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하느님의 선물인 자유 (1956년 4월 10일 강론)

저는 가끔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 위에서 군중을 가르치신 감동적인 복음서 장면을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영혼들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셨고, 이제 이 위대한 스승께서는 제자들이 그 열정을 본받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라.”(루카 5,4)는 말씀에 이어,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배울 것이 많이 있지만, 지금 그 자세한 내용을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가 기적을 체험하고 보인 반응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그의 말은 진실이고, 또한 우리 각자에게도 꼭 들어맞는 말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단언하건대, 저는 살면서 사람의 손을 통해 이루어진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의 역사를 수없이 많이 목격하였고, 날마다 감동하여 외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없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저는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마치 자유에 대한 아름다운 찬가로 들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없이 여러분을 창조하셨지만, 여러분 없이 여러분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여러분이나 저나 우리는 모두 불행히도 하느님을 거슬러 들고 일어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아마도 행동으로) 그분을 거부하거나,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루카 19,14)라고 소리 지를 가능성을 언제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서 무로부터 창조되었음을 배웠고, 우리가 행복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가끔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기는 하지만 이성을 지닌 피조물인 우리 인간뿐 아니라, 지구 표면이나 깊은 땅속이나 푸른 하늘을 누비는 비이성적 존재들도 창조하셨습니다. 태양을 향하여 높이 치솟는 피조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놀랍고 다양한 피조물 가운데, (천사들은 별도로 하고) 오직 우리 인간만이 자유의지로써 자신을 창조주와 결합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그분께 드릴 수도 있고, 반대로 그분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인간의 자유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시고, 선을 선택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참으로 부드럽습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5-16.19).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저도 양심 성찰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확고하게 흔들림 없이 생명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성덕에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때에, 기꺼이 ‘예’라고 대답합니까? 팔레스티나의 도시와 시골에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한 번 더 눈을 돌려봅시다. 그분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마태 19,2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청년은 주님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복음서 표현에 따르면,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마태 19,22)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그를 ‘슬픈 청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행복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제 가브리엘 대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획을 알리는 신묘한 순간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어머니께서는 경청하시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하려고 한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고는 확고하게 ‘피아트(Fiat)!’, 곧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뜻에 따라 결정하는 자유, 모든 사람을 위한 최선의 자유가 맺은 열매입니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찬미는 가톨릭 신앙의 모든 신비들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거룩하신 성삼위께서는 자유로운 사랑의 분출로써 세상과 인간을 무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거룩하신 말씀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우리의 살을 취하시고,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시는 놀라운 자유의 표양을 보여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왔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고뇌하십니다(루카 22,44 참조).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꺼이 조건 없이 희생을 받아들이십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그분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이 당신 자신이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알게 하시려고 열정을 다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17-18).

우리는 예수님의 자유를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분의 자유는 그분의 사랑만큼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한한 가치를 지닌 그분의 숭고한 희생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도록 합니다. “어째서 주님은 저희에게 당신을 따를 수도 있고 당신을 해칠 수도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까?” 자유는 선을 향할 때에만 올바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들 중의 사랑이신 분을 잊고 배반할 때에는 자유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온 힘을 다해 옹호하고 있고, 앞으로도 언제나 옹호할 개인의 자유 덕분에 저는, 비록 제 나약함을 절감하면서도, 깊은 확신 속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제가 자유로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몸소 우리에게 그 답을 주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이로써 자유에 길이 열리고, 자유에 의미가 부여됩니다. 하느님과 피조물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깨달으며 기쁨과 확신 속에서 제 이야기를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손에서 나왔고, 거룩하신 성삼위께서 극진한 사랑으로 우리를 굽어보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놀라우신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 간청합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날마다 거듭거듭 생각하게 해 주십시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에 관한 가장 심오한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는 행동할 때에, 모든 것 위에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자기 지배와 자제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마음을 다하여 항구하고 자발적인 결심을 하고 자유로이 투신하여야 한다는 것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러나 자유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자유는 길을 안내하는 북극성을 필요로 합니다. “영혼은 안내자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억압적 지배자인 악마가 아니라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벼우신’(마태 11,30 참조)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모시려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유! 자유!” 하고 한심하게 외치며 자신을 달래는 사람들의 기만을 물리치십시오. 그들이 외치는 자유는 애처로운 종살이를 위장하는 가면일 뿐입니다. 그릇된 것을 선호하는 선택들이 어떻게 참된 자유를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홀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시다(갈라 4,31 참조). 그분 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요한 14,6 참조).

