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인간적 덕목들 (1941년 9월 6일 강론)

루카 복음 7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루카 7,36). 이때, 그 도시에서 공공연하게 죄인으로 알려진 여자 하나가 와서는 당시 관습에 따라 비스듬한 자세로 음식을 잡수시던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 여자의 눈물은 그렇게 움직이는 발을 씻는 물이었고, 그 여자의 머리카락은 발을 닦는 수건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옥합에 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그 바리사이는 이것을 나쁘게 생각합니다. 그로서는 예수님께서 그토록 큰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계심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각을 읽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4-47).

우리는 주님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성심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의를 다른 쪽으로 기울여 봅시다. 그 바리사이가 예수님께 보여 주지 못한 인간적 예의와 배려에 주목합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하느님이요 온전한 인간”(퀴쿰퀘 신경)이십니다. 그분은 성삼위의 제2위격이신 온전한 하느님이시며, 온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파괴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동료 인간을 홀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것임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창세 1,26 참조).

두 가지 관점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는 세속주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경건주의 관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충분하게 인간적이지는 않다는 시각을 보여 줍니다. 세속주의 관점에 따르면, 복음의 요구들은 우리의 인간적 자질을 숨 막히게 하는 것들입니다. 반면에 경건주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 본성이 너무 타락해서 신앙의 순수성을 위험에 빠뜨리고 위협합니다. 결과는 둘 다 똑같습니다. 두 가지 모두 그리스도 육화의 충만한 의미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제로서 겪은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아무리 죄에 깊이 물들어 있고 또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다고 하여도, 그 고상함이 잿더미 속의 불씨처럼 흐릿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그 마음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써 각자에게 말을 걸면 그들에게서 언제나 대답을 듣습니다.

세상에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그 말씀을 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적 성품은 정직하고 충실하며 자비롭고 성실합니다. 저는 그러한 자질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 호의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적 덕목들은 초자연적 덕목들의 토대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인격적 자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으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자기 내면에서 덕의 씨앗을 기르고 가꾼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앞길을 평탄하게 하실 것이며, 그는 선의를 지닌 사람으로서 사는 방법을 알게 되어 거룩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정반대인 다른 경우들을 머리에 떠올렸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다른 여러 성사들도 받았기에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불충실하고 부정직하며 불성실하고 거만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잠깐 하늘을 비추고는 사라져 버리는 혜성과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책임감을 인정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곧 참으로 인간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참으로 하늘에 닿아 있지만, 우리의 발은 땅 위에 확고히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단지 인간적인 것을 끊어 버린다든지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는 상관없는 덕들을 포기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성혈을 흘리셨습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인간적인 동시에 참으로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강조하건대, 그분은 우리가 날마다 온전한 하느님이시며 온전한 인간이신 주님을 닮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인간적 덕목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것은 관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이 질문 때문에 우리가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가지 덕목만을, 심지어 많은 수라 하더라도 몇 가지 덕목만을 선택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덕목을 실행에 옮기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각 개별 덕목은 서로 얽혀 있으므로, 성실하게 살려는 노력은 또한 올바르고 활발하며 현명하고 차분하게 살게 할 것입니다.

개인적 덕목과 사회적 덕목을 명확하게 구별하기도 어렵습니다. 어떠한 덕목이라도 이기심을 키우지는 않습니다. 모든 덕목은 반드시 우리 자신의 영혼과 이웃의 선익을 함께 추구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아니며 모두 하느님을 닮은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빛나는 이력이나 화려한 경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굳건하게 연대하여야 하며, 더욱이 은총의 질서 안에서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초자연적 유대로써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결심과 책임이 각자의 개인적 자유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덕목들은 철저히 개인적이며 그 개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위대한 사랑의 전투에서 아무도 혼자서 싸우지는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바다 위에 떠다니는 부표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나 서로 돕거나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함께 마음을 모아 주님께 간청합시다. 우리가 하늘에서 그분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될 그날이 밝을 때까지 이 사슬이 우리를 주님의 성심에 단단히 고정시켜 주도록 기도합시다.

인간적 덕목들 가운데 몇 가지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저는 여러분이 혼자서 우리 주님과 대화를 계속하였으면 합니다. 그분께 우리 모두를 도와달라고 청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주님의 강생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청하십시오. 그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그분의 동료 인간들에게 살아 있는 증거를 우리 자신의 살로써 보여 주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쉬운 삶은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가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잠깐 동안만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어려움에 직면하는 일은 허다하며, 우리의 마음 안에는 기쁨뿐 아니라 슬픔도 찾아옵니다. 이러한 인생의 대장간에서 용기, 인내, 관용 그리고 평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용기를 지닌 사람이란, 자신의 양심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굳건히 계속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일의 가치는 자신이 얻는 이익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봉사에 달려 있습니다. 강한 사람은 때때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도 눈물지을 때가 있겠지만 잘 이겨 낼 것입니다. 큰 어려움들이 닥치겠지만 거기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 마카베오기에서는 노인 엘아자르가 하느님의 거룩한 법을 어기기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모범을 보여 줍니다.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2마카 6,27-28).

