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그리스도의 성심(聖心)’에서 평화 찾기 (1966년 6월 17일 ‘예수 성심 대축일’ 강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성심(聖心)을 통해 “사랑이라는 무한한 보물”과 자비, 그리고 자애(慈愛)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찾고자 한다면, 그분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이미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바오로 성인의 생각을 똑같이 쫓아가면 됩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 8,32)

주님의 은총은 인간을 내부로부터 변화시킵니다. 죄인과 반역하는 이들을 착하고 성실한 종으로 바꾸십니다. 그 모든 은총의 원천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말씀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이러한 진실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성삼위의 제2격이신 성자로 하여금 말씀이 사람의 육신을 취하게 한 것도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성자께서는 죄를 제외한 모든 인간의 상태를 그대로 가지신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 이전에 그분의 사랑이 먼저 계신 것입니다.

사랑은 주님의 강생(降生)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걸으신 구원의 여정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그 구원의 여정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정점에 이르지요.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징표를 통해 저절로 나타납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 19,34) 예수님의 이 물과 피는 우리에게 ‘자기희생’을 얘기합니다. 주님의 이 희생으로 모든 것이 이뤄집니다. “다 이루어졌다” (요한 19,30) 곧, 사랑으로 모든 것이 이뤄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네 신앙의 핵심적 신비에 관해 한번 더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심오한 진실을 표현하는 데에 인간의 행동들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며 놀라고 있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희생시키신 성부의 사랑, 말없이 자신을 갈바리아산(골고타)으로 이끄신 성자의 사랑, 바로 이 사랑이 가장 심오한 진리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귄위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리 2,7)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거나 냉담한 분이 절대 아닙니다. 비록 가르침을 주시는 중에 이따금 매우 슬퍼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악인들이 그분께 상처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분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내 당신의 분노조차도 사랑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부정(不貞)과 죄(罪)를 내치도록 하려는 보다 심오한 초대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에제 18,23)

이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마음으로 오셨는지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마음, 즉 성심은 주님 사랑을 확인해주는 명확한 증거이며,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끊임없이 증명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알아보는 것 

여러분께 털어놓을 것이 있습니다. 저를 매우 유감스럽게 만들어 행동하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얘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엄청난 행복에 관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 관한 생각입니다. 그들은 이름도 모르는 기쁨을 찾으려고 눈먼 사람들처럼 살아갑니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길 위에서 방황합니다. 이들 중 어느 누가 트로아스에서 꿈에 환시를 본 뒤 바오로 사도가 가졌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오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사도 16, 9-10)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통해서 그분께서는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따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을 별것 아닌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상적으로 불화와 질시 속에 시간을 낭비합니다. 훨씬 더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지닌 신앙이나 신심의 특정한 측면을 꼬투리 잡아 억지로 분노하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는 대신 파괴를 일삼고 비판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우리는 가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심각한 문제점들을 발견합니다. 그런 문제들이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들의 단점이 아닙니다. 진짜로 중요한 유일한 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얘기해야 하는 주제는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예수님의 성심을 공경하는 데 있어서 위기가 닥쳤다는 추측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위기가 아닙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진정한 공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진정으로 살아 있으며, 인간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의미로 충만합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를 회개와 자기희생으로 이끌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구원의 신비를 사랑하며 이해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정한 성심 공경과 쓸모없는 감상의 표현을 구별해야 합니다. 정통교리가 배제된 허울뿐인 신심과도 구분해야 합니다. 여러분 못지않게 저도 그저 보기에만 그럴듯한 가식적인 예수성심 조각상이나 모형 같은 것들을 싫어합니다. 그런 것들은 일반적인 상식과 그리스도인의 초자연적 관점을 함께 지닌 사람들에게 공경의 마음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이런 특별한 문제들은 앞으로 사라지게 되겠지만, 이를 일종의 교리나 신학적 문제로 돌리는 것은 그릇된 논리입니다.