여기 계신 하느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자문해 봅시다. “주님, 어째서 우리에게 이러한 힘을 주셨습니까? 어째서 우리에게 당신을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저희가 이 힘을 좋은 곳에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사도 9,6 참조) 그분의 대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자유는 진리에 봉사할 때에만, 또 온갖 유형의 노예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추구할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교의 무궁무진한 보화,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로마 8,21)를 사방에 선포하고픈 저의 열망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이것이 ‘선의’의 본질적 의미이며, 이 ‘선의’로써 우리는 “악에서 구별해 낸 선을 추구”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근본적인 점에 관하여 묵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양심상 지녀야 하는 책임을 통감하게 합니다. 우리를 위한 선택은 우리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의해서 선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부모님에게서 가톨릭 신앙을 물려받았고,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세례로 새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초자연적 생명이 우리 영혼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 내내 날마다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순명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태도 그대로 악마의 유혹들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하느님의 사랑은 질투하는 사랑입니다. 그분은 만일 우리가 어떤 조건을 가지고 그분을 만나러 온다면 만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마음의 어두운 구석들을 모두 치우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 마음의 어두운 구석들에는 은총의 기쁨과 행복, 그리고 초자연적 선물들이 도달할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내가 이 배타적인 사랑에 ‘예’라고 말한다면, 나의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닐까?”

기도 중에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도우심과 비추심에 힘입어, 저는 이 질문이 여러분과 저에게도 또렷하게 제기되리라 믿습니다. 때때로 우리 각 사람은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 고통과 시련을 포함한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만일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직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영혼은 그러한 고통이 잠깐 사이에 지나갈 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영혼은 곧 자신의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마태 11,30 참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자신의 어깨 위에 얹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위태로워졌을 때에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창조주를 거슬러 하찮고도 불가능한 반란을 일으키며, 시편에 기록된 대로 헛된 불평을 맹목적으로 되풀이합니다. “저들의 오랏줄을 끊어 버리고 저들의 사슬을 벗어 던져 버리자”(시편 2,3).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 과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남에게 과시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수행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꺼려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고통스럽고 상처를 감수해야 할지라도 그것은 완전히 우리의 자유에 따른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계획 안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방어벽 삼아 그 뒤로 숨습니다. 그들은 “자유! 자유!” 하고 외칩니다. 그들은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자유는 그들의 소심한 마음이 섬기고 우러러보는 진흙 우상일 뿐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까? 만일 자유가 그들의 인생을 이끌어 주지 못한다면, 이 보화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들의 무익한 행위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존엄함과 고귀함을 스스로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목표가 없고, 그들이 가야 할 길도 분명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러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유치한 허영심과 이기적 기만과 육체적 쾌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자유는 아무런 결실이 없거나, 또는 사람들이 비웃는 열매를 맺는 것으로 판명이 나고 있습니다. 올바른 행위를 완전한 자유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조만간 다른 사람들에게 조종당하게 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의존하는 게으른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는 어떠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릴 것이며, 언제나 자신에 관한 결정을 다른 사람들이 내릴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끊임없는 수다와 변명으로 연막을 치고 자신의 부족한 인격과 용기와 정직을 숨길지라도, 그는 “바람에 떠밀려 가 버리는 메마른 구름이고, 늦가을까지 열매 하나 없이 두 번이나 죽어 뿌리째 뽑힌 나무”(유다 12)입니다.

그들은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다!”고 완강하게 거듭 말합니다. 아무도라구요? 사실 모든 사람이 그들에게 거짓 자유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거짓 자유는 그들의 자유로운 행동들이 빚는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면, 개인들이 자유를 책임 있게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개인은 매번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사람은 어린이 놀이용 찰흙과 같이 주변 환경에 좌지우지됩니다. 그 누구라도, 그 무엇이라도, 특히 죄로 상처받은 인간 본성의 악한 경향과 감정들이 제멋대로 그를 주무를 수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다른 종들처럼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들을 발휘해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틀림없이 그의 탈렌트가 열매를 맺도록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그는 자신의 탈렌트를 잃어버릴까 걱정하였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어떻게 하였나요? 그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습니다(마태 25,18 참조)! 그가 받은 탈렌트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 것입니다.