강해지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자기 덕행의 보상을 받으려고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는 인내롭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불굴의 용기를 통하여 인간적이고 신적인 인내의 덕을 깨닫게 됩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생명을 얻는 것은 인내에 달려 있으며, 이 인내야말로 실제로 모든 덕목의 바탕이고 보호자입니다. 우리는 인내를 통하여 확실히 생명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현재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성 대 그레고리오). 그리고 이 인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좋은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영혼들도 시간이 흘러야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해지고 인내로워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침착하고 차분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온 세상에 선익을 가져다주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위대한 과업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는 평온함이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제외한 모든 일에는 해결책이 있고 또 언제나 용서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죽음이 곧 삶입니다. 우리는 지적이고 현명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라도 평화를 유지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은 사려 깊게 생각할 수 있고, 장점과 단점을 찾아낼 수 있으며, 자신이 하려는 행동의 결과를 분별력 있게 내다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침착하고 단호하게 자기 역할을 해냅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인간적 덕목을 몇 가지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기도하는 대로 다른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저는 참으로 놀라운 자질인 관대함에 관하여 잠시 성찰해 보려고 합니다.

관대함이란 ‘영의 위대함’, ‘마음이 넓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거기에서 피난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관대함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줍니다. 이 에너지로써 우리는 자신을 탈피하여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는 관대한 일에 투신하게 됩니다. 관대한 마음 안에는 인색함도, 비열함도, 이기적 계산도, 사리사욕을 위한 속임수도 없습니다. 관대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힘을 가치 있는 일에 아낌없이 바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을 줍니다. 이제 그는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관대함의 가장 위대한 표현임을 깨닫게 됩니다.

부지런함과 근면함은 하나로 어우러지는 인간적 덕목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각자가 하느님께 받은 재능을 힘껏 활용하도록 도와줍니다. 이 덕목들은 우리가 일을 제대로 끝맺게 이끌어 줍니다. 1928년 이래로 강조해 왔듯이, 노동은 저주가 아닙니다. 죄에 대한 벌도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하느님을 거슬러 반역을 하기 전에 이미 노동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계획에 따르면, 노동은 무한한 창조 활동에 참여하도록 운명 지어진 인간의 항구한 특성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시간을 잘 활용합니다. 시간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집중합니다. 그저 정해진 틀대로 하거나 시간을 때우듯이 일하지 않고, 주의를 집중해서 곰곰이 생각한 뒤에 일합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을 의무로 여깁니다. 근면하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근면한’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어원에서 오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근면하다’(diligent)는 단어는 ‘사랑하다’, ‘감사하다’, ‘주의를 기울여 심사숙고한 다음에 선택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diligo’에서 유래합니다. 근면한 사람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사려 깊고 사랑 넘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을 합니다.

모든 면에서 온전한 인간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육체노동을 자신의 일로 선택하시어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이 일을 하시는 데 지상 생애의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분의 인간적이고 신적인 행동들은 우리의 일상적 활동들이 하찮은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일상적 활동들은 거룩함으로 통하는 관문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해 주고, 우리의 지성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통하여 주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를 줍니다.

