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maría Escrivá Ob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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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모든 전례가 그렇듯이 오늘의 전례 역시 평화를 기념합니다. 성지(聖枝)는 그 유구한 상징성으로 볼 때 창세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창세 8,10-11)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되고 또한 굳건해졌음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 이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신약 안에서 구약이 경이롭게 일치되고 결합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를 통해 기쁨의 말씀을 읽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어떻게 경배 받았는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히브리 아이들이 올리브 가지 손에 들고 주님을 맞으러 나가 외치는 환호소리 ‘하늘 높은 곳에 영광’”

예수님을 맞이하는 환호의 노래(歡呼頌)는 베들레헴에서 그분이 탄생하셨을 때 드렸던 환호송과 우리의 영혼 안에서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사가 루카 성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가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예수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의 무리가 다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루카 19, 36-38)

하늘에는 평화… 하지만 우리는 땅을 보도록 합시다. 왜 이 세상에는 평화가 없을까요? 맞습니다. 정말 평화가 없습니다. 단지 ‘평화처럼 보이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두렵고 불안정한 상태의 타협으로 잠시 균형이 이뤄질 때 나타나는 겉치레식 평화만 존재할 뿐입니다. 심지어 교회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흰 예복을 찢는 듯한 긴장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세속적 활동에 몰입함으로써 영혼의 불안을 감추려 합니다. 결코 그들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들로 얄팍한 만족을 얻고자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슬픈 뒷맛만을 남길 뿐입니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지(聖枝)는 경배를 상징합니다. 성지(聖枝)가 승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이기시는 순간에 와 계십니다. 십자가의 표징 아래서 그분은 죽음의 왕자인 악마에게 승리하시려는 순간에 와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이 승리자이신 까닭입니다. 싸우셨기 때문에 그분은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싸움은 인간의 마음속에 가득한 악마와 대결하는 힘겨운 투쟁이었습니다.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길’이십니다. 우리가 평화를 찾고자 한다면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가야 합니다. 평화는 전쟁과 투쟁의 결과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이뤄지는 수덕적(修德的) 투쟁의 결실입니다. ‘수덕적 투쟁’이란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무관한 자기 삶의 모든 것들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교만과 육욕, 이기심과 천박함, 그리고 비열함을 이겨내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인간의 양심에, 그들 영혼의 중심에 평온이 없다면, 밖에서 외적인 평온을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오기” (마태 15,19)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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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쩐지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 방식 같지 않습니까? 좀 더 현대적인 언어로 바뀌지 않았을까요? 학술용어 같은 말로 개인의 결점들을 감추는 그런 언어 말입니다. 확실히 가치 있다고 사람들끼리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살 수 있는 ‘돈’, ‘영향력’,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항상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해주는 ‘약삭빠름’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 식의 소위 현대적 사고방식은 스스로를 ‘성숙한 어른’이라고 규정하면서 종교마저도 무시합니다.

저는 비관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래 본 적도 없고요.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셨다고 신앙이 제게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 승리의 약속으로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 또한 투신(投身)입니다. “싸우라”는 뜻이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부르심에 따라서 사랑으로 투신해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우리는 이 소명을 자유의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끈질기게 싸우도록 우리를 재촉하는 의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우리가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한다면,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과 누룩이 되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하느님의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결심을 지켜나가겠다는 우리의 다짐은 더 나아가 정의의 의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이 의무는 끊임없는 투쟁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모든 전승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군대(milites Christi)’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나쁜 성향들과 쉬지 않고 맞서 싸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군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초자연적인 식견이 너무 짧아서, 사실 신앙이 깊지 않기 때문에 전쟁과도 같은 지상의 삶에 대한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술궂게 에둘러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군대라고 여긴다면, 세속적인 의도로 신앙을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압력을 가하거나, 별도의 고립된 작은 집단을 따로 만든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러나, 이런 순진해빠진 생각은 완전히 비논리적이며, 보통 겁 많고 안락함을 좋아하는 심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광신주의보다 더 그리스도교 신앙과 거리가 먼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을 취하든 간에 광신주의는 신성(神聖)과 세속(世俗)의 불경한 결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우리의 투쟁을 우리들 각자가 자신과 벌이는 전쟁으로 이해한다면, 광신주의의 위험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투쟁은 하느님을 더욱더 사랑하고, 우리의 이기심을 뿌리 뽑으며, 온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한 노력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집니다. 뭐라고 변명하건 간에 이러한 투쟁에 등 돌리는 것은 싸우기도 전에 항복함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몰락하고, 신앙을 잃고, 마음 깊이 우울해지며, 가련한 쾌락에 빠져 이리저리 방황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현존하심 안에서, 그리고 신앙을 살아가는 모든 우리 형제들의 현존 안에서 치르는 우리의 ‘영적 전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싸움을 피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비체인 교회 전체를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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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내적 삶이란 끝없이 다시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우리가 이미 완벽하다는 교만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우리를 막아줍니다. 우리네 삶의 여정에서 온갖 어려움과 마주하는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장애물들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과 피로 만들어진 피조물일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살과 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런 장애물들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주저앉히는 욕정과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파괴적인 충동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육(靈肉) 안에서 교만과 육욕, 시기와 나태, 그리고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의 바늘을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개개인의 경험을 통해 증명된 우리 삶의 실상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런 요인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가는 이 은밀한 경기에서 이기는 출발점이자 정상적인 흐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1코린 9,26-27)

