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1954년 4월 16일 강론)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부르시어 당신과 같아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그리스도께서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속량되었습니다(1베드 1,18-19 참조).

이 진리에 관하여 묵상을 하던 중,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직전에 주님과 사도들이 나눈 대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눈을 들어 그들을 보신 주님께서 필립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필립보는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그들에게는 그만큼의 돈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이라고는 필요량보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분량이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8-9)

우리는 주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기를 갈망합니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우리는 몇 명이지?’ 전 세계 인구에 견준다면, 수백만 명도 적은 수입니다. 그러므로 누룩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온 인류에게 선익을 베풀려고 미리 준비하고 있으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5,6) 우리는 누룩이 되어, 군중을 변화시키고 변형시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누룩이 본성적으로 반죽보다 더 낫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룩은 반죽을 부풀게 하고 반죽이 영양가 있는 좋은 음식이 되게 합니다.

누구나 즐기는 간단하고 필수적인 음식인 빵이 만들어질 때 누룩이 하는 역할에 관하여 상식적인 선에서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지역에서 (여러분 자신도 보았을 것입니다만) 빵을 만드는 과정은, 여러분이 거의 눈으로 맛볼 수 있을 만큼 놀라운 식품을 생산해 내는 생생한 예식과도 같습니다.

시작은 되도록 최상품의 질 좋은 밀가루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밀가루를 반죽통에 넣고 효모를 섞습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이제 반죽이 쉬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누룩이 제대로 작용하여 반죽을 부풀게 하려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오븐이 준비되고 장작이 활활 타면서 온도를 높입니다. 부풀어 오른 반죽을 뜨거운 오븐 안에 넣어 익히면 신기하게도 부드럽고 신선한 고급 빵이 됩니다. 적은 양이지만 누룩이 다른 식재료 속으로 숨어 들어가 제 역할을 하고 사라지지 않았다면, 이 빵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룩과 반죽에 관한 바오로 성인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면, 모든 영혼을 위하여 일하고 봉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 밖의 것은 모두 이기심의 발로입니다. 만일 우리가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본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선물과 더불어 수많은 재능과 자질도 주셨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대량생산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창조하셨고, 당신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 재능과 자질들을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쓰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받은 선물들을 도구로 활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제발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열망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여분이나 가장자리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룩이 발효에 쓰이지 않는다면, 부패하고 맙니다. 누룩이 사라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반죽에 생명을 주고 사라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심과 쓸모없음을 스스로 입증하며 버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린다고 해서 예수님께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이제 내가 많은 어부들을 보내어 그들을 잡아 올리겠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6,16). 우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위대한 일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가 대화할 때, 또는 책에서 이 세상을 종종 바다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아주 좋은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도 바다처럼 잔잔한 때와 폭풍이 부는 때, 고요한 시기와 세찬 바람이 몰려오는 시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성난 파도 한가운데서 힘겹게 헤엄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날씨에 여행을 하고 있으며, 겉보기에는 쾌활하고 활기가 넘쳐도 실제 그들의 여정은 우울합니다. 그들이 터트리는 함박웃음은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은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삶에는 사랑도 이해도 없습니다. 물고기들처럼 사람들도 서로 잡아먹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할 일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하느님의 그물로 들어가도록, 서로 사랑하도록 안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레미야 예언자가 묘사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종종 사용하신 비유적 표현인 ‘어부’가 되려고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우리 주님과 동행하여 그분께서 사람 낚는 거룩한 활동을 하시는 모습을 봅시다. 우리는 겐네사렛 호숫가의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군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루카 5,1) 그분께 몰려듭니다. 마치 그들이 지금 주님께 몰려드는 듯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보이지 않나요? 그들은 비록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느님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잊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종교를 이상한 것으로 여기면서 그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영혼에게나 선택의 때가 조만간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상한 설명들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사기꾼 예언자들의 거짓말은 더 이상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비록 그때에는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으로 자신들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루카 성인의 묘사를 살펴봅시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루카 5,2-3).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리스도는 배의 주인이십니다. 고기를 잡으려고 준비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형제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도직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서투름과 믿음 부족이 일에 방해가 됩니다.

