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maría Escrivá Ob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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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의미 있게 가득 채우는 거대한 진리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어둠의 힘을 이기셨습니다. 천사는 주님의 무덤에 온 여인들에게 “놀라지 마라”하고 인사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 (마르 16,6)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시편 118,24-부활 대축일 미사 화답송)

부활절은 기쁨의 시간입니다. 이것은 전례력상의 이 시기에만 한정되는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가슴 속에 실제로 항상 충만한 기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떠나가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모범과 위대한 기억을 남겨주고, 잠시 계셨다가 사라져 버린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분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저버리지 않으심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앞으로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 49,14-1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분의 기쁨은 사람의 아들들과 여전히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살아 계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16,7)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와 생명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머무르십니다. 교회의 성사 안에, 교회의 전례와 가르침 안에… 교회가 하는 모든 일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머무르십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매일 봉헌하는 성찬의 전례 안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사는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이자 원천입니다. 완전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머리와 지체(肢體)가 온전히 모든 미사에 현존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Per Ipsum et cum Ipso et in Ipso)’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중재자이시고, 그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그분 밖에서 우리의 삶은 공허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으로 “우리는 감히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늘과 땅의 주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존재가 곧 이 세상에 계시는 당신 현존(現存)의 증거이며, 원천인 동시에 정점(頂點)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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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이 은총의 상태에서 거룩해진다고 가르쳐줍니다. 인간이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남자이고 여자이지, 천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과 피로 된 인간이고, 감정과 열정, 슬픔과 기쁨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런 인간이 이렇게 거룩해졌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1코린 15,20-22)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분이 마지막 만찬에서 당신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필립 2,5)

그렇게 살면 바오로 성인처럼 외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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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몇 가지 특징을 여러분과 함께 간단히 되새기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히브 13,8)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모든 생활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사의 과정들을 짚어보면 발전과 진보를 깨닫게 됩니다. 과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을 더욱 잘 알게 해주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술은 과거보다 훨씬 더 세상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술은 문화와 화합, 그리고 물질적 복지의 측면에서 인간이 꿈꿔온 것보다 더욱 위대한 수준에 이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여전히 불의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때로는 그 정도가 과거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낙관론에 반기를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옳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넘어서 무엇보다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싶습니다. 종교적 범주에서 보면,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며 하느님은 여전히 하느님이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진보는 이미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십니다.” (레위 21,6)

영적 생활에 있어서 더 이상 새로운 시대는 없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항상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삶이 우리의 삶 안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Ipse Christus)으로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삶에서 그분의 삶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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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성인은 에페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여라 (Instaurare omnia in Christo)’ 라는 좌우명을 주었습니다.(참조 에페 1,10) 그리스도를 모든 일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모든 것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 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요한 23,32) 그분의 강생을 통해, 나자렛에서 하신 당신의 노동과, 유다와 갈릴래아에서 베푸신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또한 모든 피조물의 맏물이자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과업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왕(王)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당신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회와 떨어져서 세속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범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우리에게 되새기도록 요청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제직의 직무를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곳, 각자가 일하는 세속의 일터에서 올곧게 계속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공장에서, 실험실에서, 농장과 무역 현장에서, 그리고 대도시의 거리와 산길에서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과 나누신 그리스도의 대화를 곧잘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걷다가 두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들은 거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당신이 마음속에 지니신 삶의 일부를 그들에게 전하셨습니다.