이 사람의 병적인 두려움을 잊지 맙시다. 그는 자신의 역량, 자신의 마음, 자신의 의지, 자신의 전 존재를 정직하게 이용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가엾은 친구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땅에 숨겨 둘 거야. 그렇지만 나의 자유는 안전해!”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매우 확고한 어떤 것, 그러나 가장 비참하고 무미건조한 무기력함에 매어 두었습니다. 그에게는 대안이 없었기에 정면 돌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택을 해야 했지만, 결국 좋지 않은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자유와 봉헌 생활을 대립시키는 것은 지극히 나쁜 일입니다. 자아 포기는 자유의 결과입니다. 보십시오. 자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는 하나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녀가 더 많이 사랑할수록, 그녀의 자유는 더 위대할 것입니다. 그녀의 사랑이 위대하다면, 그녀의 자유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자아 포기를 전제로 한 그녀의 복된 자유 덕분에, 또한 그녀가 자유로이 선택한 자아 포기 덕분에, 그녀의 자녀는 선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어떤 열망을 지니게 되면, 우리의 탐색도 끝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유는 사라지는 것입니까?” 장담하건대, 우리의 자유는 이전보다 더 활발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일상적인 의무 수행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지루함이나 비정함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날마다 봉사와 애덕 실천으로써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고, 또 여러분 마음속 깊이 새겨 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와 봉헌 생활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서로를 유지해 줍니다. 오직 사랑 때문에만 자유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 말고는 자유를 포기할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저는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봉헌 생활을 할 때마다, 자유는 그들의 사랑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렇게 거듭난다는 것은 언제나 젊고, 관대하고 높은 이상을 가지고 위대한 희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포르투갈 말로 젊은이가 ‘os novos’, 곧 ‘새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젊은이는 바로 새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비록 제가 꽤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갈 때’(시편 43,4 참조) 젊음을 느끼고 저 자신이 결코 늙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느님께 계속해서 진실하기만 하다면, 사랑은 언제나 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제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질 것입니다’(시편 103,5 참조).

우리가 자신을 속박하는 것은 우리가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만심만이 그러한 속박을 무거운 사슬로 봅니다.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진정한 겸손은 그분의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볍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마태 11,29-30 참조). 그분의 멍에는 자유와 사랑과 일치입니다. 그분의 멍에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얻어 내신 생명입니다.

사제로 한평생을 살면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저의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하거나 소리 높여 외칠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유에 대한 저의 변론이 신앙을 위태롭게 할 것처럼 의심하고 불신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소심한 분들에게, 믿어도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직 신앙을 공격하는 자유만이 그릇된 자유, 목표 없는 자유, 객관적 원칙 없는 자유, 무법적이고 무책임한 자유입니다. 한마디로 방종입니다.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자유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야말로 참으로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 수 있다는 뜻으로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반대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는 죄를 범하는 것이고 가장 중요하고 첫째가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저는 온 힘을 다해서 양심의 자유를 옹호합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향한 정당한 갈망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알며 그분을 경배할 막중한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웃에게 신앙 실천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느 누구도 하느님에게서 신앙을 받은 사람들을 해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 교회는 언제나 소리 높여 자유를 옹호하였고 언제나 숙명론을 거부하였습니다. 교회는 각 영혼이 좋든 나쁘든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선을 행한 자는 천국에 이를 것이요, 악을 행한 자는 영원한 불로 가리로다”(아타나시오 신경). 저는 언제나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이 놀라운 능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능력은 참으로 우리 신분의 고귀함을 드러내 줍니다. “죄라는 것이 고의적 악이기 때문에, 고의적이지 않은 것은 결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너무 자명한 일이라서 소수의 식자든 다수의 대중이든 의견을 달리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주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우리가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오로지 선을 향하도록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자유로이 당신을 섬기는 편이 더 좋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얼마나 위대합니까! 당신 자녀들에게 넉넉하게 베푸시는 너그러우심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제 혀와 제 심장이 천 개, 아니 그 이상이기를 바랍니다. 그것들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께 끊임없이 찬미를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당신 섭리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께서는 종들의 억지 봉사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녀들이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비록 우리가 첫 조상의 타락 때문에 죄로 기우는 경향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하여도, 그분은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 당신의 무한한 지성의 불꽃과, 선을 향한 끌림과, 영원한 평화를 향한 열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 마음 안에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자라도록 힘쓴다면, 우리가 진리와 행복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하느님께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새롭고 영원한 행복의 원천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누구나 더 이상 자녀가 아니라 종이 됩니다. “각 사물은 자기 본성에 따라 적응합니다. 그러므로 사물이 자기 본성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여 나아간다면, 그것은 자기의 존재 양식이 아니라 외부 영향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는 종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성상 이성적 존재입니다. 그가 이성에 따라 행동할 때에는, 자기 본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에 부합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이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외부의 영향에 휘둘리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며, 남이 정해 놓은 한계에 예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입니다(요한 8,34).”

