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위대하신 미지의 존재… 성령 (1969년 5월 25일 ‘성령 강림 대축일’ 강론)

우리는 방금 사도행전에서 ‘성령 강림 대축일’에 관해 읽었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성령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오신 날입니다.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신 권능이 드러나는 현장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권능으로 교회의 삶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순명하심으로써 스스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죽음과 죄를 이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는 여기 거룩한 광채 안에서 눈부시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언했던 제자들은 성령의 기운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새로운 빛에 한껏 열렸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랐고 그분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그들이 항상 완벽하게 이해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실 ‘진리의 영’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그분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약했습니다. 그래서 시련의 순간에 주님을 홀로 두고 도망쳤던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벌어진 모든 일들은 이미 지나가 다시 올 수 없는 사건입니다. 굳센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을 확고하고 강하며 용감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이 예루살렘 거리에 강렬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세상 곳곳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온 남녀들이 놀라움에 가득 차 사도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파프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사도 2, 9-11) 자신들의 눈앞에서 이토록 경이로운 일이 벌어지자 사도들의 강론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신앙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루카 성인에 따르면, 베드로 성인이 말씀하시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자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고 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사도 2, 37-38) 성경에 의하면 그날 3천 명가량이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일어난 성령의 장엄한 강림은 결코 별도로 동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과 그분의 활동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찾기 어렵습니다. 성령께서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든 생활과 생계 활동을 인도하고, 갈 길을 정해주고, 활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베드로 성인의 강론에 영감을 주신 분도, 사도들의 믿음을 강하게 해주신 분도, 당신의 현존을 통해 이방인에 대한 부르심을 확신하게 해준 분도,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를 먼 나라에 보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새로운 길을 열게 하신 분도 바로 성령이십니다. 한마디로 말해 성령은 항상 존재하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어디에나 계신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심오한 사실들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기억이 아닙니다. 이미 역사 속에 묻혀버린 교회의 황금기에 대한 추억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죄와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은 오늘날 교회의 실재(實在)인 동시에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교회의 현실(現實)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 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이 땅을 환하게 밝히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영원히 엄존(儼存)하십니다. 때문에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선함을 선포함으로써 언제나 모든 일에서 온 세상 민족들 앞에 우뚝 선 표징이 될 것입니다. 너무도 엄청난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확신과 기쁨에 차서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시는 참 기쁨과 평화를 알게 해주십니다.

‘성령 강림 때 베드로에게 왔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가지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불어 나누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일러줍니다.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티토 3, 5-7)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나약함과 실패를 실감합니다. 또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몇몇 사람들의 편협함과 비열함을 아프게 깨닫습니다. 아울러 사도직의 몇몇 과업들이 명백한 실패이거나 목적을 상실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죄의 실상(實狀)과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주는 이 모든 것들이 여전히 우리들 신앙의 시련일 수 있습니다. 숱한 유혹과 의혹들이 우리로 하여금 ‘대체 어디에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있느냐?’고 묻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더욱 선명한 순결함과 굳건함으로 희망의 덕을 구현함과 동시에, 보다 더 충실해지고자 분투함으로써 그에 대항해야 합니다.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어느 날, 매우 고운 심성을 지녔지만 신앙이 없었던 한 친구와 함께 있었는데, 그가 지구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거 봐! 북쪽에서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래서 제가 물었죠. “내게 뭘 보라는 거야?”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실패를 보라는 거야. 지난 2천 년 동안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인류의 삶에 전하기 위해 노력했어. 하지만 그 결과를 보라고.” 친구의 얘길 듣고 저는 정말 슬펐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 중에도 많은 이들이 마치 그분을 모르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제 괴로운 마음은 금방 사랑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구원사업에 협력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항상 유효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참으로 충분합니다. 아니, 충분함 그 이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예가 아닌 자녀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구원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매우 감동적인 언어로 우리에게 얘기합니다. 주님 수난의 남은 부분을 우리의 육신과 우리의 삶 안에 채워 넣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콜로 1,24)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사랑과 신뢰에 응답하기 위해서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소중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으며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을 믿나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으로 인해 생명력을 얻음을 확신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죄의 용서와 부활의 희망에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문이 과연 우리 마음의 깊은 곳까지 깃들어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우리 입술에만 걸려 있습니까? ‘성령 강림 대축일’이 주는 승리와 기쁨, 그리고 평화의 거룩한 메시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데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기반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우리의 나약함 