마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계속 가시려는 듯했지만, 두 제자들은 길을 멈추고 자신들과 함께 머무르시도록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빵을 쪼개셨을 때 두 제자는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봤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고 그들은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32)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 (2코린 2,15)를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들로부터 그들의 스승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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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께 접붙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견진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왕직과 예언직, 그리고 사제직을 더불어 나누며 세상 안에서 활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일치와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인 동시에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똑같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서로를,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참으로 온 인류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란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신앙은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보여주고,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 주며 그분이 하셨던 대로 우리도 행동하게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면서 그를 의심의 덫에서 자유롭게 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이에 대해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우리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육신을 본 적이 없지만, 영적으로 당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동이 신앙과 일치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신이 믿은 바를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면 진실로 믿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오 성인은 말로만 신앙을 가졌다면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얘기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행동으로는 그분을 부정합니다. (티토 1,16)’”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란 사실과, 구세주로서 당신의 역할을 결코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1티모 2,4)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개인적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2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역시 모든 인류를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수 세기에 걸쳐 새롭게 거듭되어온 당신의 계명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요한 성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온 옛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 걸림돌이 없습니다.” (1요한 2,7-10)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쁜 소식, 그리고 생명을 가져다주셨습니다. 부자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현명한 사람이거나 단순한 사람이거나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형제들에게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고, 같은 아버지인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민족만 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민족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피부색만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하나의 피부색 말입니다. 또한 오직 하나의 언어만 존재합니다. 말들이 일으키는 소음이 없는, 오직 마음과 마음이 서로 얘기하는 언어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는 언어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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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각자의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자신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 삶의 영성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삶의 상세한 부분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세한 부분들을 통해 그분의 마음가짐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특별히 그분의 삶을 관상(觀想)함으로써 굳셈(힘)과 빛과 고요와 평화를 얻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아지기 위해서 그의 삶과 성향을 모두 알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분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 때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삶을 온전히 묵상해야만 합니다. 저는 사제생활 초기에 예수님의 삶에 관한 책들과 복음서의 복사본을 신자들에게 선물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의 삶에 관해서 알아야 하며, 그분의 삶을 우리 마음 깊이 새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책이 없더라도 눈을 감고 그분의 삶을 마치 영화를 보듯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네 삶의 모든 다양한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과 행동이 우리 마음에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삶에 함께하게 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 삶의 몇몇 장면들을 떠올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온전히 그분의 삶에 함께해야 하고, 예수님의 삶에서 일익을 담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당신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랬던 것처럼, 그분의 첫 열두 사도들과 거룩한 여인들, 그리고 그분께 간청했던 군중들처럼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망설이지 않고 그분을 따른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깊이 들어와 진실로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기” (히브 4,12)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가고 싶다면, 먼저 복음을 읽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수난당하시는 핵심 사건들을 선택해 묵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수난 이외의 그분의 삶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고, 아울러 그분이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당신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완벽한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완벽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거룩하게 행동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위치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죄를 제외하고 우리 인간의 본성을 온전하게 취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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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진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셨음을 깨닫고 저는 매우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묵상할 때에 저는 감동합니다.

열 두 제자들과의 관계를 시작으로 복음서에 기록된 몇 가지 사건들을 꼽아봅시다.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했던 사도 요한 성인은 그리스도와 이야기 나눴던 잊을 수 없는 첫 대화를 이렇게 썼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 1,38-39)

이 거룩하면서도 인간적인 대화는 요한과 안드레아,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다른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강가에서 그들에게 주신 권위 있는 가르침을 들을 준비가 돼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 4,18-20)

그 후 3년 동안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알게 되셨고, 그들의 질문에 답하시고, 그들의 의심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라삐’이시며,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스승이시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 또한 제자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시는데 제자들이 그분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응시하면서 그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으려고 애쓰고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돌아오셨을 때 제자들 중 한 명이 말했습니다. “‘주님,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를 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1-2)

