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maría Escrivá Obras
1

새로운 전례주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된 ‘어떤 것’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부르심(聖召)’입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시편 25,4).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인도해달라고, 당신의 발자국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계명을 온전히 실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랍니다. 그 계명은 곧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상황들을 생각해봅시다. 저는 여러분이 저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 감사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진심으로 겸손히 감사한다면 여러분은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어떤 내세울 만한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보통 우리는 어렸을 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부모님으로부터 하느님께 기원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 뒤에는 우리 주님께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도록 우리의 선생님과 친구들, 지인들이 여러모로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이야기를 그분께 털어놓으십시오.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일반화해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날 여러분처럼 평범한 어느 그리스도인이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해줬습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심오하고도 새롭고 복음서처럼 유구한 전망(지평)을 열어줬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도들 중의 사도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심정은 어땠나요? 여러분은 십중팔구 혼란스러워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유로운 의지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린 다음에야 비로소 현실에 안주하려던 안일한 마음이 사라지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스스로 원했다는 사실이 바로 가장 초자연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굳세고도 그칠 줄 모르는 기쁨이 여러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 기쁨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버리기 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특권층의 일원으로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선택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이런 생각이 여러분의 자존심을 채워주거나,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도록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주신 성소의 뿌리이며, 이는 곧 우리가 겸손해야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화가의 붓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지는 않습니다. 걸작을 만드는 데 화가의 붓이 한몫하긴 하지만, 우리는 화가만을 믿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창조주이자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분의 손에 들린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저는 우리가 함께 얘기해온 것들에 관해 기록한 선례들을 생각할 때마다 크게 고무됩니다. 첫 열두 제자를 부르신 복음서의 기록에서 차근차근 그 내용을 짚어봅시다. 그리고 천천히 묵상합시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증인들에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합시다.

제가 매우 좋아하고 공경하는 첫 사도들은 인간적으로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오를 제외하면 사도들은 그저 그런 어부들에 불과했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만은 아마도 어렵지 않은 생활을 했겠지만, 그마저도 예수님 말씀을 듣고는 모두 버렸습니다. 나머지 사도들은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아야만 근근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곤궁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초자연적인 일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으로 미루어봤을 때, 그다지 영민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예시와 비유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 다가가 ‘그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5,15) 하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 관해 얘기하며 ‘누룩’의 비유를 사용하셨을 때 사도들은 자기들이 빵을 사오지 않은 것에 대해 나무라시는 걸로 잘못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사도들은 가난하고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 단순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야심까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그들 생각에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우실 것이며, 그때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자가 될지 논쟁했습니다. 심지어 최후의 만찬의 그 친밀한 분위기에서도,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스스로 죽으시려는 그 숭고한 순간에서 조차도 그들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신앙이요? 그들은 거의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점을 지적하셨지요. 그들은 죽은 자가 일어나고, 온갖 질병이 치유되고, 빵과 물고기가 불어나고, 폭풍우가 잠잠해지고, 마귀가 내쫓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즉시 반응한 사람은 사도들의 지도자 역할로 선택된 베드로 성인뿐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 15) 하지만 베드로의 신앙은 자신의 한계에 매몰된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받고 죽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반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나무라셔야만 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23) 이와 관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존엄하신 주님께 맞지 않으며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고통은 나의 존엄에 걸맞는 일이며 내가 당해야 할 일이다. 나의 존엄과 나의 위신(威信)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네 마음이 인간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앙심 얕은 사람들이 적어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만은 남달랐을까요? 그들은 말로는 분명히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열정에 휩싸여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요한 11,16)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그 진실의 순간에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도망쳤습니다. 사도들 중 막내였던 소년 요한만이 진정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 곁에는 오직 요한만 눈에 띄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죽음만큼 강한 사랑을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우리 주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 “교회의 기둥”이 되기 전까지 (갈라 2,9) 제자들은 여전히 그러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점과 단점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행동보다는 말이 앞서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마태 4,19), 구원사업의 협조자이자 하느님의 은총을 나눠주는 이들이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3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부르실 법한 훨씬 더 나은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더 단순하고, 더 지혜롭고, 보다 영향력 있고, 권위 있으며, 훨씬 더 감사할 줄 알고, 더 관대한 사람을 부르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는 당황스럽습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은총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어떤 일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부족함이 많은 도구들을 찾으십니다. 바오로 성인께서 자신의 소명에 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할 때 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코린 15, 8-9) 경이로운 성품과 추진력으로 역사에 기록된 타르수스의 사울은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전에도 얘기했듯이 우리는 자랑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미천하고 가엾은 개별인(個別人)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영혼 속에서 반짝이는 빛(신앙-信仰)과, 우리가 더불어 나누는 사랑(애덕-愛德), 그리고 우리를 지탱해주는 열망(희망-希望),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이란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깁시다!