만약 실제로 위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 마음속의 위기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편협하며 워낙 시야가 좁아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사랑의 깊이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성교회가 ‘예수 성심 대축일’을 제정한 이후 대축일 전례는 바오로 성인의 서간을 독서에 포함시킴으로써 참된 신심의 양식을 제공해왔습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 바오로 성인은 지식과 사랑, 기도와 생활을 아우르는 ‘관상하는 삶’의 전체적인 흐름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러한 관상의 삶은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의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여정을 우리가 따라오도록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에페 3,17-19)

하느님의 충만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드러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머무르는” (콜로 2,9) 곳이 바로 예수 성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생과 구원, 그리고 성령 강림을 통해 이 세상에 넘쳐 흐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이 위대한 계획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섬세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참된 공경 

“예수 성심”이라는 말 안에 담긴 풍성함에 대해 알아봅시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 관해 얘기할 때 우리는 단순히 그 사람의 감정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대하는 ‘그 사람 전체’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성경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곧잘 씁니다. ‘마음’이 담고 있는 모든 인간적 의미들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마음’은 한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한 요약이자 원전(原典)이며 표현인 동시에, 그 표현의 근거를 뜻합니다. 한 사람의 가치는 곧 그 마음의 가치인 것입니다.

마음이 기쁠 때 성경은 “제 마음 당신의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시편 13,6) 라고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은 “제 마음은 밀초와 같이 되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 (시편 22,15), 하느님을 찬양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말이 제 마음에 넘쳐흐릅니다.” (시편 45,2), 주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결심은 “제 마음 든든합니다. 하느님” (시편 57,8) 그리고 사랑하며 경계하는 마음은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지요.”(아가 5,2)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또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나를 믿어라.” (요한 14,1)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느낄 뿐 아니라 알아서 깨우치고 이해합니다. 하느님의 율법은 마음에 받아들여져서 그 마음에 새겨져 남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마태 12,34)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마태 9,4) 그리고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를 한데 모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마태 15,19)

‘마음’에 관해 얘기할 때 성경은 기뻐하거나 눈물 흘리는 등의 떠도는 감정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이란 말은 존재 전체, 영혼과 육신의 갈 길을 정하는 ‘한 사람의 특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1)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그대로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성심에 관해 얘기할 때,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확실함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헌신의 진실함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을 권할 때, 온전히 예수님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감정, 생각과 말과 행동, 그리고 우리의 기쁨까지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진정한 공경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과 우리들 자신을 함께 아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고 가르치고 이끄시도록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을 훼손할 수 있는 가장 천박한 요인은 ‘인간성이 결핍된 사람’입니다. 이는 강생하신 하느님의 실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성심 가득히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인간과 사물의 가치’에 대한 유창한 설명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행복, 그리고 인간의 삶은 참으로 소중해서, 인간을 구원하고정결하게 하며, 다시 살게 하기 위해 성자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어느 관상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토록 상처 입은 성심을 누가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사랑을 사랑으로 갚지 않겠습니까? 이토록 순결한 마음을 어떻게 끌어안지 않겠습니까? 육신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사랑을 사랑으로 되갚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손발에 못 박히신 우리의 상처 입은 그분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곁에 있을 것이고 그분의 성심에 기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그분의 사랑이 한데 이어질 만큼 우리가 가치 있는 사람이기를 빕니다. 또한 우리도 그분처럼 우리 마음이 창에 찔릴 값어치가 있는 사람들이기를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여전히 완고하고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기도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영혼들이 처음부터 그분께 봉헌했던 생각이자, 애정이며, 대화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래서 인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성심과 하느님의 사랑을 실제로 알고자 한다면, 신앙과 겸손이 모두 필요합니다. 신앙과 겸손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글을 쓰도록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쉴 수 있을 때까지 결코 쉬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겸손하지 않다면 하느님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애쓸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식이 아닌 자기 뜻대로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1코린 11,24) 라고 하시며 인간이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오만한 인간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인간의 한계 안에 가두려 합니다. 그런 다음 차갑고 맹목적인 이성이 등장합니다. 맹목적인 이성은 신앙이 깃든 마음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세상 일을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올바른 마음씨와도 전혀 다릅니다. 이런 류의 이성은 모든 것을 자신의 편협한 인간적 경험으로 축소시키려는 개인적 시도에 갇혀 비이성적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초인간적인 진리는 빈곤해집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은 껍질을 자라게 하고 그 껍질 때문에 성령의 활동에 둔감해지고 맙니다. 만약 하느님 자비의 권능이 우리가 가진 비천함의 장벽을 허물어 주시지 않는다면, 한계로 가득한 우리의 지성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에제 36,26) 오직 하느님의 도움이 있어야만 우리의 영혼이 다시 눈뜰 수 있고, 거룩한 성경의 약속을 들어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계획이지 재앙을 위한 계획이 아니다.” (예레 29,11)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의 전례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예수님 안에서 확실히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비난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비열함과 옹졸함을 꾸짖으러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며, 평화와 기쁨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대하시는 경이로운 방법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변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 완벽하게 새로운 광경이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안도감과 심오함, 그리고 빛으로 가득한 전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사람들 이끌기 