첫 번째 파견에서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첫 임무의 결실에 놀라워하며 사도직 활동의 즉각적인 결과를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의 권위와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으로 사도들을 만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예수님의 승천 직전, 지상에서의 삶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요한 21,4-5)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어느 누구나 물었을 질문을 건네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하느님으로서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요한 21, 6-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물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 쉰 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요한 21,4-13)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고귀하면서도 깊은 애정이 담긴 모습을 제자들이라는 작은 집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거룩한 여인들에게도, 니코데모와 같은 산헤드린의 대표들에게도, 자캐오 같은 세리에게도, 그리고 병자들과 건강한 이들에게도, 율법학자와 이교도들에게도, 개인에게도, 군중에게도 똑같이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머리를 뉘어 쉴 곳도 없었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분에게 가깝고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이 가까이 계실 때면 그분을 자기 집에 모시고자 소망했습니다. 또한 복음서는 병든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과, 무시 받거나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바라보시는 당신의 슬픔, 위선과 마주하실 때 내보이시는 그분의 화를 전해줍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 때문에 슬피 우셨습니다. 복음서는 또한 성전을 모독하는 환전업자들에 대한 당신의 분노와 나임 마을에 사는 과부의 슬픔에 움직이신 주님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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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인간적인 행동이 바로 하느님의 행동입니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콜로 2,9)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완전하고 완벽한 한 명의 인간이십니다. 그 인간적 본성을 통해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이신 당신의 거룩한 본성을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당신의 온 삶을 바치셨습니다. 그분의 이런 인간적인 고결함을 되새기며, 우리는 인간적 행위의 한 형태를 설명하는 일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들은 초월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본성을 보여주며 하느님의 사랑을 믿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당신의 무한한 생명을 나누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 17,6-7)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맺으신 관계는 피상적인 말이나 태도를 훨씬 넘어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시고, 그들 삶의 거룩한 의미를 깨우쳐주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며, 어떻게 하면 그들을 자신들의 임무와 마주하게 할지를 아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편안함에 안주하는 순응적 태도에서 벗어나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을 알게 해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배고픔과 슬픔에도 마음이 움직이시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는 것을 가장 가엾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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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맺으신 관계를 묵상하고, 우리 자신이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 그분께 우리의 동료들을 데려가기 위해 복음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배움을 매일 매일의 일상과 우리들 각자의 삶에 적용해봅시다. 동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적 삶이란 결코 무료하거나 재미없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 자녀들의 대다수가 성덕을 이루길 바라시는 현장이 바로 일상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특권을 가진 부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명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각자가 처한 형편이 어떻든 간에, 개개인의 사회적 위치와 직업이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일상의 삶이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만나는 바로 그 현장에서, 우리가 당신과 일치를 이루어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행복을 통해, 우리 동료들의 인간적인 관심을 통해, 그리고 우리 가족의 삶을 이루는 일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역사의 각 시기마다 드러나는 거대한 문제와 갈등 그리고 도전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 역사적 갈등과 도전이야말로 대다수 인간의 노력과 이상(理想)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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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개인적·사회적 불의(不義)에 당연히 맞서 싸우도록 그리스도인을 북돋웁니다. 그런 불의에 대항할 때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조급함과 걱정, 그리고 불편함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 세기 동안 인류는 서로 어울려 살아왔지만, 여전히 엄청난 증오와 파괴, 광신주의를 자신들의 눈 속에, 그리고 마음 깊이 쌓아두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좋아하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죠.

이 땅의 재화(財貨)는 소수의 인간들에게 독점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 역시 인간이 만든 파벌들에 의해 제한받습니다. 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으며, 교육을 받지도 못합니다. 모든 인간의 삶은 거룩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의 삶이 그저 통계를 장식하는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이를 고치고자 하는 조급함을 저는 이해하고 동감합니다. 그런 조급함이 저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분은 당신이 주신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우리가 실천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이 처한 모든 상황들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 메시지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응대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요구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 31-40)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형제의 모습으로, 우리 주위 사람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려 하실 때 그분을 알아봐야 합니다. 어떤 인간의 삶도 결코 홀로 고립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어느 남자도 어느 여자도 결코 단 한 줄의 따로 떨어진 시구(詩句)가 아닙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함께 한 편의 거룩한 시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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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돌보심 안에 있습니다. 단순히 기능적 범주에만 우리들 자신을 국한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돌보심에 관해 신학적으로 살펴봅시다. 그렇게 살펴보면, 세상에는 오직 세속적인 것들만 존재한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함이나 고귀함, 또는 공평함 같은 것들이 그 예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인간의 자녀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그분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고, 당신 손으로 직접 일하셨으며, 친교와 순명과 고통과 죽음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니 세상 모든 것들을 세속적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콜로 1,19-20)