우리가 겸손함을 키워가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유를 곧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들 개개인의 거룩함(성덕: 聖德) 때문입니다. 우리가 겸손하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소명: 召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밀밭에서 우리를 낚아채셨습니다. 씨 뿌리시는 분은 당신의 상처 입은 손바닥으로 한 줌의 밀을 짜내셨습니다. 그렇게 짜낸 밀을 그리스도의 성혈에 적셔 씻어내셨고 그 밀을 바람에 실어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밀은 죽어서 새 생명이 되고, 땅에 내려앉아 스스로 증식하게 된 것입니다.


4

오늘 미사의 서간은 우리가 새로운 영성과 새로운 열망으로 온전히 깨어있음으로써 사도로서의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겨줍니다. “또한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로마 13, 11-12)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라고 여러분은 말씀하시겠지요. 그 말이 맞습니다. 인간이 거룩해지는 것을 가로막는 원수들은 인간들이 이 새로운 생명을 부인하도록, 그리스도의 영성을 입는 일을 거부하도록 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요한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충직함을 저해하는 장애물들에 관한 설명을 잘 요약해 주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요한 2,16)


5

‘육신의 욕망’이 우리 감각의 무질서한 성향이라고 싸잡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적 욕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욕은 잘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욕 또한 거룩해질 수 있는 고귀한 인간적 실체(實體)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불순함에 관해서가 아니라 ‘순결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점을 주목해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라고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한 소명을 받아 결혼함으로써 이러한 순결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모든 인간적 사랑에 앞서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에만 열정적으로 응답하도록 성소(聖召)를 받습니다. 관능의 노예가 되는 것과는 전혀 별개로, 결혼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거나 모두 스스로를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내어주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순결’이라는 미덕에 관해 말할 때마다 저는 ‘거룩한 순결’이라는 단서를 달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순결, ‘거룩한 순결’은 스스로 “순결하다”고, “오염되지 않았다”고 자만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비록 하느님의 은총이 매일매일 적들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기는 하지만, 우리 자신들의 발이 흙투성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만 합니다. 제가 보기엔, 이 주제에만 국한해서 배타적으로 글을 쓰거나 강론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우리네 사회생활에 있어서 굉장히 소중한 다른 미덕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순결’이 그리스도교의 유일무이한 핵심 덕목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성화(聖化)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려면 순결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순결하게 살지 못하면 사도직을 위한 헌신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순결은 사랑의 결과물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신, 능력과 감각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기도록 이끌어주는 사랑의 결과가 바로 순결인 것입니다. 순결은 결코 부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쁜 긍정입니다.

저는 앞서 ‘육신의 욕망’이 감각의 무질서한 성향이라고 싸잡아 말할 수는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육신의 욕망(탐욕)’이란 가장 쉽고 쾌락적인 길에 탐닉하는 ‘굳세지 못함’, ‘나태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 해도 개의치 않고, 누가 봐도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성향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 빠지는 것은 죄악의 오만한 동요 속으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빠뜨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바로 이 점을 바오로 성인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 7, 21-24) 계속해서 바오로 사도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에페 1,3-14)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육신의 욕망을 이겨내기 위해 싸울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겸손하다면 우리에게 항상 주님의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6

