은 거의 언제나 사소한 현실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경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알퐁스 도데의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에 나오는 것처럼 헛되고 유치한 꿈을 계속 꿉니다. 자기 집의 복도에서 실제로는 쥐들밖에 만나지 못하는데도 사자 사냥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저는 여러분이 평범한 일상의 의무들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하느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벌이는 일상의 투쟁들은 우리 주님께 충만한 기쁨을 드립니다. 오직 우리 주님과 우리 각자만이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휴식을 취하면 휘황찬란한 기회들에 현혹되는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실제로 그런 기회들은 거의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여러분을 둘러싼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보여 드릴 기회는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사소한 일들에서도 영혼의 위대함이 똑같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창조주께서 하늘과 땅, 태양과 바다, 코끼리, 낙타, 말, 황소, 표범, 곰, 사자를 만드신 데 대해서도 흠숭을 드리지만, 또한 개미, 모기, 파리, 벌레 같은 작은 피조물, 모양은 알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것들을 지으신 데 대해서도 같은 흠숭을 드립니다. 크건 작건 모든 피조물에 배인 창조주의 솜씨를 찬미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 봉헌된 사람은 거창한 일뿐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똑같이 열심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곧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 하신 말씀을 묵상할 때에, 우리는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 곧 ‘성화’를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거룩해지게 하려고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미묘한 유혹처럼 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 신성한 초대를 참으로 마음에 받아들인 사람은 아주 소수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보다시피, 우리는 도구로 쓰이기에 거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 소수입니다. 우리 자신도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확고한 말씀, 권위에 찬 말씀이 메아리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요 누룩입니다. 그리고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갈라 5,9). 우리가 각각의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언제나 가르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백이면 백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구속하셨고, 당신의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시고자 적은 수의 보잘것없는 우리를 활용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느 누구도 나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해야 하지만, 그 잘못을 고쳐 줄 때에는 친절하게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을 도울 수도, 거룩하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법을, 서로 이해하는 법을, 관대하게 넘어가 주는 법을, 형제자매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놓으십시오. 그러면 사랑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터, 가정, 사회생활에서 조성되는 매우 우울한 상황에서조차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극히 하찮은 기회조차도 놓치지 않고 활용하여 우리 자신을 성화하고, 공동 구속 활동을 달콤하고 고무적인 과제로 인식하며 우리와 함께 날마다 같은 고민을 나누는 사람들을 성화해야 합니다.

여러 해 전의 이야기지만 오늘날에도 참으로 적절한 한 말씀으로써 이 대화를 계속하고자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나가는 모든 것, 하느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혼이 목표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도록 하느님께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온갖 평온과 평화를 잃게 되는 이유를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휴식 또는 여가 시간에도 초자연적 전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휴식과 여가가 일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직업에서 최고 위치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또 세상사에서 자유로운 선택과 노력의 보상으로서 최고의 칭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모든 인간적 활동에 생기를 주는 초자연적 전망을 잃는다면, 안타깝게도 그릇된 길로 빠질 것입니다.