저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은 이런저런 형태로 종노릇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자 앞에서 비굴해지고,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숭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의주의적 태도를 취하며 상대적으로 평온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탐욕스럽게 자신의 금송아지를 좇습니다. 고상한 분야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직업에 종사하고, 크고 작은 일들을 하며, 과학·예술·문학·영성 분야에서 활동을 합니다. 그러한 투신과 참된 열정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기꺼이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려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노예처럼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우리는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어느 쪽이든 섬겨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의 종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요 자녀가 됩니다. 이로써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과 성을 다해서 세상일들을 정직하게 수행하지만, 거기에는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행복하고 침착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나가는 것에 믿음을 두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에 믿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갈라 4,31).

우리의 자유는 어디에서 올까요? 그것은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그분은 이 자유로써 우리의 몸값을 치르셨습니다(갈라 4,31 참조).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선물의 참된 의미를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야말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입니다.

저는 자유의 모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여러분과 저의 삶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마련해 놓으신 길을 종이 아니라 자녀로서 자유롭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행동의 자유를 기쁘게 활용해야 합니다.

저는 제가 하느님을 선택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선택합니다. 저의 선택은 어떠한 강박도 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저의 온 생애를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수단으로 봉헌할 것을 약속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나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힘껏 외치도록 저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 자유입니다(로마 8,39 참조).

“‘한처음에 인간을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집회 15,14). 만일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누구도 익명 속에 파묻힐 수 없습니다. 각 사람은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며, 하느님의 친구로 살 것인지 아니면 적으로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생 동안 겪게 될 내적 투쟁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사는 한, 우리는 결코 완전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유를 향유하며, 이 자유로운 신앙 고백으로 온갖 내면적 강압 요인을 제거하는 첫걸음을 딛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강압적인 힘에 이끌려 그리스도에게 온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폭력입니다. 우리는 마지못해 성당에 들어가고, 마지못해 제단으로 나아가며, 심지어 마지못해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우리가 원할 때입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을 제대로 사용한다면, 우리의 자유는 우리를 성당으로 이끌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부르시는 소리에 응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집주인은 초대받은 사람들이 하찮은 구실로 자신의 초대를 거절하였을 때, 자신의 종에게 말합니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라”(루카 14,23). 그런데 이것이 각 개인의 양심과 정당한 자유를 거스르는 폭력이요 강요일까요?

복음서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곰곰이 묵상해 본다면, 이 강요의 명령을 오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점잖게 우리를 초대하십니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주님의 강요는 어떠한 신체적·윤리적 폭력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는커녕 그리스도의 모범이 지닌 매력을 보여 주는데, 이는 하느님이 그분의 권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지 보십시오. 그분은 사람을 가르치시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것은 즐기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사람을 당신께로 끌어당기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있을 때에, 악은 해방이 아니라 속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슬러 죄 짓는 사람은 그가 강요로부터 자유로운 그만큼 의지의 자유를 누리지만, 그는 더 이상 비난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를 잃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선호하는 대로 행동하였다고 하겠지만, 참된 자유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결정의 노예가 되었고, 하느님을 무시한 채 최악의 결정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자유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것에도 속박을 거부합니다. 종교는, 동물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반항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을 알 때까지는, 또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까지는 만족스럽지 않고 마음이 불안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유롭게 해방된 반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대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노예와 하느님의 자녀,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는 딜레마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교만의 노예, 관능의 노예, 이기심의 노예 가운데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잘못된 선택으로 수많은 영혼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진리와 정의와 선의 길을 닦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저의 자유를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를 묶고 있던 수많은 사슬이 풀리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의미하고 터무니없는 일들, 사소한 욕망들에 신경을 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값진 보물이요, ‘돼지들 앞에 던져서는 안 되는 진주’(마태 7,6 참조)인 자유를 우리는 전적으로 선행을 배우는 데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이사 1,17 참조).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방탕한 행동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위축되거나 협박 또는 시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이행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놀라운 용맹심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인간 존엄성의 충만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다른 곳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짐스러운 것이거나 어떤 한계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참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한 결정을 내릴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얻습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우리는 최고의 카드를 뽑았습니다. 만일 그것이 의심스럽다면,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봅시다. 우리의 신앙이 보잘것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거의 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빈곤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그분의 어머니요 우리 어머니이신 분을 통해서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자라나도록, 우리가 주님의 현존이 얼마나 달콤한지 맛볼 수 있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할 때에만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영원히 언제까지나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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