또 하나의 적은 ‘눈의 욕망’이라고 요한 성인은 이야기합니다. ‘눈의 욕망’은 우리가 만질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하게 만드는 뿌리 깊은 탐욕입니다. 욕망에 찬 눈은 세속의 것만을 바라보며, 결과적으로 초자연적인 실재(實在)는 전혀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물질적인 것에 대한 그릇된 욕망을 지적하는 요한 성인의 말씀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 시대와 삶을 둘러싼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을 오직 인간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기형적인 시선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눈의 욕망’ 때문에 우리 영혼의 눈은 무뎌집니다. 인간의 이성은 하느님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지성에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신을 자유롭게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신 힘입니다. 하지만 미묘한 유혹이 있습니다. 그 유혹에 이끌려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둡니다. “너희가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 (창세 3,5) 라는 생각에 우쭐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애(自己愛)에 가득 차서 하느님 사랑에 등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존재는 ‘제3의 적’이 노리는 먹잇감으로 추락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활의 자만(自慢)’입니다. 이는 단순히 허영심이나 자기애에 빠져 그냥 지나쳐가는 일시적인 생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만이 일반화된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일반화된 자만’은 가장 나쁜 악(惡)이며 모든 잘못된 행동의 뿌리입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죽은 뒤 24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자만심이 사라진다고도 말했습니다. 그 정도로 자만(自慢)과의 싸움은 평생 계속돼야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사이의 오만함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바리사이를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의 마음속에 들어앉은 ‘자기만족’이라는 장애물을 당신께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자만은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업신여기며 학대하게 만드는 오만(傲慢)입니다. 그러기에 “오만이 오면 수치도 따라온다.” (잠언 11,2) 라고 했습니다.


7

오늘은 대림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영혼의 적’들이 부리는 농간에 관해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관능의 무질서’, ‘무사태평한 피상성(皮相性: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겉모습만을 보고 내리는 판단)’,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성의 어리석음’, ‘하느님과 당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을 훼손하는 무신경한 오만’ 등이 바로 그런 농간들입니다. 이 모든 영혼의 장애물들은 매우 현실적이며 실제로 엄청나게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전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며, 우리가 입당할 때 기도한 대로 다음과 같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립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께 의지하니 제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제 원수들이 저를 두고 기뻐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25,1-2) 우리는 또한 봉헌예식 때도 같은 바람을 되새깁니다. “당신께 바라는 이들은 아무도 수치를 당하지 않으니” (시편 25,3)

우리들이 구원받을 시기가 다가오기에 바오로 성인의 말씀이 위로처럼 들립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 구원하신 것입니다.” (티토 3,4-5)

성경을 대충만 읽어봐도 여러분은 ‘하느님 자비’에 관한 언급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땅을 가득 채우고, 당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미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주위에 넘치며, 자비의 눈이 내게 머무르십니다.”(시편 33,18), 우리를 도우시기 위한 당신의 자비는 “하늘에 닿아 있고.” (시편 36,6), 그 자비는 언제나 “굳건합니다.” (시편 117,2).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자애롭고” (시편 25,6), “가뭄의 비구름처럼 반갑습니다.” (시편 117,2)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느님 자비의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 5,7) 우리 주님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복음서의 다른 많은 장면들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심, 돌아온 탕자의 예화, 잃어버린 양의 비유, 빚을 탕감 받은 채무자, 그리고 나인 고을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을 되살리신 사건 등등.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기적을 행하셔야 했던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가난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아들은 어머니가 살아가는 의미였습니다. 살아 있었더라면 노년에 어머니를 보살폈겠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의가 아닌 연민(憐憫)으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에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생각하면 우리가 평안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 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탈출 22,26) 이 말씀은 당신께서 우리의 간청을 반드시 들어주시겠다는 초대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히브 4,16)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앞에 있는 한 우리의 성화(聖化: 거룩하게 됨)를 방해하는 적들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 자신의 잘못과 인간적 약점 때문에 우리가 쓰러진다 해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태만하지 않고 오만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경건하며 성숙하고, 세속적 것들의 포로가 되지 않으며, 덧없이 지나쳐가는 것보다 영원한 것을 선택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나약함 때문에 이 헛발 딛기 쉬운 세상에서 자신의 발걸음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훌륭한 의사를 보내어 처방하게 하시고, 절망에 빠져 용서를 청하지 않도록 자비로운 재판관을 통하여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8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는 하느님 자비의 보호 아래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 자녀답게 행동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확실히 뿌리내리게 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저는 그 가운데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는 ‘내적 생활’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깊이 알게 해주는 ‘교리교육’입니다.