여담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지금까지 말해 온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저를 찾아온 어느 누구에게도 정치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제가 지향하는 것은, 거룩한 교회를 섬기고자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힘입어 저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오푸스데이에 관한 기본적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교도권이 설정한 것 외에는 아무런 규제 없이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사안에 참여하는 데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고 그에 따른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제가 걱정하는 유일한 것은, 여러분이 그 한계를 넘어 신앙에 명백히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으로부터 여러분을 이탈시키지 않는 한, 여러분의 의견은 마땅히 존중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얻어내신 자유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갈라 5,1). 또한 그들은 극단적 분파들로서, 자신들의 세속적 견해를 교의로 둔갑시키려는 자들 또는 신앙의 가치를 부인하고 중대한 오류들에 휘둘려 사람을 타락시키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주제로 되돌아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비록 여러분이 사회에서, 공적 업무에서, 자신의 직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만일 영적 생활을 소홀히 하고 우리 주님을 무시하면, 결국 완전한 실패로 끝나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한, 그리고 참으로 중요한 최종 분석에서, 승리는 오직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올 것입니다. 어정쩡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마땅히 아주 행복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불안과 고통을 겪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행복에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자기 영혼을 할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쓸개즙보다 더 쓴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하고, 그분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그분의 왕국을 온 인류에게로 확장해 가려고 참으로 노력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가톨릭 신자는 저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그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도록 세례로써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오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만 기도하는 종교심, 형식적인 신앙심으로 자신의 양심을 싸늘하게 합니다. 그는 의무 축일에는 대개 미사에 가지만, 자신의 위장을 꼼꼼히 챙기며 결코 식사를 거르지 않습니다. 그는 신앙 문제들에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기보다는 콩 접시와 신앙을 맞바꿉니다. … 그러고는 무례하거나 가증스럽게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데 힘입어 세상의 성공을 추구합니다. 안 됩니다! 단지 신자라는 꼬리표만 붙이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참되고 확고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알맞은 영적 음식을 찾는 일에 꾸준히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경험하였을 수도 있고, 또 제가 종종 여러분이 낙담하지 않도록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내적 생활은 날마다 거듭거듭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저도 알다시피, 내적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인데(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면서 저도 제 영혼이 우리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 필요성을 되새깁니다.), 여러분도 양심 성찰을 할 때에, 종종 작은 실패들이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때때는 그러한 실패들이 아주 심각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도 부족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도 못하고 희생정신과 자기 연마도 무척이나 미흡해 보일 것입니다. 이제 진실한 통회 행위로써 보속의 정신을 키우고자 하는 열망을 키우십시오. 그러나 마음의 평화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1940년대 초반에 저는 매우 자주 발렌시아로 가곤 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인간적으로 볼 때에 가진 것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지금의 여러분처럼, 이 빈털터리 사제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과 더불어 황량한 물가에서 오후에 가능한 곳에서는 어디서든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주님의 첫 번째 친구처럼 말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성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와 자신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티로를 떠날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인들과 아이들과 함께 우리를 도시 밖까지 배웅하였다. 이윽고 바닷가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사도 21,5).

자, 때는 늦은 오후였습니다. 발렌시아의 아름다운 석양이 지는 가운데, 배 한 척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화강암처럼 강인하고 거무스레 보이는 어떤 사람들이 배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들은 웃옷을 벗고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는데, 마치 청동 인간처럼 살갗이 햇볕과 바람에 그을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 뒤편에 매달린 그물을 끌어당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은빛 찬란한 물고기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이 놀라운 힘으로 그물을 당기자 그들의 발은 모래에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역시 햇볕에 그을린 어린이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 아이는 작은 손으로 밧줄을 붙잡고, 무척 어색한 몸짓으로 밧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어부들은 그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움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이 어린이를 쫓아버리지 않고 함께 밧줄을 당기도록 해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저 자신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밧줄을, 그리고 많은 것들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어린이처럼 비록 나약하지만 우리 주 하느님의 계획에 따를 준비를 하고 그분 앞에 나선다면, 우리는 훨씬 더 쉽게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물고기가 가득 찬 그물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하느님의 힘이 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에 따르는 의무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의무들은 여러분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성덕에 이르게 인도해 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앞에 놓인 온갖 어려움들에 관하여 미리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여정의 시작부터 그러한 어려움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영적 지도자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에게 여러분의 모든 거룩한 열망, 여러분의 내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상적인 문제들, 실패와 성공에 관하여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를 받을 때는 솔직해지십시오.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지도자에게 열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이 곧고 평탄한 길이 가시밭길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사소했던 것들이 끝에 가서는 올가미처럼 목을 조를 것입니다. “길을 잃은 사람이 갑작스러운 악재 때문에 희생자가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거나 장기간 자신의 영혼을 등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견실했던 그의 덕행들은 서서히 사라져 갔고, 반면에 그의 악덕들은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서, 결국은 비참한 추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 집은 예기치 못한 어떤 사고로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은 토대부터 잘못이 있었거나, 거주자들이 오랫동안 무관심하여 처음에는 사소했던 결함들이 끝에 가서는 견고한 구조물을 부식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폭풍이 몰려오거나 폭우가 내리면, 집은 폭삭 무너질 수밖에 없고, 이로써 오랫동안 무관심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보러 갔던 집시의 이야기를 기억합니까? 이것은 다만 이야기요 농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백 내용을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는 집시들에 대해서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가엾은 사람! 그 집시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몹시 죄송해하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제가 고삐를 하나 훔쳤습니다.” 그 정도라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고삐에는 노새가 매여 있었습니다. … 그리고 또 고삐 하나에 노새 한 마리, … 또 고삐 하나에 노새 한 마리가 매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스물을 헤아렸습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우리가 항복하여 고삐를 훔치게 되면, 나머지도 따라옵니다. 악한 성향들이 줄줄이 따르고, 비참함과 타락과 수치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매서운 말이었는데, 결국은 서로 차갑게 대하는 관계가 되고, 냉랭한 무관심 속에서 살게 됩니다.