이런 투쟁을 시작하거나 또는 계속해나가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외적 징표를 기다려선 안 됩니다. 내적으로 좋은 감정이 일어나길 기다려서도 안 됩니다. 내적 삶이란 감정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으며, 기꺼이 스스로 하려는 의지와 사랑에 좌우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승리의 날에 모든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치욕의 순간에는 그들 중 거의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사랑을 하려면 강하고 성실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심장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굳건히 닻을 내려야 합니다. 변덕스럽고 피상적인 사람들만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법입니다. 그렇게 쉽사리 바뀌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좇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며 스스로를 포기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고통스러운 난관을 헤쳐가는 자기 부정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고해성사 안에서 회개하고 개선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그렇게 우리가 이 사랑의 모험을 하는 동안에는 스스로의 타락 때문에 낙담하지 맙시다. 그 타락의 정도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풀이 죽어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동의 기록만을 모으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수집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직하고 충실한 요한에게 감동을 받으셨지만, 잘못을 저지른 뒤 뉘우친 베드로에게도 똑같이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끌어당겨 당신께 갈 수밖에 없도록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루하루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을 만나시려고 엠마오로 직접 오신 것처럼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토마스를 찾아오셔서 자신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그에게 만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약점을 알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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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성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훌륭한 군사답게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2티모 2,3) 그리스도인의 삶은 투쟁이고, 전쟁입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아름다운 전쟁입니다. 분열과 증오 때문에 일어나는 인간의 전쟁과는 완전히 다른 싸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벌이는 전쟁은 스스로의 이기심과 맞서 싸우는 전투입니다. 이 전쟁은 일치와 사랑을 밑바탕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비록 속된 세상에서 살아갈지언정, 속된 방식으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전투 무기는 속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 덕분에 어떠한 요새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이론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고 일어서는 모든 오만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포로로 잡아 그리스도께 순종시킵니다.” (2코린 10,3-5)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벌여야 할 가차 없는 전쟁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교만과, 악한 일을 저지르려는 성향과, 스스로를 과시하려는 오만에 맞서 싸우는 전쟁입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결정적인 한 주간을 시작하시는 때입니다. 이날을 맞아 피상적인 질문은 제쳐두고,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인지 핵심으로 바로 들어갑시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야 하는 것도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해서 참으로 필수적인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향해 가는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에 맞서 집요하게 투쟁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벌여야 할 싸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약함을 상기시키고 우리의 타락과 실수들을 미리 내다보게 하는 싸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고려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 먼지를 일으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피조물들이고 결점투성이입니다. 우리에겐 항상 결점이 필요하다고까지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결점들은 두 가지 빛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그 하나이고, 주님의 친절하심에 응답하겠다는 우리의 결심이 또 다른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빛과 우리들 결점의 그림자가 이루는 이 같은 대비가 우리를 인간적이고 겸손하며 분별력 있고 관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들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우리는 삶에서 활력과 승리를 얻기도 하고 우울과 패배를 맛보기도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지상 순례에서, 심지어 우리가 제대에 모시고 공경하는 성인들에게도 이런 일들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베드로와 아우구스티누스, 프란치스코를 기억하지 않습니까? 마치 태어날 때부터 은총을 입은 듯 확신하며 성인들의 업적을 순진하게 늘어놓는 성인들의 전기를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인들에 관해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웅들의 진정한 삶의 이야기는 우리들 자신의 체험들과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싸워서 이기기도 했고, 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개하고 삶의 전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비교적 자주 패배한다 하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심지어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별반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서조차 매번 실패한다고 해도 결코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항상 겸손합시다. 끊임없이 참고 버티며 투쟁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패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기쁨을 가져다 드리는 수많은 승리들이 또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올바른 지향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실패와 같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이루길 바라십시오. 주님의 은총과 여러분 자신의 미소(微少)함에 항상 의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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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력한 적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현하려는 열망을 꺾으려는 적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매번 실패하고 패배하면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우리가 간구하지 않을 때 교만은 자라납니다. 그럴 경우 우리 영혼은 불행한 어둠의 그림자 속에 머물게 되며, 스스로 상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잘못된 상상이 사실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온갖 종류의 장애물을 만들어 냅니다. 조금만 겸손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사라져버릴 장애물들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이따금 교만과 거친 상상에 고무되어서 스스로 고통스러운 갈바리아산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갈바리아산에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이 어둠에 쌓여 불안에 떠는 때라 하더라도 기쁨과 평화가 언제나 우리 주님과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화(聖化)를 가로막는 위선적인 적이 또 하나 있습니다. ‘내적 투쟁이란 마치 불 뿜는 용과 맞서는 것처럼 엄청난 장애물들과 싸우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교만의 또 다른 표시입니다. 우리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싸움을 매우 시끄럽게, 나팔을 불어대듯 시끌벅적하게, 깃발을 흔들어대며 하고 싶어 합니다.