하지만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 대신에 올곧은 영(靈)의 의지를 네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로 함께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제 부모와 친구들을 사랑하는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와 성령, 그리고 성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아무리 반복해도 저는 질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결코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진실하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한 사랑이라면, 그런 인간의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는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1코린 15,28)” 때, 우리가 천국에서 나누게 될 사랑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나날이 인정 많고 관대하며 헌신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을 반드시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참으로 단순하게, 조금의 자만심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더불어 나눌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회에서 직장 일을 하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여러분의 직업을 진실한 봉사로 바꿔놓을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가능한 모든 기술적, 문화적 이점을 활용해 여러분이 하는 일이 잘 돼야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기심이 아닌 관대함이 동기가 되고,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닌 모두의 복지를 지향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삶의 느낌으로 충만해져서 일을 한다면, 여러분이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고 인류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을 통해서, 인간관계의 모든 네트워크를 통해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보여야 합니다. 또한 친교와 이해, 인간적인 애정과 평화를 위한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티나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신” (사도 10,38)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가족관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직장에서, 또한 여러분의 문화와 여가활동 중에서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의 왕국이 여러분 마음에 이르렀다는 최고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성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1요한 3,14)

하지만 ‘예수 성심’이라고 하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성심을 꼼꼼히 바라보고 묵상할 때에만, 우리의 마음이 증오와 무관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사가 루카 성인이 예수님께서 나인 고을에 가셨을 때를 묘사한 장면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치십니다. 그분은 그냥 지나쳐 가시거나 사람들이 당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먼저 과부에게 가셨습니다. 과부의 슬픔에 마음이 움직이신 것입니다. 과부는 이제 막 자신의 모든 것인 아들을 잃었습니다.

루카 성인은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설명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라자로가 죽었던 때와 같은 기색을 보이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결코 무감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가 먼저 인정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을 경외할 것이며 기적의 이야기를 온 지방에 퍼뜨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효과를 바라고 인위적으로 행동하는 분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였고, 그녀를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에게 다가가 “울지 마라” (루카 7,13) 하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이렇게 얘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네가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기쁨과 평화를 주기 위해 지상에 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권능의 징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기적보다 당신의 연민이 먼저였습니다. 이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성심이 따뜻하다는 명백한 징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처럼, 순결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 하느님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을 ‘인간적인 애욕과 섞이지 않은 것, 오염되지 않은 것’ 정도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말 것입니다. 건조하고 영혼 없는 ‘형식적 사랑’만을 베풀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애정과 인간적 온기가 담긴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람의 마음을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죄와 벌의 상황으로 오도(誤導)하는 그릇된 이론들과 옹졸한 변명들을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예수 성심 대축일’에 우리는 이웃의 고통에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달라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만, 이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뇌를 치료하는 진정한 약이 바로 사랑이요 애덕(愛德)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위안들은 잠시의 효과도 갖기 어렵고 고통과 절망만을 뒤에 남길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면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해와 헌신, 애정과 자발적 겸손이 깃들어 있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율법을 두 가지 계명, 실제로는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하신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 말고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따금 이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잊고 실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여러 가지 예를 떠올릴 겁니다. 시급히 시정돼야 할 불의(不義)와 고쳐지지 않는 온갖 학대(虐待), 항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 없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차별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심판 장면’을 묵상해봅시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마태 25,41-43)

고통과 불의에 대항하지 않고, 그 고통과 불의를 감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개인이나 사회는 그리스도 성심의 사랑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들의 다양한 해결책을 찾고, 이를 실제로 적용하는 데 있어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에 봉사하겠다는 같은 열망 안에서 하나로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사람들의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삶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교라면 하느님과 인간을 기만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평화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여러분께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열정을 다해서 분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를 얘기하자면, 우리 인간이 진정 정의로워지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맺는 관계들이 증오와 무관심이 아닌 사랑에 의해 영감을 받으려면 너무 먼 길을 가야 하는 까닭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사 우리가 부의 합리적 분배와 조화로운 사회조직을 이루어낸다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에는 병마와 오해, 고독,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절감(切感)해야 하는 고통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통의 무게와 마주 서서 그리스도인이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정한 해답, 유일하고 결정적인 답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하느님입니다. 창에 찔린 채 당신의 성심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를 미워하시며 불의를 저지른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가 발생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원죄의 결과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성심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간절히 정의를 바라는 배고픔과 갈증… 그분은 이 모든 아픔들을 십자가를 통해 당신 홀로 온전히 짊어지셨습니다.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선 모든 인간의 삶에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아픔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여러분께 숨기지 않겠습니다. 제 인생에도 자주 아픔이 있었고, 몇 번이고 정말로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를 여러분께 기쁘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만나야 한다는 진리를 항상 강론해왔고, 또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불의와 악(惡)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열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도 맞서 싸워왔습니다.