“여우들을 잡아라, 저 작은 여우들을. 우리 포도밭을, 꽃이 한창인 우리 포도밭을 망치는 저것들을”(아가 2,15). 작은 일에도 모두 충실하고 또 충실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면, 성모 마리아의 두 팔을 향하여 자녀답게 달려가는 것 또한 배울 것입니다. 처음부터 여러분에게 상기시켰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아주 어립니다. 우리의 나이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로 결심한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참하고 나약하지만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위대함과 거룩한 순결 안에서 강한 힘을 찾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실화인데,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그 내용도 여러분의 성찰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여러 교구에서 오신 사제들에게 피정 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었던 저는 친구처럼 함께 이야기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자고 초대하였습니다. 우리 사제들도 형제적 도움과 조언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가운데 한 사제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태도가 다소 거칠었지만 정직하고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마음 안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상처라도 치유해 보고자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그의 내면의 것을 끌어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갑자기 그는 이런 말로 저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제 당나귀가 몹시도 부럽습니다. 그 녀석은 일곱 본당에서 일해 왔지만, 그 녀석에 대해서는 전혀 나쁘게 말하지 않습니다. 저한테도 그러면 참 좋을 텐데요!”

이제 진지하게 양심 성찰을 해보도록 합시다. 아마도 여러분이나 저는 그 시골 사제가 자신의 당나귀에 대해 보낸 찬사를 받을 자격은 없을 듯합니다. 우리는 아주 열심히 일하였고,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자신의 분야에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어떤가요? 후회할 만한 일은 없나요? 참으로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기려고 열심히 노력했나요?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이기적인 계획과 개인적 영광과 야망을 추구하며 조만간 사라질 세속적 성공을 쫓아다닌 것은 아닌가요?

제가 다소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저 자신도 다시 한 번 성실한 참회를 해보려는 것이고, 또 여러분도 각자 그렇게 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몸소 경험한 불성실함, 수많은 잘못, 나약함, 비겁함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참회의 기도를 바칩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저는 한 말씀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고 계십니다. 저는 제 비참한 처지 덕분에 저의 힘이신 주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당신은 제 피신처’(시편 42,2)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출발합시다.

내적 생활. 일상적인 일들에서의 거룩함, 우리가 행하는 사소한 일들에서의 거룩함, 우리 직업에서의 거룩함, 세속 안에서의 거룩함, … 이러한 거룩함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친구 하나는 한 가지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제가 알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높이 날고 있었지만, 비행기 안, 객실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행기 밖 날개 위에 있었습니다. 가엾은 친구, 그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 높이 날아오르려고는 하지만 아무런 내적 생활 없이 살거나 내적 생활을 등한시하는 영혼들이 직면하는 불안과 위험을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듯합니다. 그들은 걱정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고, 끊임없는 사고의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활동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잃을 위험이 심각하게 존재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기도 생활, 자아 포기 등의 내적 생활 없이는 확고한 신앙심을 지닐 수 없습니다. 자주 성체를 받아 모시고, 묵상과 양심 성찰, 영적 독서를 계속하며, 성모님과 수호천사들에게 끊임없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은 기쁨에 가득 찬 것이 되고, 벌집에서 꿀이 나오듯 숨어 있는 보물창고에서 하느님의 달콤함과 기쁨이 넘쳐 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내적 생활, 외적 행동,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가 하는 일들에서, 우리 각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하느님과 대화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대개 우리 귀에 들리게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우리가 크고 작은 의무를 수행하려고 결심하고 정성을 쏟을 때에 틀림없이 우리와 함께 하십시다. 그러한 인내가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로 베푸신 귀중한 자원들을 낭비하지 않아야만,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에페 4,13).

스페인 내전 동안, 저는 사제로서 전선의 많은 젊은이들을 돌보려고 많은 여행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테루엘 근처의 참호에서 저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한 젊은 병사가 다른 병사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는데, 화제에 오른 그 병사는 결단력이 부족하고 의지력이 약하며 일관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말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성인이 되려고 노력한다면서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무척 슬플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때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끊임없는 사랑과 애착을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의 행동이 그러하다면, 여러분이나 저나 일관성 없는 그리스도인에 불과합니다.