바위를 부서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은 곡괭이나 그와 비슷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아무리 날카롭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바위를 부수는 가장 무서운 적은 바위가 허물어질 때까지 그 갈라진 틈으로 한 방울씩 계속 떨어지는 물줄기입니다. 우리는 이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큰 위험은 내적 투쟁 중에 일어나는 작은 충돌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전투들을 자꾸 거부하다 보면 우리는 조금씩 물렁해지고 약해지고 무관심해져서 하느님의 목소리에 둔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루카 16,10)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것들과도 끊임없이 투쟁하거라. 너희에게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시간을 엄수해 너희 임무를 다하거라. 너희 마음에 슬픔이 있더라도 격려가 필요한 사람에게 미소 지어주거라.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기도에 바쳐라. 옥신각신하지 말고 너희를 찾는 어느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러 다가가거라. 정의를 실현하되 사랑의 은총으로 정의를 넘어서거라.”

매일 우리들 안에서 느껴지는 숱한 영감들이 있습니다. 작고 조용한 편지 같은 것이지요. 우리들 자신에게 이기기 위해 벌이는 초자연적인 경기에서 스스로를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편지 말입니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방향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당신의 빛으로 비춰주소서. 우리의 투쟁을 도와주시고 우리가 이길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소서. 우리가 타락할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마시고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결코 쉬엄쉬엄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보다 넓은 전선(戰線)에서 매일매일 더욱 맹렬하게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극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전투의 유일한 목표는 천국의 영광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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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투쟁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에서 절대 변하지 않은 유용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고행이고, 또한 자주 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행도 역시 기도지요. 육신의 감각으로 드리는 기도니까요. 그래서 추려보면, 이 방법은 두 단어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입니다.

이제 성사(聖事)에 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성사는 하느님 은총의 근간입니다. 성사는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친절하심을 확인하는 경이로운 증거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내린 교리의 정의를 조용히 묵상해봅시다. “성사란 은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 은총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고 선포하는 일종의 감각적인 징표이다.” 우리 주 하느님은 무한(無限)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다할 줄 모르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온화함과 다정하심은 한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그리고 무상으로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곱 개의 효과적인 징표를 세우셨습니다. 그 일곱 가지 징표(칠성사)는 안정감 넘치고 간단하며 쉬운 방법으로 인간이 구원의 공로를 나눌 수 있게 해줍니다.

만약 성사를 포기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사에 대해 잊은 듯이 보이며, 성사라고 하는 이 그리스도 은총의 흐름을 비웃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이러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니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해야만 합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우리가 더욱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이들 성사의 원천에 다가서도록 용기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갓 태어난 자녀의 세례를 미루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정의와 사랑에 심각하게 맞서게 됩니다. 세례를 미루는 것은 신앙의 은총을 자녀들에게서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죄로 얼룩진 세상에 태어난 한 영혼 안에 깃들어 계신 복된 삼위일체의 엄청난 보물을 앗아가는 까닭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견진성사의 참된 본질도 바꾸려 듭니다. 거룩한 성전(聖傳)은 이견 없이 견진성사를 영적 삶을 굳세게 해주는 성사로 받아들입니다. 견진성사는 더욱 많은 초자연적인 힘을 영혼에 부여합니다. 조용하면서도 풍요로운 성령의 강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군대(milites Christi)’답게 싸울 수 있게 해줍니다. 그 싸움은 이기심과 온갖 유혹에 맞서는 스스로의 은밀한 전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의 일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다면, 고해성사의 가치를 인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인간과의 대화가 아닌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 정의(正義)의 법원(法院)인 동시에, 특히 하느님 자비의 법원입니다. 그 법원에는 사랑 넘치는 재판관이 계셔서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에제 33,11)