“시몬이 대답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 매우 사리에 맞는 대답입니다. 보통은 밤 시간이 고기 잡기에 좋은 때인데, 이번에는 허탕이었습니다. 낮 시간에 하는 고기잡이의 요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그는 그리스도의 제안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의존하여 일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루카 5,6-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바다로 나가셨을 때, 단지 고기를 잡는 것만 생각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말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8.10)라고 이르십니다. 이제 새롭게 사람을 낚는 일에 하느님의 모든 능력과 효력이 함께할 것입니다. 사도들은 인간적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놀라운 위업을 위한 도구로 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성인이 되려고 분투한다면, 우리 각자가 처한 세상 상황에서 자신의 일과 직업을 통하여, 일상생활 안에서 기적을, 필요하다면 지극히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로 하느님께서 쓰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눈먼 사람을 보게 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으나 시력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찬란한 빛을 받게 된 수많은 사례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예전에는 듣지도 전하지도 못하는 귀머거리, 벙어리였던 사람들의 사례를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감각은 정화되었고, 이제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서 듣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사도 3,6) 사도들은 예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불구자, 달리 표현해서 해야 할 일은 알지만 실천하지 않았던 사람을 걸어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또 다른 사람은 죽어서 썩고 있었고, 시체에게서 나는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나인 고을에서 과부의 아들에게 일어난 기적처럼, 그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그분의 첫 제자들이 한 것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러한 기적의 수혜자들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눈이 멀었거나, 귀가 들리지 않았거나, 몸이 마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죽음의 악취를 풍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절망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분을 진심으로 따른다면, 더 이상 자신을 추구하지 않고 그분만을 찾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자유롭게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초자연적이고 인간적인 그러한 기회에 관하여 저는 끊임없이 가르쳐 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교회 교부들의 저술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고하여 그들 마음에서 악을 뽑아낼 때에 그들을 뱀에게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웃이 그의 선한 일에 손을 흔드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수많은 방법으로 도움을 베풀며 그들의 모범으로 이웃에게 힘을 불어넣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이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 육신이 아니라 영혼에 생명을 준다면 더욱 위대합니다. 여러분도 약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러한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에게 이것은 초대인 동시에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교회는 소수 특권층을 위한 피신처가 아닙니다. “누가 위대한 교회를 이 땅의 작은 부분일 뿐이라고 말합니까? 위대한 교회는 온 세상입니다.” 이렇게 묘사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또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가든지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계십니다. 여러분의 유산이 땅끝까지 펼쳐 있으니, 그것을 차지하십시오.” 그물을 기억합니까? 거기에는 물고기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집이 가득 차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루카 14,23 참조). 그분은 아버지시며, 모든 자녀에게 둘러싸여 살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뒤에 있었던 두 번째 고기 잡는 장면으로 갑시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베드로는 나중에 슬피 울었습니다. 수탉 울음소리를 듣고 그는 주님의 예언을 상기하였으며, 마음을 다하여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는 뉘우치며 주님 부활의 약속을 기다렸고, 그의 일상, 곧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이 고기 잡는 일과 관련하여, 우리는 종종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아들들이 왜 우리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기 전의 직업으로 되돌아갔는지 질문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사도들이 고기 잡는 일을 한 것에 놀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사도들이 자기 직업에 종사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 아니었으며 합당하고 정직한 일이었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서 불타는 사도적 관심은 자신들의 일상생활에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에 필연적으로 속한 부분이며,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동료, 친구, 친척과 더불어 서로 관심사를 나누며 함께 일하는 가운데, 물가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리스도께로 그들이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사도가 되기 전에 우리는 어부입니다. 사도가 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부입니다. 사도가 되기 이전이건 이후건 직업은 동일합니다.

바뀐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변화는 우리 영혼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것처럼 우리 영혼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더 넓은 시야를 지니게 됩니다. 더욱 봉사하려고 하고,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해 주신 놀라운 일들, 곧 “하느님의 위업”(사도 2,11)에 관하여 모든 피조물에게 말하고 싶은 열망이 강렬하게 솟구칩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제의 성무 활동은 거룩하고 공적인 직무이며 또한 사제의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전인적이고 매우 힘든 책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사제가 엄밀하게 사제스럽지 않은 어떤 일에 시간을 할애한다면, 그는 자신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요한 21,2-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 가까이, 그리고 자신을 봉헌한 영혼들 가까이 지나가십니다.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까이뿐 아니라 우리 안에도 계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 가까이 계시는데도, 우리는 그분께 애정 담긴 눈길, 따뜻한 말 한마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행동을 봉헌하지 못합니다.

요한 성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셨다”(요한 21,4-5). 저는 이 친밀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에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이미 영광스러운 몸을 지니신 분, 저의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6). 이제 그들은 이해합니다. 그 제자들은 예전에 스승님께 그토록 자주 들었던 말씀, 곧 사람 낚는 어부, 사도라는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그들의 사람 낚는 일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스승님이시기에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21,7). 사랑은 멀리 봅니다. 사랑은 맨 먼저 친절을 알아봅니다. 젊은 사도는 예수님께 깊고 확고한 애정을 느꼈고 지극히 순수하고 부드럽고 깨끗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요한 21,7). 베드로는 믿음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그는 경이로운 두려움으로 가득 차 호수로 뛰어듭니다. 요한의 사랑과 베드로의 믿음이 있다면, 그 무엇이 우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요한 21,8). 그들은 그물을 끌고 오자마자 주님 발아래 놓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영혼들은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영혼들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을 선포하고 전달하는 교회의 사도직은 어떠한 인간의 특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의 배반에 대한 참회의 기회를 세 번 주시는 듯이, 세 번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비참한 경험을 통하여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하고는, 경솔하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리스도의 손에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7). 그리스도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베드로야, 너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그분께서 창조하셨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 피의 값으로 각각의 영혼을 모두 사셨습니다.