고통에 관해 얘기할 때 단순히 이론만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고통과 맞닥뜨려서 여러분의 영혼이 흔들린다고 느낀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의 치유책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때 저는 다른 사람의 경험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갈바리아산의 수난 장면은, 고통은 거룩하게 변모해야 하며 우리는 십자가와 하나 되어 살아야 한다는 진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면, 그 어려움은 속죄(贖罪)와 배상(賠償)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은 또한 예수님의 운명과 그분의 생명을 우리가 함께 나누도록 해줍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고뇌를 스스로 기꺼이 겪어내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태어나고, 생활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공격받고, 모욕당하고, 헐뜯기고, 중상모략에 걸리고, 부당하게 비난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당신을 배신하고 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고독을 실감했고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 계십니다. 인류의 머리이자 맏이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같이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통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수난을 견디기 힘드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간청하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용서하시면서 묵묵히 죽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처럼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자세는 닥쳐올 비극적 운명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승리를 예감한 사람의 성취감입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통해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악과 불의와 죄에 맞서 평화의 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형편이 결코 확정된 상태가 아님을 공표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영광스러운 영적 승리를 얻게 해줄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나인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물론 다른 예들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장면들로 넘쳐나니까요. 각각의 사건들마다 벗이 아파할 때 함께 고통받는 한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교회는 상처 입으신 성심으로부터 태어났다네.” 활짝 열린 이 예수 성심으로부터 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비록 잠시 지나치는 생각일지라도 여기서 우리는 성사(聖事)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사들을 통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힘을 우리가 더불어 나누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체성사를 떠올릴 때마다 어떻게 특별히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성체성사는 갈바리아산의 거룩한 희생이며, 동시에 그 거룩한 희생이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피 흘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었고, 그 힘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며, 우리의 모든 활동과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방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스도의 성심은 곧 그리스도인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내어놓을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러한 ‘자기 증여’의 원천은 단순히 우리들 자신의 열망이나 노력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망과 노력은 수시로 흔들리고 허약하니까요. 자신을 내어주는 삶은 우리에게 주신 은총으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그 은총은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마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내적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결코 낙담하거나 의기소침해선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일상 삶에서, 가장 소박한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지 생각해달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인간 행동의 본질이 바로 그 물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학적 미덕들을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힘과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의 결실입니다. 그분의 성심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해봅시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신비입니다. 성부와 성령을 향한 성자의 사랑 또한 불가해합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를 이어주는 사랑의 끈이신 성령께서는 말씀 안에서 인간의 마음과 만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이런 핵심적 요소들을 얘기할 때면, 우리들 사고(思考)의 한계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계시(啓示)의 위대함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을 한참 넘어서는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겸허하고 확고하게 이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증거들을 통해 진리임을 압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마음 깊이 계신 사랑이 인간에게 내리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 성심 안에 계신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분과 친밀하게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처’가 됨을 의미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요한 14,21) 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영혼에 오셔서 그곳에 당신들의 집을 만드셨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모든 태도는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갈망하게 되고, 시편의 말씀이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 우리 마음속에서 이런 공허함을 일으키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들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요한 7,37)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성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마음으로부터 안식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초대를 받아들인다면 그분의 말씀이 진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더욱 커질 것이고,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머무르셔서 그분의 빛과 온기를 우리로부터 결코 거둬가시지 않도록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불길에 다가갔습니다. 그 불길로 우리의 삶을 온전히 태우도록 합시다. 하느님 사랑의 불길을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그 거룩한 불을 온 세상에 퍼뜨리겠다는 열망을 키워갑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거룩한 불길을 가르쳐준 사람들 역시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하고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심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왔을 때 절정에 이를 그분의 평화를 사회와 교회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혼 안에 심는 것입니다.

성모님, 당신은 평화의 모후이십니다. 당신께서는 깊은 신앙으로 천사가 알려준 주님 잉태의 예언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성모님,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장하게 도우소서. 굳건한 희망과 더욱 깊은 사랑을 갖도록 도와주소서. 바로 그것이 오늘날 당신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이며, 그분의 성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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