“주님의 손이 짧아 구해내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사 59,1) 이전 시대에 비해 오늘날에 하느님의 권능이 결코 약해진 게 아닙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또한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 지구와 다른 천체들의 운동, 피조물들의 착한 행동, 그리고 역사상 이뤄진 모든 선한 일들… 간단히 말해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모든 일이 그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지나쳐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우리에게 드러내시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죄가 하느님의 선물이 보이지 않게 시야를 가리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느님께서 항상 역사(役事)하고 계심을 일깨워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십니다. 또한 당신의 은총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성령께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단 하나의 개념으로 간추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순함입니다. 이는 곧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활동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들 자신 안에서 성령이 주신 선물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성령이 영감을 주신 여러 활동과 제도들, 그리고 우리 마음 깊이 불러일으켜 주시는 애정과 결심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십니다. 우리가 미사 전례 때 부르는 찬미가에 나오듯이 성령께서는 은총의 수여자요, 우리 마음의 빛이며, 영혼의 손님이자, 노동 중의 휴식이며, 슬픔 속에 만나는 위로이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인간에게 순수하거나 가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때 묻은 이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병든 것을 치유하며, 추위를 녹이는 불을 지피고, 굽은 것을 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과 영원한 기쁨의 안전한 항구로 인간을 이끄시는 분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완벽해야만 합니다. 세상 안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 모호해져선 결코 안 됩니다.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의 권능을 쏟아부어주신 표징과 현실들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靈)께서 오실 때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16,14)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 안에서 거룩한 일을 수행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거룩한 일이란 이 땅에 사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분이 정하신 성사, 그리고 그분의 교회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성령에 대한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라 행동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성령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마치 자신은 교회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교회를 대표하는 몇몇 사람들의 부족함과 한계를 지적하고, 교회 밖에서 교회를 심판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더 나아가서, 사제가 제대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갈바리아산(골고타)의 희생을 재연할 때 성령의 특별한 중요성과 풍요로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질그릇 속의 은총이라는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다닙니다. 인간의 자유는 나약하고 허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을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이 우리를 항상 돕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과 안락함에 대한 편애 그리고 우리의 교만은 때로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거부하고 우리를 죄에 빠져들게 합니다. 저는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도신경을 낭독하며 교회의 거룩한 기원에 대한 제 믿음을 표현해왔습니다.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 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저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라는 한 마디를 그 말씀 앞에 덧붙입니다. 저의 이런 습관을 얘기하면 누군가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과 저의 죄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은 진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신학적인 믿음 없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마음대로 판단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특정 성직자나 몇몇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누가 더 훌륭하다거나 또는 그렇지 못하다거나 하는 것만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을 피상적인 것들에 가두는 일이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느냐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 가운데 엄존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인간으로 오셨으며, 당신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네 일상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끊임없이 도와줌으로써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불신하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불신할 수도 있고, 심오하고도 진실한 회개의 행동인 ‘내 탓이요’를 외치며 하루하루를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을 의심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교회를 의심하는 것, 교회의 거룩한 기원에 대해 의혹을 품는 것, 가르침과 성사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교회의 효과적인 역할을 의심하는 것은 바로 그분 하느님을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성령 강림의 실재를 온전히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에는 ‘화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화해가 없었을 때에는 성령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부재는 하느님께서 분노하셨다는 징표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충만하게 오신 것을 여러분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화해에 관해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만약 ‘지금 성령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숱한 기적들이 일어났을 때, 죽은 이가 부활했을 때, 나병환자가 치유됐을 때 성령께서 함께 계셨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이 순간 진실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제가 여러분께 보여드리겠습니다.”

“만약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 6,9)라고 말하는데, 만약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도들은 이렇게 우리를 가르칩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갈라 4,6)”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간청할 때에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 안에서 성령이 움직여서 그런 기도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교회 안에 지혜나 지식의 말씀이 한 마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성령을 통해 지혜의 말씀이 주어진다’고 쓰여 있습니다. 만약 성령께서 안 계시다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약 교회가 존재한다면, 성령의 현존하심에 대한 의심은 있을 수 없는 것이죠.”