5세기에 도나투스파는 가톨릭 신자들을 조직적으로 공격할 때,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예전에 큰 죄인이었으므로 진리를 선언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신앙의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가톨릭 교회의 주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있으며, 그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설명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나는 좋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만났습니다. 만일 그가 나쁜 사람이라면, 그는 그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좋은 사람일지라도, 내가 그 사람을 신뢰하는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가톨릭 교회에서 배운 첫 번째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희망을 두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바라시고, 우리에게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잘못은 우리의 것이고, 열매는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과 가르침으로 일러주신 대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삶과 모범으로 사도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참 신앙은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참된 것인지 보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행동을 성찰해 봅시다. 만일 우리가 입으로 가르치는 것을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충실한 신자가 아닙니다.

이 좋은 기회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놀라운 사도적 열정을 증명하는 한 가지 사건을 떠올리며 성찰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그분의 명성이 이미 수많은 도시와 마을에 퍼진 지 사반세기도 되기 전이었습니다.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사도 18,24-25).

그리스도의 빛이 희미하게나마 벌써 이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우리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갈 길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가 더욱 온전한 신앙을 얻고 우리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기를 바란다면, 더 많은 것을 배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 부부인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는 그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거나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 그를 가르치는 일은 우리와는 상관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열심히 사도직을 수행하는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폴로에게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습니다”(사도 18,26).

그다음에 바오로 성인이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다가 감옥에 갇혀서도, 복음을 선포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페스투스와 아그리파스 앞에서도 용맹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이날까지 이렇게 서서 낮은 사람에게나 높은 사람에게나 증언하고 있는데, 예언자들과 모세가 앞으로 일어나리라고 이야기한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곧 메시아께서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첫 번째 분으로서 이 백성과 다른 민족들에게 빛을 선포하시리라는 것입니다”(사도 26,22-23).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신앙에 관하여 침묵하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도로서 열정적으로 선교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박해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구원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담대하게 그는 아그리파스에게 묻습니다. “아그리파스 임금님, 예언자들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압니다”(사도 26,27). “아그리파스가 바오로에게, ‘당신은 조금 있으면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게 만들겠군.’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바오로가 대답하였다. ‘조금 있든 오래 있든, 나는 임금님만이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이들이 이 사슬만 빼고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느님께 기도합니다’”(사도 26,28-29).

바오로 성인의 모든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하느님께서 주신 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 덕분에 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삶이 아니라면, 그러한 삶에 확고한 중심과 토대를 두는 사도직이 아니라면, 그러한 활동에서 초자연적 결실을 거두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터, 우리의 가정, 우리가 사는 거리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크고 작은 온갖 문제에서 도망치지 말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고정시키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말과 행동, 심지어 결점들까지도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를 발산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야.”

만일 여러분이 ‘누가 나에게 그러한 사도직에 동참하라고 말하겠는가?’ 하고 의심을 품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고, 부탁하십니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쉬운 길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런 일에는 서투릅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 분야가 아닙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일에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일에서 도망친다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간청은 각각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이, 건강, 직업 등 어떠한 이유로도 자신을 변명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직의 열매를 맺든지, 아니면 자신의 쓸모없는 신앙을 입증할 따름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에 관하여 널리 전할 때에 어떤 비범하고 특별한 일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단지 평범하게 살며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십시오. 여러분의 생활 신분에 따른 의무를 이행하려고 힘쓰고, 여러분의 일과 직업에서 날마다 점점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충실하게 살아가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십시오. 고행과 극기를 하면서도 쾌활한 모습을 간직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사도직일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기에,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오는 이유를 모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아주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예컨대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나 가족 모임에서, 버스에서,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어디서나 그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누구나 영혼 속 깊은 데서 느끼는 갈망 같은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진지하게 찾기 시작할 때, 그들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의 모후이신 마리아께 당신 아드님의 성심을 가득 채운 열망, 곧 씨를 뿌리고 사람을 낚으려는 열망에 여러분이 동참하려는 굳은 결심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하십시오. 여러분에게 확언하건대, 만일 여러분이 시작하기만 한다면, 갈릴래아의 어부들이 했던 것처럼 배가 가득 차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물가에서 여러분을 기다리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물고기들은 모두 그분께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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