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우리의 기쁨이신 ‘성모 마리아’ (1961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강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하늘로 올리시어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천사들이 기쁨에 겨워 노래합니다” 천사들과 사람들 모두 기쁨에 넘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가득 이토록 친근한 기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영혼이 온통 평화로 충만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의 어머니께서 영광스럽게 되심을 축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성모님께 어떻게 영광을 베푸시는지를 보면서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가 특별히 기뻐하는 것이 참으로 자연스러운 까닭입니다.

성모님의 복되신 아드님이자 우리 형제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갈바리아산에서 그분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요한 성인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엄청난 슬픔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과 함께 성모님을 받아들였습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고통 중에 우리를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린다” (루카 2,35) 라는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모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성모님의 승천을 지금 모든 민족들이 기념합니다. 성부의 따님이자, 성자의 어머니이시고, 성령의 배필이신 분, 하느님을 제외하면 그 누구보다 위대하신 분, 바로 그 성모님께서 천국에 들어 환영받으신 것입니다.

사랑의 기적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신비를 마주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대상이 되는 위대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신앙이 주는 빛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거룩한 비밀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얘기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들 어머니에 관한 일인만큼 우리 신앙의 다른 진리들보다 우리가 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어머니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우리가 모시는 바로 그 한 분을 선택했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모든 가능한 은총으로 그분을 찬양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그분의 권능이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오래전에 이런 생각을 했는지 봅시다. ‘다마스커스의 요한 다마스체노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기를 낳으셨음에도 당신의 동정을 그대로 보전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승에서 당신의 삶이 다한 뒤에도 육신이 허물어지지 않고 그대로 계신 것은 당연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태중에 창조주를 품으시고 아기로 태어나게 하셨으니 천국에 머무르시는 것은 적절했습니다. 하느님의 배필이 되신 분이 천국의 집으로 불려 올려지신 것은 합당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아드님을 목격하고 성자를 낳으실 때와 같은 고통으로 마음 깊이 아파하셨으니, 그분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성자를 관상(觀想)하시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당신 아드님에게 속한 것을 가지시고,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종으로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공경을 받으시는 것은 타당했습니다.”

신학자들은 성모 마리아께 쏟아진 넘치는 은총과 그 은총이 당신의 승천으로 절정에 이른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있어 빈번히 같은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왜 당신 어머니께 가능한 모든 특은(特恩)을 허락하셨는지에 대한 가장 명확한 이유입니다. 은총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하셨던 순간부터 시작됐습니다. 성모님은 사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아름답고 영육 간에 흠이 없으며 순결한 분이십니다.

조용한 희생의 신비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당신 어머니를 찬미하신 것이 진실이라면, 성모님의 고통, 그리고 노동이나 믿음의 시험으로 인한 그분의 괴로움을 경감해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똑같이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마을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7-28) 이는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소서” (루카 1,38)라고 하며 순명하신 어머니께 대한 찬사였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신 당신 말씀을 진정으로 아낌없이 살아내셨으며, 그에 따른 모든 결과들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화려하게 사시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루하루를 숨어서 말없이 희생하며 지내셨습니다.

이러한 진실들을 묵상해보면, 우리는 하느님의 논리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네 삶의 초자연적인 가치는 어마어마한 과업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과업이 엄청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의 지나친 상상 때문입니다. 오히려 매일매일의 일상적이고 사소한 희생의 기회들을 아낌없이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삶의 초자연적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품어 안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 거룩하게 되기 위해 우리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처지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겉으로는 가치 없어 보이는 것들을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요. 성모 마리아께서 바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성모님은 은총으로 가득하셨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분이며, 모든 천사와 성인들보다 높은 곳에서 찬미 받으시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창조되신 분입니다. 고통과 슬픔,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하느님의 계획을 들으시기 전까지는 당신이 태초부터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미천한 피조물로 여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참으로 겸손하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 (루카 1,49)라고 인정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순결하심과 겸손하심, 그리고 관대하심은 우리들의 가증스럽고 이기적인 모습과 확연히 대비됩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 만큼 성모님을 닮겠다는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모님의 충실하심을 본받기 위해 분투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안에서 큰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미소함은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미소한 것들을 선택하심으로써 당신 사랑의 권능이 더욱 드러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 닮기 