인간의 온갖 부족함과 한계들을 넘어 교회는 하나의 징표이며, 보기에 따라서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보편적인 성사입니다. 비록 교회가 새로운 율법에 따라 칠성사의 기원을 규정한, 그 엄격한 의미에 입각한 정의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파견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우리가 강하고 굳세며 살아서 숨 쉬는 신앙을 가졌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릴 수 있을 만큼 용감하다면, 사도들의 시대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기적들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우러러볼 능력과 하느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묵상할 능력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에 사로잡혀 사랑을 잃어버렸던 영적인 불구자들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하느님을 알고자 하지 않았던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청력이 다시 주어졌습니다.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에 혀가 마비됐던 말 못 하는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죄 때문에 생명이 파괴됐던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히브 4,12) 라고 하신 진실을 우리는 다시 한번 보았습니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성령의 권능을 묵상할 때 기쁨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창조물들의 마음과 의지 안에서 성령이 활동하시는 결과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숱한 상황들과 마주합니다. 그 상황이란 개인적 생존의 여건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역사의 엄청난 기로일 때도 있지요. 저는 삶의 그런 모든 상황들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수많은 부르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을 마주 보게 하기 위한 부르심 말입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기회라고 여깁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굳세어진 우리의 행동과 말을 통해 우리가 속해 있는 그분, 성령을 선포하는 기회인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세대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구원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똑같이 함께 나눠야 합니다. 우리는 말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으로부터 오는 값진 보물의 영원한 솟구침에 화답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구하면서도 항상 새로운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복음 선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속해 있고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세상을 향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인간 존재와 운명에 관해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관해 대다수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우리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세속의 일들에만 관심이 있으며 천국을 우러러보는 것을 아예 잊어버렸다고 여긴다면, 그 역시 사실과 다릅니다. 물론 편협한 이념들과, 그런 이념들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에 엄청난 욕망과 비도덕적인 태도, 영웅주의와 비겁함, 열성과 환멸을 동시에 발견합니다. 더 정의롭고 인간적인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아마도 젊은 시절에 이상주의가 좌절됨으로 인해서 용기를 잃어버린 듯한 사람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용기를 잃은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스스로의 좌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이기주의에 갇혀 자신을 숨기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 한창 잘 나가는 순간을 살고 있든, 아니면 위기와 좌절의 순간에 있든 간에,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로 성인이 성령 강림 이후에 말했던 장엄하고도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주춧돌이자 구원자이시며 우리 삶의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들 가운데 아주 특별하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저는 곧잘 얘기해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혜의 선물입니다. 지혜의 선물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 하고 그분의 현존하심에 기뻐하게 해줍니다. 그로 인해 지혜의 선물은 우리에게 하나의 관점(觀點)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그 관점을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 삶의 여러 사건들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네 신앙은 변함없이 굳세게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며 세상과 그 역사를 묵상할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느낌과 똑같은 감정을 우리 가슴 속에 반드시 갖게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그리스도인은 인간성 안에 숨 쉬는 모든 선한 것들을 무시해선 안 됩니다. 그 건강한 기쁨을 인정하거나 인간적인 열정과 이상에 함께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세상에서 발견하는 모든 선한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행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배려심으로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 정신의 깊이와 풍부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정신을 약화시키거나 인간 영혼의 고귀한 충동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실되고 진정한 의미를 자각하고 실현함으로써 그러한 특성들을 더욱 성장시킵니다. 우리는 대중적인 행복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당신이 사셨던 삶의 친밀함에 깊이 스며들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또한 같은 하느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알고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세 위격을 가지신, 한 분이신 하느님의 같은 사랑 안에서 천사들과 모든 인류를 사랑하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인간 본성의 가치와 존엄함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대담한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존엄함을 성취하기 위해 창조됐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엄청나게 대담한 특징입니다. 그러한 확신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주는 은총을 통해 가능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교 신앙이 구원의 약속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정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한 일이었겠지요.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이 구원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피로 확증됐으며 성령의 지속적인 활동에 의해 다시금 확인되고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동방 교회의 위대한 박사들 중 한 명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신앙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투명한 물질이 한 줄기 빛을 받아 광채를 발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 태어나 밝게 빛나게 된 영혼은 스스로 영적(靈的)이 되며, 은총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리웁니다. 성령으로부터 미래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에 대한 지혜가 오며, 신비를 이해하게 되고, 은총 주심과 천국의 시민됨, 그리고 천사와의 대화 등과 같은 숨겨진 진실들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이 찾아오며, 성령으로 인해 하느님 안에서 인내하고 하느님을 좋아하게 되며, 우리의 상상이 미치는 가장 고귀한 상태에 이르러 하느님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존엄성의 위대함을 깨우치는 것은 겸손한 마음과 더불어 우리 안에 하나의 태도로 자리잡습니다. 그 존엄성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진정으로 엄청난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 아니며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는 참으로 잊어선 안 되는 진실입니다. 만약 그 진리를 잊어버린다면, 우리 삶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왜곡되어 주제넘는 오만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삶이 곧 무너져내릴 것이고, 그때 영혼은 스스로의 나약함과 비천함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묻습니다. “내가 거룩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내가 말하는 ‘거룩함’이 ‘나는 거룩함을 지니고 다니지만,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줄 어느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저는 거짓말쟁이에다가 자만심으로 가득 찬 인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레위기 말씀처럼 ‘거룩함’이란 말을 ‘거룩하게 된 누군가’로 이해한다면, 저는 감히 제가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온 몸이 땅 끝에 사는 마지막 사람까지 드리워져 그 몸의 머리와 그 분 아래서 저도 함께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3위격이신 성령을 사랑합시다. 여러분은 성령으로부터 격려나 비판의 거룩한 울림을 받습니다. 여러분 존재의 친밀함 속에서 그 거룩한 울림에 귀를 기울입시다. 여러분의 영혼에 쏟아진 그 빛을 받으며 이 세상을 걸어갑시다. 그러면 희망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벽한 평화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주신 희망이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 안에서 매일매일 더욱더 크게 자라날 것입니다.