우리는 세상과 그 안에서 하는 일들과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좋은 것이니까요. 아담의 죄가 하느님께서 주신 창조의 균형을 깨버렸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평화를 다시 세우기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로 인해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된 우리들은 당신의 창조 질서를 무질서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모든 것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개의 인간이 처한 상황은 모두 특별합니다. 그들이 저마다 특별한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자신이 받은 소명을 열정적으로 살아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으며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들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일치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 일을 해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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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성소의 존엄함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만하고 건방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되는 우리의 실수는, 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먼지로 돌아갈 비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악(惡)은 우리 주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우리들 가슴 깊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립니다. 이러한 악은 우리를 이기적이고 비열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모래와 같이 허술하고 위험한 존재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은총만이 굳건한 대지(大地)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봅시다. 또는 현재 세상이 처한 상황을 살펴봅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신 지 20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성소에 충실한 사람은 더더욱 소수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착하지만 신앙을 갖지 않은 어느 남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세계지도를 가리키며 제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실패하셨는지 보십시오. 수 세기 동안 인간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려 했지만,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보시는 대로입니다. 어디에도 그리스도인이 없네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요즘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실패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삶이 세상을 계속 풍요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 아버지께서 맡기신 그리스도의 과업이 지금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권능은 역사를 꿰뚫고 올곧게 전진합니다. 그분의 권능은 진정한 삶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리고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1코린 15,28)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세상 안에서 이 사업을 이뤄가시는 데에 우리가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자유’라는 위험을 감수하십니다. 저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그분은 무방비 상태로,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힘없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 인간의 수준까지 스스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리 2,6-7)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와 불완전함과 비참함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진흙으로 만든 그릇 안에 당신의 거룩한 보물을 담기로 동의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담긴 보물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강하심과 우리의 연약함을 한데 섞는 일을 두려워하시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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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우리의 사명을 의심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정말로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개개인의 비참함을 인정해야 하고,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승의 삶에서 우리가 악마를 완전히 이길 수 있도록 약속하시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대신에 그분은 우리에게 악마와 맞서 싸우라고 요구하십니다. 바오로 성인이 자신을 자만하지 못하게 하는 “육체의 가시”로부터 자유롭고 싶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2코린 12,9)

하느님의 권능은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분의 권능은 우리를 분투하게 이끄시고, 우리의 결점에 맞서 싸우도록 박차를 가하십니다. 비록 이 땅에서 순례하는 동안 완벽한 승리를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매일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며, 스스로를 계속 새롭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죽음을 더불어 나누는 사람이 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 안에서 부활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해야 하고, 또한 자기희생과 고행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낙관주의는 그저 달콤한 사탕발림도, “일이 잘 해결되리라”는 인간적인 낙관론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낙관주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 속에서 이뤄지는 자유와 신앙에 대한 깨달음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낙관주의는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에게 계속 요구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참으로 노력하게 해줍니다.

우리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비참함을 통해, 살과 피와 먼지로 이뤄진 인간인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나타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아지려는 우리의 노력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순수해지기 위해, 우리의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기 위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끝없는 섬김이 되기 위해 애쓰는 노력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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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더 깊이 생각해보고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그리스도 자신’이 됨으로써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을 보여줄 때, 그것은 단순히 사려 깊고 사랑 넘치는 사람이 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이는 더 나아가 자신의 인간적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널리 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삶을 이러한 사랑의 계시(啓示)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14,9). 요한 성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그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얘기를 할 때에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인용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요한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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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믿게 해주고 그분과 끊임없이 대화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쉼 없이 기도하는 삶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밤부터 아침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외로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항상 만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계시며 동시에 천국에 계시는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Sine intermissione orate.)” (1데살 5,17) 라고 일러줍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다음과 같이 이 말씀을 설명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구세주이자 임금으로 알고 있는 그분,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을 찬미하고 경배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분을 통해서 그분의 아버지를 찬미하고 경배하되, 몇몇 사람들처럼 특별한 날에만 그러지 말고, 언제나 우리의 온 삶을 통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찬미하고 경배하라고 얘기합니다.”

스스로의 이기심을 이겨내야 할 때, 다른 사람들과의 기쁜 친교를 즐길 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일상 안에서 다시금 하느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교에 다가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을 찾는 데에 자신의 온 삶을 바칩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비록 이 세상의 것이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시작하고 또한 준비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생명의 빵에서, 성체와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우리의 친구이자 진실로 살아 계신 분으로 모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독서인 히브리서 말씀에서 읽은 그대로,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 7,24-25)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동료이자 친구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렴풋하게만 볼 수 있는 동료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참으로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온 영혼을 가득 채워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기를 열망하게 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하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십시오.’하고 말하여라.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 이 일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묵시 22,1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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