인간적 덕목들을 실행에 옮기려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상황에 아주 좋지 않을 때에 정직함과 성실함을 오랫동안 유지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깨끗하고 순수한 덕인 진실함에 머무십시오. 진실함은 언제나 유익합니다. 사실을 은폐하고 겉치장을 하여 타협함으로써 결국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까? 사람들은 진실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려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모든 사람이 가식과 거짓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명은 거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위하여 자신의 명예와 명성을 기꺼이 포기합니다. 그들이 언제나 열광적으로 “햇살이 가장 따스한 양지”를 찾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았을 때, 진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일을 바로잡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거짓으로 시작하는 사람, 자신의 비열함을 가리려고 진실한 척 소리 높여 말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실하다면 정의를 실천할 것입니다. 저는 정의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 특성만 요약하겠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목적이 인간적 덕목들을 바탕으로 하여 진정한 내적 생활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의란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각 개인이 받을 몫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우리는 기꺼이 그 이상의 것을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개개의 영혼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신 걸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은 정의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너그러이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보통 남모르게 이루어지지만,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윤리적 덕목들에 관하여 사용되는 ‘중용의 덕’이라는 표현은 ‘중간’을 의미하지 않으며, 할 수 있는데도 절반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중용은 지나침과 부족함의 중간에 있지만, 실제로는 최고요 꼭대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혜가 가리키는 대로 최선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향주덕과 관련해서도 중간쯤이란 없습니다.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데에는 지나침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한없이 사랑하도록,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용과 이해와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베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절제는 자기 통제입니다. 우리 몸과 영혼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에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져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허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른바 자연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면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의 끝은 비참함 속의 소외이고 슬픔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먹는 것, 보는 것, 소유하는 것에 관해서라면 그 무엇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삶을 영위하도록 충고를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새 삶을 열어가는 능력, 참으로 위대하고 고상한 능력, 하느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능력은 고작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로 악용할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절제의 풍성한 열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까치가 모아오는 자질구레한 장신구들처럼 쓸모없는 싸구려 보석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노예가 아니라 참된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그 같은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위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값싼 것들 없이 사는 법을 알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희생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달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꺼이 희생하는 삶 덕분에 온갖 속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마음 깊은 데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절제 때문에 흐릿해졌던 인생의 색깔들이 산뜻하게 되살아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배려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대의를 위하여 헌신합니다. 절제는 영혼을 진지하고 겸손하고 이해심 깊게 만듭니다. 그것은 또한 모든 이가 부러워하는 지성적인 자기 통제의 표지인 신중함을 길러 줍니다. 절제는 편협함이 아니라, 영혼의 위대함입니다. 자기 통제를 하지 못하는 무절제한 마음 안에 오히려 훨씬 더 큰 박탈감이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한심하게 딸랑거리는 방울을 들고 먼저 나타난 우상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이는 슬기로운 이라 불립니다.”(잠언 16,21)라는 잠언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슬기를 비겁하고 용기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슬기는 우리가 바른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습관입니다. 목표가 잘 보이도록 빛을 비추고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덕목이 슬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슬기가 가치의 서열에서 최고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위한 슬기인가?’를 자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기적 자아에 봉사하는 거짓 슬기(교활함이라고 해야겠네요.)가 있으니까요. 좋은 것으로 위장된 목표를 향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거짓 슬기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영리함과 명석함 때문에 상황이 악화되며,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질책을 초래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옳으신 하느님의 마음을 왜곡하여 여러분의 사악함과 엮어 보려는 것입니까?” 자신의 노력은 자기를 구하는 데 쓰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짓 슬기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로마 12,16).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1코린 1,19).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지성의 선한 습관에 세 가지 양상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조언을 구하는 것, 바르게 판단하는 것, 그리고 결정하는 것이 그 세 가지입니다. 슬기로워지는 첫 단계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덕입니다. 이 겸덕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이 모든 일을 해낼 수는 없다는 점과, 공정한 판단을 위하여 유념해야 하는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언을 구합니다. 그러나 아무에게서나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품성을 지닌 사람, 우리처럼 하느님을 충실히 사랑하기를 바라고 그분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단순히 그의 의견을 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에게 건전하고 사심 없는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다음 단계는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보통 슬기는 신속하고 적절한 결정을 내리도록 요구합니다. 때로는 우리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요인이 밝혀질 때까지 결정을 미루는 것도 현명하겠지만, 지금 곧바로 해야 하는 일을 연기하는 것도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선익이 위협을 받고 있을 때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지혜, 슬기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결코 육에 관한 슬기가 아니며(로마 8,6 참조), 우리 주님을 찾고 사랑하는 데에 자신의 지성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슬기가 아닙니다. 참으로 슬기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음성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그렇게 깨어 기다림으로써 자신의 영혼 안에 구원의 약속과 실현을 맞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마음의 지혜는 다른 많은 덕들을 인도하고 지배합니다. 슬기를 통하여 우리는 경솔함 없이 담대해지는 법을 배웁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사는 노력을 등한시하는 (실은 게으름 때문인) 핑계를 대서는 안 됩니다. 슬기로운 사람의 절제는 둔감함도 아니고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정의는 냉혹함이 아니고, 그의 인내도 굽실거림이 아닙니다.