비록 우리가 많은 실패를 경험하였더라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성덕을 이루겠다는 불타는 열망, 강렬한 열정이 뿌리내리도록 합시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적 생활의 발전이 있을수록,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은총은 마치 우리 안에서 돋보기처럼 작용합니다. 아주 작은 먼지나 거의 보이지도 않는 모래 알갱이도 무한히 크게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총을 통해 영혼이 거룩한 감수성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극히 희미한 어둠에서도 양심은 고통스러워하며, 오직 지극히 맑으신 하느님 안에서만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바칩시다. “주님, 저는 참으로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참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을 갖추고 무조건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진 위대한 이상을 날마다 새롭게 확고히 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오, 예수님, 당신의 사랑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 우리들이 참으로 인내롭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영혼에게 일깨워 주신 그 열망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끔 자문해 보십시오. ‘도대체 나는 왜 이 땅에 살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여러분의 일상 과제를 사소한 데까지 완벽하고 성실하게 끝마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성인들의 모범을 뒤따릅시다. 그분들은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를 지닌 사람들로서 실패도 하고 나약함도 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이기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꽃 한 송이 한 송이에서 꿀을 모으는 벌들처럼, 성인들의 삶을 연구하고 그분들의 투쟁에서 하나하나 배우도록 합시다. 여러분과 저는 또한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수많은 덕행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고생과 자아 포기, 또 그들의 기쁨을 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점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아야 합니다. 형제적인 충고가 필요할 때에,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에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처럼 저도 고깃배와 그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복음 장면들에서 명확하고 확고한 결심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카 성인은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던 어부들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들이 있는 쪽으로 오시어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의 배에 오르시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여러분은 삶을 복잡하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불평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 하시려 정답고 사랑스럽게 우리가 가는 길에 끼어드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서 군중을 가르치신 다음,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어부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으며, 그 결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러하였듯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던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0-11).

여러분의 배, 곧 여러분의 재능, 희망, 업적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오르시도록 해 드리지 않는다면, 또 그분의 손 안에 놓여 있지 않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배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배에 그리스도께서 안 계시고 여러분 혼자 있다면, 여러분은 곧바로 난파의 위험에 떨어질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선장으로 계실 때에만, 여러분의 삶은 폭풍우와 암초에서 안전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 안에 두십시오.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이 상상했던 용맹한 모험, 커다란 인간적 야망, 고상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통해서 지나가게 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조만간 여러분의 이기심과 더불어 저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배를 하느님께서 지휘하시는 데 동의한다면, 만일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주인이 되시는 데 동의한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안전하겠습니까? 그분께서 가 버리신 것처럼 보여도, 그분께서 주무시는 것처럼 보여도, 그분께서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여도, 비록 폭풍이 일고 주위가 온통 칠흑같이 어두워져도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마르코 성인은 그러한 상황에 놓인 사도들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마르 6,48, 50-51).

친애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수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 저는 여러분에게 많은 영혼들의 슬픔, 고통, 학대, 글자 그대로의 순교, 영웅적 행위들에 관하여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주님께서 잠들어 계시고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루카 성인은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돌보시는지 보여 줍니다. “그들이 배를 저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때에 돌풍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 들어와 그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루카 8,23-25).

만일 우리가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린다면, 그분도 우리에게 자신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그분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주님께서 배의 주인이심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뜻대로 하시기를 바란다는 것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성모님께 전구를 간청하면서, 이러한 결심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희망으로 견딥시다. 예수님께 아주 가까이 붙어 있읍시다. 참으로, 참으로, 참으로 그분을 사랑합시다. 열심히 살고, 사랑의 모험을 즐깁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 안에,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초라한 배에 오르시어, 주님이요 스승으로서 우리 영혼을 소유하시도록 합시다. 우리를 믿음의 생활로 불러 주신 주님과 언제나 밤낮으로 함께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성실하게 보여 드리도록 합시다. “저를 부르셨기에, 저 여기 있습니다”(1사무 3,9).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부르심에 이끌려, 오직 그분의 울타리 안에서만 이제와 영원히 참된 행복을 발견하리라 확신하며 그곳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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