우리의 어머니는 하느님 은총에 응답하는 본보기와 같은 분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성모님의 삶을 깊이 묵상한다면, 일상에서의 우리 존재를 거룩하게 하는 데 필요한 빛을 주님께서 내려주실 것입니다. 성모님께 봉헌된 축일들과 또 다른 날들을 기념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정 마리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놓이셨다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상상해봅시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쓰며 그 순간들을 잘 활용한다면, 우리는 꾸준히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치 아이들이 그들의 어머니를 닮듯이 우리도 성모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닮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모님의 사랑을 닮읍시다. 사랑이란 그저 좋은 느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려면 우리의 대화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행동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동정 성모님께서는 단순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확고하면서도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하셨고 이를 수행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온전히 다 바쳐서 그분께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진실로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초자연적인 품위를 닮아야만 합니다. 그분은 구원의 역사에서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은 피조물이십니다. 왜냐하면 성모 마리아로 인하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기” (요한 1,14)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는 조용한 증인입니다. 당신 자신의 영광을 좇지 않으므로 칭찬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어린 아드님을 둘러싼 신비에 언제나 함께하셨지만, 그러한 신비들은 말하자면 ‘평범한’ 신비입니다. 거대한 기적들이 일어나고 군중이 놀라 환호할 때 그분은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작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왕으로 추앙받으셨을 때 우리는 마리아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도망가 버린 뒤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 곁에 다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의 이러한 행동방식은 그분 개인의 위대함과 심오함, 그리고 영혼의 성스러움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그분의 모범에 따라 우리는 맹종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에게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복종하는 어리석은 처녀의 태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주의 깊게 경청하며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 물어보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복되신 동정녀, 모든 우리 행동의 스승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은 굽신거리는 게 아니며, 우리 양심을 멀찍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내적으로 깊이 감화되어야만 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유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학교 

주님께서는 동정 성모님의 은총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여러 가지 다른 측면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순결, 겸손, 굳셈, 관대함, 그리고 성실함 등… 성모님의 삶에서 나타나는 여러 면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성모님을 닮고 싶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여러분께 이러한 성모님의 모든 특성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특징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적 성장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모님께서 사셨던 ‘기도하는 삶’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어머니께서 주시는 은총을 잘 이용한다면, 그리고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성령의 감화를 언제라도 따라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마주 대하는 일에 진심으로 전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익명의 군중 속으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내적 생활이 하느님과의 개인적 만남과 무관하다면 그런 내적 생활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교와 가장 맞지 않는 것이 바로 ‘피상성(皮相性)’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마냥 단조롭게만 살아간다면 이는 관상적인 영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각자 그분께 응답해야 합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1사무 3,5) 이렇게 말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을 수 있죠.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 거죠?” 하느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일, 그리고 여러분의 하루를 채우는 모든 일들… 그것 말고 무슨 할 얘기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탄생, 그분이 우리와 함께 보내신 시간, 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삶,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 그리고 수난과 죽음, 부활… 이런 내용들에 관해 얘기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앞에서 성모님을 우리의 중재자로 부르고, 우리의 아버지이자 주님의 아버지인 요셉 성인께 우리의 대변자가 되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해나가는 일상의 일과, 우리의 가족과 친구 관계, 그리고 우리의 큰 계획과 작은 단점 등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제 기도의 주제는 곧 제 삶의 주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하느님과 이야기 나누는 방법입니다. 제가 처한 상황을 깊이 생각해보면 특별하고도 굳센 결심이 떠오릅니다. 변화하고 개선하며, 하느님 사랑 앞에 더욱 온순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것은 진지하고 구체적인 다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께 대한 간청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의 확신만큼이나 절박하게 “우리를 결코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피신처 하느님” (시편 43,2)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매우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매일 살아가는 생활환경 안에서 일어납니다. 모든 일이 우리네 삶의 일상적인 리듬을 따라갑니다. 하루하루가 똑같고 심지어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겉으로는 너무도 평범하게 보이는 우리의 상황들이 거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함께하시기를 원하시며, 심지어 우리의 가장 무의미한 활동들조차도 그 내부로부터 생명력을 주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명확하고 객관적이며 초자연적인 사실(실재-實在)입니다. 이는 역사의 기록에 이름을 남길 수 없는 우리들을 위로하려는 경건해 보이는 듯한 배려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가게에서, 교실에서, 들판에서 하는 모든 일들, 어떤 종류의 육체노동이건 지적 직업이건 간에, 그 일이 단 한 번이건 수천 번 반복되는 일이건 간에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나쁜 기질이나 성향을 스스로 다스리기 위한 우리의 숨겨진 희생에도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여러분의 기도 안에서 이런 생각들을 되새겨보십시오. 예수님께 ‘당신을 경배합니다’라고 말씀드리기 위해 이러한 생각들을 활용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세상의 한가운데에서도, 거리의 소음 속에서도,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관상가(觀想家)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는 학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 공부입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최고의 스승이십니다. 왜냐하면 동정 마리아께서는 당신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관계없이 항상 그런 신앙의 자세, 초자연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를 견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51)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우리를 관상가(觀想家)로 만들어 달라고 청합시다. 우리를 가르치셔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부르심을 깨닫게 해달라고 부탁드립시다. 지금 그분께 간구합시다. ‘우리의 어머니, 당신은 예수님을 낳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북돋우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그 은총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사도들의 스승 