우리 주님의 다정하심은 정말로 무한합니다. 그분이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분은 결혼을 거룩한 결합으로 만드셨고,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 상징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가정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성사로 만드셨습니다. 혼인성사로 이뤄진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평화와 화합의 장소여야 하고, 또한 성덕(聖德)의 학교여야 합니다. 부모는 하느님의 협력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를 사랑해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썼던 것처럼, 부모를 사랑하라는 네 번째 계명을 십계명 중 가장 사랑 넘치는 계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게 결혼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의 집은 평화와 기쁨 가득한 밝고 즐거운 가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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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성품성사를 통해 신자들 가운데 몇몇이 그들 영혼에 인호(印號)를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성사는 심오하고도 형언할 수 없는 성령의 감도(感導)하심으로 이뤄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인호는 그들을 사제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합니다. 주님의 신비체인 교회의 머리이신 분,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직무 사제직’은 일반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직무 사제직’을 받은 사목자들은 하느님께 거룩한 희생 제사를 봉헌하며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을 축성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해주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관한 모든 것을” (히브 5,1: 불카타 성경) 가르치는 사목활동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사제는 오로지 하느님의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는 사제의 영역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눈에 띄고자 하는 그 어떤 욕망도 거부해야 합니다. 사제는 심리학자도, 사회학자도, 인류학자도 아닙니다. 그는 또 한 명의 그리스도이며, 형제들의 영혼을 돌봐야 하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만약 사제가 어떤 인간적 학문을 기반으로 하여 교의신학이나 윤리신학에 관해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인 척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슬픈 일일 겁니다. 만약 사제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제직의 업무에 진정으로 헌신한다면, 인간적 학문에 관해서는 자신이 아마추어나 관찰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척하는 피상적인 모습이 일부 순진한 독자와 청중들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는 곧 인간의 학문에 있어서도, 신학(神學)에 있어서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일부 성직자들이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 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하려는 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교회의 영적 목표를 세속적인 목표로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혹에 사제들이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거룩한 직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되며,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잃게 될 것이고, 교회에 큰 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과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자유를 극도로 방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민사회에 혼란의 씨를 뿌리고 그들 스스로도 위험해질 것입니다. 성품성사는 신앙 안에서 형제들을 섬기는 초자연적인 성사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를 새로운 독재를 위한 세속적 도구로 변질시키려는 듯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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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의 경이로움에 관해 계속 묵상합시다. 종부성사라고 불리는 병자성사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서 마무리되는 여정을 위한 사랑 가득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과 더불어 당신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체성사를 가리켜 ‘거룩함이 과대(過大)한 성사’라고까지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미사 동안만이 아니라, 실제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당신의 성체와 영으로, 당신의 성혈과 신성(神性)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지닌 책임에 관해 자주 생각합니다. 그 책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성사의 거룩한 통로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영혼을 돕기 위해 오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특별한 개인적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을 일괄적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개별적으로 돕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과 하느님의 자녀의 존엄을 해치게 됩니다. 이는 옳지 않은 일입니다. 사제는 각각의 영혼을 개별적으로 돕는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이자 운송 수단에 불과합니다. 사제가 이런 사실을 잘 알면 겸손해지고,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혼은 하나하나가 경이로운 보물이며, 모든 사람은 저마다 아주 특별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성혈을 흘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투쟁의 필요성에 관해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투쟁을 하려면, 훈련과 적당한 몸관리, 그리고 아프거나 멍들거나 상처가 났을 때에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성사는 교회가 제공해야 하는 중요한 치료입니다. 성사는 사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진해서 성사를 포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 쉴 공기와 혈액의 순환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는 성사를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매 순간 알아차릴 수 있는 빛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성사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금욕주의는 힘을 요구합니다. 그 힘은 창조주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이고 그분은 밝은 빛입니다. 우리는 병약하고 그분은 강건하십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그분은 한없이 부유하십니다. 우리는 허약하고 그분은 그런 우리를 지탱해주십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시편 18,2) 이 땅의 그 무엇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성혈의 간절한 분출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는 우리의 눈을 가릴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은총의 원천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신자들의 의무입니다. 특히 하느님 백성들을 영적으로 관리하고 섬기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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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목자들 스스로가 민감한 양심을 가지기 위해 분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신앙의 유산을 채워주고 교회의 모든 유산을 만들어 주는 교의(敎義)와 윤리적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해 그들이 분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에 대한 설명이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에제 34,2-4)