먼저 ‘내적 생활’에 관해 말씀드리면, 사실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정말로 드뭅니다. ‘내적 생활’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어두운 성전 같은 것을 상상할 것입니다. 저는 25년 넘게 ‘내적 생활’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줄곧 이야기해왔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입니다. 왁자지껄한 도시에서, 대낮의 햇빛 속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 가족과 함께 있거나 잠깐의 휴식을 취하며 살아가는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 말입니다. 그들은 온종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내적 생활’이란 지속적인 기도 생활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의 필요성을 진정 찾지 못했나요? 여러분을 거룩하게 이끄시는 하느님과의 친교로 나아가고픈 절실함이 없는 건가요? 바로 그것이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해했던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이와 관련해 교부(敎父)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인간이 사랑함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위해 실제로 염려하시는 그분께 감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감정의 문제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마치 영혼에 새겨진 자국처럼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사랑을 다해 우리를 쫓아오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묵시 3,20).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낮 동안에 그리스도와 더 길게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느끼지 않나요? ‘제가 나중에 모든 것을 털어놓을게요.’라고 하면서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그분과 나누고 싶지 않나요?

우리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특별히 예비된 이 기도 시간에 가슴은 넓어지고, 의지는 굳세어지며, 주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마음속 인간의 현실세계를 초자연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의 행동을 개선하고 모든 사람들과 더욱 사랑 넘치는 관계를 맺으며, 사랑과 평화를 향한 그리스도교의 투쟁을 위해 마치 훌륭한 운동선수인 것처럼 마지막 힘까지 남김없이 쏟아내겠다는 명확하고도 실제적인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우리네 심장의 고동처럼, 우리의 맥박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관상생활(觀想生活)’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관상생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과업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으려는 건물이 주님의 집이 아니라면 집 짓는 사람들의 수고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9

수도자가 아닌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서 세상을 등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는 장소는 다름 아닌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수도복이나 주교의 표지와 같은 외적인 표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가진 모든 헌신의 표징은 ‘내면(內面)’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변치 않는 현존하심’과 ‘고행의 정신’이 바로 그 표징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변치 않는 현존하심’이 유일한 필수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고행의 정신’은 오감(五感)으로 드리는 기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부르심(성소)은 희생과 보속, 속죄의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인류의 모든 죄를 속량해야 합니다. 그 죄는 하느님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수없이 얼굴을 돌린 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당신의 희생과 십자가의 고통을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2코린 4,10)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희생의 길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찾게 됩니다. (gaudium cum pace)

우리는 세상을 슬프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예전에 성인들의 전기를 썼던 몇몇 작가들은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갔던 그들 삶의 아주 특별한 부분만을 부각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심지어 성인들이 요람에 누워 있었던 아주 어린 시절의 특별한 면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성인들 중 몇 명은 아기 때 울지도 않았으며, 금요일에는 보속을 실천하기 위해 엄마 젖도 빨지 않았다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저도 태어날 때 심하게 울었을 것이고, 단식재나 사계재일(四季齋日)과 무관하게 모유를 실컷 먹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비슷한 날들이 하루하루 이어지는 일상 안에서하 느님의 도움으로 진정한 보속(참회)의 시간을 발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은총과 감도(感導)를 받기 위해 우리 스스로 준비하는 길입니다.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은총을 통해 기쁨과 평화, 그리고 우리의 노력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찾아옵니다.

고행은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해줍니다. 고행 가운데 최고는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며, 일상의 사소한 일들부터 생활 속에 만연한 욕망들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고행은 다른 사람들을 낮추어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들과 관계 맺음에 있어서 더 많은 세심함과 이해심, 그리고 개방성을 얻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쉽게 화를 낸다면, 여러분의 모든 사고가 오직 여러분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긴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절제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불필요한 것들과, 때로는 필요한 것들이라도 여러분이 이를 포기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울해진다면, 이 또한 여러분이 욕망을 절제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여러분 자신이 “모든 이들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 이 되는 법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욕망을 절제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

기도와 보속의 삶,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깨달음은 우리를 참으로 신심(信心) 깊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돌봐주시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의심 없고 깊은 신심’은 어린이들의 미덕입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품으로 피신하려 한다면, 그 아이는 자기가 작고 가여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영적 어린이의 삶’에 관해 자주 묵상해왔습니다. 영적 어린이라고 해서 용기(勇氣)라는 미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어린이가 되려면 강한 의지와 검증된 성숙함이 필요하고, 동시에 활짝 열려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만큼 독실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가능한 한 진지하고 철저하게 신앙에 관해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린아이의 신심’인 동시에 ‘신학자들의 명확한 교리’여야 합니다.