그러나 우리들 자신만을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모든 인류를 끌어안을 때까지 넓혀 가십시오. 우선 여러분의 친척과 친구, 동료들처럼 여러분과 가까이 있는 분들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주님과의 더욱 깊은 친교를 깨닫게 되는지를 보십시오. 그들이 바르고 귀하며 하느님께 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특별히 우리 성모님께 그들을 인도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모든 영혼들을 위해서도 성모님께 간청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타고 항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충실하고 관대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몸,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성교회(聖敎會)를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온전한 진리를 찾는 이들은 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사랑의 본질과 깊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펼쳐보여야 할 막중한 의무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일 수 없습니다. 만약 이기적이라면 자신이 받은 소명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선함을 무시하면서 자기 영혼만의 평화를 지키는 데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입니다. 물론 그러한 평화는 당연히 거짓 평화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결코 구경꾼으로 태평하게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실천적이고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행동에 전혀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현실적인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그 장애물은 ‘그릇된 존경의 형식’을 취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일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영성적인 주제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꺼리는 겁니다.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을 내켜 하지 않는 것이죠. 이러한 사고는 참으로 빈번하게 이기심의 가면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처의 문제가 아니라 도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비록 개인적으로 매우 부족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숱한 단점들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1티모, 2,4) 이것이 바로 그 기쁜 소식입니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허락을 구하시지 않고 우리 삶에 들어오셨습니다. 당신의 첫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르 1,16-17)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아니요”라고 말하는 그릇된 자유까지도 갖고 있습니다. 루카 성인이 언급한 부자 젊은이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가서 가르쳐라” 라고 하신 그리스도 말씀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그리고 이 위대한 인간적 주제에 대해 얘기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향한 열망은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당신 아드님의 사랑을 만방에 알리려는 모든 이들의 여왕이시여, 당신은 우리의 고통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남루한 삶을 위해 예수님의 용서를 청해주소서. 불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재가 되어 버렸으며, 꺼져버린 등불이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된 우리의 초라한 삶을 위해 용서를 구해주십시오.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당신이 청해주시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해 용서를 청해주심과 함께 신앙과 사랑의 삶을 진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주소서.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다른 이들과 더불어 나눌 수 있습니다.

유일한 처방: 개인의 거룩함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는 용기는 모든 인류를 섬기겠다는 실질적인 갈망으로부터 옵니다. 그런 사도직 활동의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는 특효약이 다름 아닌 ‘믿음, 희망,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룩해지는 것이지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거룩해지는 것 말고 저는 다른 처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인 오늘 우리는 온 교회와 하나 되어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따님이며 배필이신 성모님의 승리를 기념합니다. 주님께서는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베들레헴에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과 함께하신 뒤 아드님 곁에서 영육 간에 영원한 영광을 누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비와 구원의 은총에 기뻐하듯이 지금 우리는 성모님의 영광에 행복합니다.

하느님 계획의 신비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를 위한 구원사업에 온전히 함께하신 성모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이 가시는 길을 그대로 따르셨습니다. 베들레헴의 가난과, 나자렛의 알려지지 않은 생활 중에 겪으신 하루하루의 노동, 갈릴래아 카나에서 드러내신 성자의 신성(神性), 예수님께서 수난 중에 당하신 고문과 십자가 위에서의 거룩한 희생, 그리고 이어지는 천국의 영원한 축복에 이르기까지… 아드님의 모든 행로에 함께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곧바로 영향을 끼칩니다. 왜냐하면 이 초자연적인 여정이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이 길을 걸을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닮는 길’을 앞서 가셨으며, 성모님의 영광은 우리들이 구원받으리라는 굳건한 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을 “우리의 희망, 우리네 기쁨의 원천”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며,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나아가리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과업을 우리 안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 8,31-32)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에 모든 것이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들 개개인이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확고한 희망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수동적으로 그냥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날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 그분의 멍에를 받아들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다는 뜻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이라는 이 기회를 맞아 다시 한번 상기합시다. 부활의 기쁨은 십자가 고통의 결과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 말씀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오너라! 네가 지은 죄를 청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너라! 나는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영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너의 구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내가 멍에에 대해 말할 때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은 달콤한 멍에이다. 내가 짐에 관해 말할 때 겁내지 마라. 그 짐은 빛이다.”