이 말씀은 매우 신랄한 질책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은 훨씬 더 나쁩니다. 하느님을 거스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영적 안녕을 촉진해야 할 임무를 맡은 사람이 오히려 사람들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사람들에게서 영혼을 정화하는 세례수(洗禮水)를 빼앗게 되고, 영혼을 굳세게 하는 견진성사의 성유를 잃게 만듭니다. 또한 고해성사라고 하는 용서의 법원을 빼앗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평화를 위한 싸움(내적 투쟁)을 포기할 때 생겨나는 결과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사람은 육신에 얽매인 노예 상태에 스스로를 맡겨버리게 됩니다. 육신에 얽매인 노예 상태란 순전히 인간적인 사고방식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일순간에 불과한 영향력과 명성에 집착하는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허영심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육욕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이런 시험을 겪게 그냥 놔두시고, 이름값 못하는 목자를 만나게 된다 해도 충격받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게 무류성(無謬性)과 확고함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의 충직함을 보장해주지는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작은 일을 한다면, 그들에게 주시는 은총이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거룩함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제거하고자 분투한다면, 풍부하고 풍성한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노력하지 않는다면, 설사 매우 높은 지위에 있는 듯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매우 낮은 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묵시 3,1-3)

1세기에 요한 성인이 쓴 이 권고는 사르디스 교회의 책임자에게 전달됐습니다. 일부 목자들의 책임의식이 약해지는 것은 비단 오늘만의 현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셨던 바로 그 시기, 사도들의 시대에도 그런 상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분투를 그만둔다면 어느 누구라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아무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굳세게 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도움과 충고를 받아들이도록 해주는 겸손,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게 하는 고행,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보전하고 전파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견고하고 변치 않는 가르침에 대한 공부…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들 스스로를 굳세게 해주는 방법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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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전례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도록 합니다.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스스로의 이기심으로 가득 찬 요새(要塞)에 자기 자신을 가둬버린 사람은 누구라도 이 전쟁터에 나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쌓은 요새의 문을 들어 올려 평화의 임금을 들어오시게 한다면, 그분과 함께 요새 밖으로 나와 전투에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전투는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 양심을 마비시키는 온갖 고뇌와의 싸움입니다.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그리스도교가 우리에게 투쟁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항상 그렇게 요구해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이길 수 없을 것이고, 이기지 못한다면 평화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가 없다면 인간의 기쁨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고, 거짓이며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한 헛된 기쁨은 결코 인간에 대한 봉사나, 사랑과 정의, 용서와 자비의 실천으로 변화되지 않으며, 하느님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지도 못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분투를 포기해온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스스로의 나약함과 맞서 싸우는 개인적인 투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투쟁을 포기하고 나서 영혼을 타락시키는 노예 상태에 투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항상 직면하는 위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겨 달라고 끊임없이 간구해야 합니다. 이 주제에 관해 얘기하면서 저는 하느님의 정의(正義)에 관해 말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는 그분의 자비와 연민에 호소합니다. 우리의 죄를 보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우리 어머니이기도 하신 거룩하신 성모님의 공로,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신 요셉 성인의 공로와 성인들의 공로를 보아달라고 말입니다.

오늘 미사의 독서에서 읽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투쟁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오른손으로 그를 붙잡아 주시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 11,12) 이 폭력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쓰는 폭력입니다. 이는 곧 여러분이 스스로의 불성실을 드러내게 하는 용기이며,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신앙을 고백하는 대담함입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영웅적 행동’을 기대합니다. 물론 필요하다면 대단한 투쟁의 영웅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영웅적인 행동은 매일매일의 작은 전투에서 이뤄집니다. 겉으로 보기에 사소한 일들에서 사랑을 무기 삼아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갈 때 주님께서는 애정 가득한 목자로 항상 여러분의 곁에 계실 것입니다.: “내가 몸소 내 양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뉘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도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들은 제 땅 안에서 평안히 지내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멍에를 부수고, 그들을 종으로 부리는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해 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에제 34,15-1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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