신학적 지식을 키우고, 견실하고 확고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촉발됩니다. 또한 이러한 열망은 하느님의 손길로 만들어진 이 세상의 심오한 의미를 깨우치기 위한 경건한 영혼의 관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따금씩 깨진 레코드판 같은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몇몇 사람들이 신앙과 과학, 인간의 지식과 하느님의 계시 간에 빚어지는 불일치성을 부각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겉으로만 불일치하게 보일 뿐이지만- 문제의 본질적 요소들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과 닮은 인간을 만드시고 거룩한 빛을 그에게 주셨다면, 우리네 지성(知性)의 임무는 모든 피조물의 본성에 깃든 거룩한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오직 부단한 노력만이 이뤄낼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의 빛으로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에 담긴 초자연적 목적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질서’가 훨씬 더 높은 수준인 ‘은총의 질서’로 격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적인 노력은 그것이 진실하다면, 언제나 진리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진리다” (요한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틀림없이 진리를 알고자 하는 허기를 갖고 있습니다. 가장 추상적인 지식에서부터 구체적인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느님과 연관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거룩해질 수 없는 인간의 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우리 자신을 성화(聖化)하는 기회가 되며, 우리와 함께 일하는 이들을 성화하기 위해 하느님과 협력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뿜어내는 빛은 결코 계곡 깊은 곳에 숨겨져선 안 됩니다. 그 빛은 산의 정상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마태 5,16)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며,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연구하는 것 역시 기도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기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해 그분과의 친교를 풍부하게 해줄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명예로운 일이 기도가 될 수 있고, 기도하며 해온 모든 일들이 사도직 활동인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영혼은 순진하고도 튼튼한 삶의 일치를 이뤄내는 것입니다.


11

그리스도의 탄생을 우리 자신과 분리해서 대림 시기의 하루하루를 계산한다면, 저의 대림 제1주일의 강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부르심의 실체(實體)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파견하셨는지 숙고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켜 그들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하느님께 다가가도록 격려하고, 교회와의 일치를 실감하며, 하느님의 왕국이 모든 이의 마음속에 펼쳐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파견된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헌신적이고 충실한 자세로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처럼 거룩해지기를 열망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서 자만과 육욕, 나태와 이기심을 발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헌신, 자비와 겸손, 희생과 기쁨을 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소를 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자신을 고립시킴으로써 여러분이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표들을 축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저는 독수리 한 마리가 철창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독수리는 지저분한 몰골이었고 깃털의 절반이 빠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발톱 사이에는 고기 조각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만약 제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한다면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족쇄가 채워진 그 외로운 독수리가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하늘로 솟아올라 태양을 마주보기 위해 태어난 새였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그 보잘것없는 수준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류에 봉사하는 그 변변치 않은 수준을 최고로 격상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들 영혼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지 않는 외진 구석이나 틈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어두운 구석이 사라지면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에, 입술에, 가슴에 오셔서 여러분의 행동에 당신의 모습을 새겨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삶의 모든 감정과, 일과, 생각과 말이 모두 하느님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카 21,28). 우리는 방금 이 복음 말씀을 읽었습니다. 대림시기는 희망의 시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부르심의 이 엄청난 전망(지평)이 매일의 현실이 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 위에 세워진 이 삶의 일치가 우리네 일상의 현실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저와 함께 우리 성모님께 간구합시다. 당신의 아드님이 탄생하시기를 기다리며 보내신 그 몇 달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려고 노력합시다. 우리의 성모님, 거룩한 마리아께서 여러분을 ‘제2의 그리스도’, 또한 ‘그리스도 자신’ (alter Christus, ipse Christus)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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