우리들 개개인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룩하게 되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가는 길은 슬픔에 찬 여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당신 자신이 직접 우리를 도우러 오시고 그분과 동행할 때에 슬픔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영혼이 기쁨으로 가득 차 거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한 주제를 다시 봅시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국에 가셨고 천사들이 기뻐합니다. 천상 낙원에서 성모님을 기다리셨던 그분의 가장 순결한 배필 요셉 성인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남은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바로 여기 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모두 순례자요, 여행자라고 우리의 신앙은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몫은 희생과 고통, 가난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은 기쁨의 율조로 새겨져야 합니다.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시편 100, 2) 주님을 섬기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기쁘게 주는 이’란 온 마음을 다해 희생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낙관주의가 도에 지나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단점과 실패들에 익숙해 있지 않나요? 고통과 권태, 배은망덕, 그리고 심지어 증오조차도 우리에겐 낯설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존재들이라면, 우리 인간의 본성에 항상 따라붙는 이 고통의 동반자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끈질기게 마주치는 고통과 좌절, 슬픔과 고독을 그냥 무시해버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확실하게 가르쳐줍니다. 삶의 이러한 수긍할 수 없는 일면들이 결코 눈먼 운명 때문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의 운명은 행복에 대한 열망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은, 우리 주위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뜻하심이 깃들어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초대를 담고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물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이러한 초자연적인 이해가 인간 삶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초자연적 이해는 오히려 인간 삶의 이런 복잡성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유쾌하지 못한 삶의 표면(表面)을 넘어서면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강한 유대(紐帶)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파괴되지 않는 강한 유대’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천국에서 누릴 최종적인 삶이 서로 굳게 이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이 기쁨에 찬 희망의 근거를 우리가 인정하도록 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가 우리보다 앞서가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신 그곳에서 우리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해주십니다. 우리가 성실하다면 우리는 천국의 집에 도달할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우리의 본보기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당신이 우리 어머니이심을 보여주세요” 하고 그분께 간청한다면, 성모님께서는 어머니의 돌보심으로 당신 자녀들을 보살펴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은 보물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거슬렀을 때만 우리는 그 기쁨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는 이기심의 열매이고, 이기심은 슬픔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우리 영혼의 파편 아래로 약간의 기쁨이 살아남습니다. 하느님도, 성모님도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회개해서 그 슬퍼하는 몸짓이 우리 마음으로부터 우러난다면,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나 용서하시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슬픔도 우리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 32) 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겐 오직 기뻐할 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돌아온 탕자’ 예화의 놀라운 결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무리 많이 묵상해도 질리지 않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맞으시기 위해 허리를 굽히시고, 사랑과 다정함의 표시로 입을 맞추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새 옷과 반지와 발에 맞는 신발을 가져다주라고 하인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야단맞을까 봐 겁내지만, 그분은 여러분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여러분에게 입을 맞추십니다. 여러분은 험한 말로 질책받을까 무서워하지만, 아버지는 여러분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도 관대하신 분이라면, 그런 분이 항상 당신께 충실했던 원죄 없으신 어머니, 동정 성모님께 어떻게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자주 하느님을 배신합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이 너무 작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이뤄주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았던 성모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뤄지겠습니까?

보십시오.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이것을 설명하기보다는 찬미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성모님을 칭송하는 우리들 각자의 열정이 더욱 커질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다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부족할 것입니다.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묵시 12,1) “임금님이 너의 아름다움을 열망하시리니 그분께서 너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 엎드려라. 한껏 화려하게 꾸민 임금님 딸이 금실로 수놓은 옷에 싸여 안으로 드는구나.” (시편 45, 12,14)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성모 마리아의 말씀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 말씀 안에서 최고의 겸손이 최고의 영광과 한데 이어집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루카 1,48-49)

가장 감미로우신 성모 성심이시여, 안전한 길을 예비해 주소서. (Cor Mariae Dulcissimum, iter para tutum). 이 땅에서 저희가 항상 마음 놓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하소서. 저희를 위해 당신께서 저희가 따라갈 길이 되어주소서. 당신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을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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