실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슬기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고치기 때문에 슬기로운 것입니다. 편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기보다 비록 스무 번 실패하더라도 거듭 도전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것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어리석게 돌진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터무니없이 무모하게 행동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할 것입니다.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좋은 일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사람, 흥분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국면을 전환시키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우리는 그들을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하고 조용하게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여는 덕목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움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는 사회적 조화도 아니고 아무런 마찰 없는 평화도 아닙니다. 슬기로움의 바탕에는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겠다는 의지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유치하지 않고, 진리의 친구답게 똑바로 나아가며, 결코 방황하거나 천박하게 살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슬기로운 마음은 지식을 구합니다”(잠언 18,15). 하느님에게서 오는 그 지식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궁극적 지식이며, 모든 피조물에게 평화와 공감을, 그리고 각각의 영혼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인간적 덕목들에 관하여 다루었습니다. 이제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덕목들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일반적인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삶이 아닐까요? 일상 세계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삶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이방인이어야 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행동과 가르침으로 또 하나의 인간적 덕목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저에게 소중한 것인데, 바로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팔레스티나의 한 고을에서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지내셨습니다. 그분의 공생활에서 여러 차례 우리는 나자렛에서 그분이 어떻게 일상생활을 하셨는지 듣게 됩니다. 그분은 일을 하고 온 제자들에게 휴식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십니다(마르 6,31 참조). 그분은 으레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어느 누구와의 대화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린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루카 18,16 참조). 아마도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시며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비유 삼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루카 7,32 참조).

과연 이 모든 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럽고 단순한 일일까요? 보통의 삶에서 이것이 가능할까요? 요즘 사람들은 쉽고 일상적인 것에 익숙해지는 경향이 있으며, 현란하게 꾸민 것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똑같은 일을 겪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향기로운 꽃잎들이 달린 싱싱한 장미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때에, 누군가가 “참으로 흠잡을 데가 없네요. 이것은 조화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자연스러움과 단순성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놀라운 인간적 덕목들입니다. 다른 한편, 이들은 서로 얽혀 있고 복잡합니다. 문제를 왜곡하여 다른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때로는 우리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장애물을 만듭니다. 바리사이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질책을 기억합시다.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미로 속으로 들어가 헤맵니다. 그들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으로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합니다. 그들은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입니다(마태 23,23-24 참조).

아닙니다.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의 고귀한 삶이건 그리스도인의 삶이건 특이하거나 기묘한 삶이 아닙니다. 오늘 성찰한 인간적 덕목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동일한 결론으로 이끕니다. 참된 인간은 진실하고 충실하며 성실하고 용기 있으며 온화하고 관대하며 침착하고 정의로우며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합니다. 온전히 그렇게 살기는 힘들지만, 그것이 특이한 삶은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삶을 깜짝 놀랄 만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 눈이 침침하고 마음은 소심하며 결단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인간적 덕목들을 키우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이미 그 마음은 그리스도께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향주덕(믿음, 희망, 사랑)과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시는 다른 모든 덕들에 힘입어 수많은 이웃 동료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등한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단언하건대, 인간적 덕목들은 초자연적 덕목들의 토대입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선한 인간으로 살아갈 용기를 끊임없이 얻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덕목들을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덕목들을 실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선행을 배워라”(이사 1,17). 각각의 덕목을 실천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참으로 성실하고 진실하고 치우치지 않고 침착하고 참을성 있게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말만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1요한 3,18)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덕목들을 얻으려고 싸울 때, 그 영혼은 성령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자 성령의 작용에 힘입어 선한 인품이 그 영혼 안에서 더욱 강건해집니다. “영혼의 기쁜 손님”(성령 강림 대축일 부속가)이신 성령께서 풍성한 선물, 곧 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 경외의 은사를 부어주십니다(이사 11,2 참조).

성령의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평화”(갈라 5,22), 유쾌한 평화, 쾌활함이라는 인간적 덕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적 기쁨을 경험합니다. 눈앞에서 모든 것이 붕괴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반대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당신은 제 피신처 하느님이십니다”(시편 43,2). 하느님께서 내 영혼 안에 머무시면,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굳건하게 서 있습니다.

공경의 은사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확실하게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데 어찌 슬플 수가 있겠습니까? 슬픔은 이기심의 최종 산물입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살기를 바란다면, 우리에게 비록 잘못이 있고 비참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언제나 쾌활함이 넘칠 것입니다. 쾌활함은 우리를 기도 생활로 이끌고, 기쁨의 찬미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노래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보고 매력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그 기쁨은 은총의 항구한 도움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러 나아갈 때 솟아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지 않고 과소평가하지 않으며 행동의 제한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이요 자녀이므로 머리를 높이 들고 걸어갑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적 덕목들의 충만한 의미를 이끌어 냅니다. 누구도 인간적 덕목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적으로도 누구에게 뒤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이 의심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관하여 (자기 공로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기 주변의 인물들에게 알릴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봉사하는 진실한 마음, 참된 행복은 온전한 하느님이요 온전한 인간이신 구세주의 성심을 통해서만 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손으로 빚으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분이시며 우리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의탁합시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인간적으로도 선하게 만드시어, 우리의 인간적 덕목들이 은총의 생활 안으로 녹아들어 우리가 모든 이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려고 노력하는 세상 사람들과 최선을 다해 협력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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