성령 알아차리기 

성령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서 소유하셔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더욱더 당신과 닮게 만들어주시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하고 심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멋대로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자라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 2,42)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방식이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네 신앙의 가르침이 우리의 일부분이 될 때까지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서 우리 주님을 받아 모시고, 기도 안에서 주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동을 감추려 들지 말고 주님과 마주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의 방식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마도 몇 가지의 장점은 갖게 될 것입니다. 해박하게 사고하는 능력, 어느 정도 치열한 활동, 일정 수준의 실천과 헌신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로 일치하지 않고, 그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류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단순화된 버전만을 실천하는 의무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비록 각자 받은 영적 은사와 서로가 처한 인간적 상황들이 엄청나게 다양하지만, 오직 하나의 믿음, 하나의 희망, 하나의 사랑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선물을 나눠주시는 분은 한 분이신 성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던졌던 질문을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우리는 이 말씀을, 더욱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을 대하도록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에겐 성령은 아주 낯선 분이고 어마어마한 미지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단순히 이름뿐인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안에 계신 세 위격 중 한 분이시며, 우리가 함께 얘기할 수 있고 그분의 삶을 우리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교회 전례 안에서 우리가 배운 대로 우리는 단순하게 그리고 신뢰하며 성령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주님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됐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엄청난 특권을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제가 앞에서 언급했던 ‘거룩하게 됨’의 위대함과 진리를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게 됨’이란 하느님 당신의 생명 안에서 더불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룩한 실체들을 그려 넣는 예술가가 아닙니다. 자신에게도 생소한 듯한 그림을 그리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닮아가도록 이끄시는 성령의 방식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인 동시에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에 마치 밀납 위에 직인을 찍듯이 그분 자신의 인호를 박으십니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성령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범에 따라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게 해주시고, 동시에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인간에게 되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우리네 일상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봅시다. 우리로 하여금 친근하게 성령과 성부 그리고 성자를 대하도록 해준 삶의 방식을 설명해봅시다. 적어도 일반적인 방법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 요소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온순함’, ‘기도의 삶’, 그리고 ‘십자가와의 일치(一致)’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먼저 ‘온순함’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심으로써 우리의 생각과 열망과 활동에 초자연적인 울림을 주는 분은 바로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끌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고, 심오한 방법으로 그 가르침 속에 스며들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그 빛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는 부르심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든 일들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감지합니다. 우리가 성령께 온순함으로 대한다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 안에 더욱 완벽하게 새겨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매일매일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로마 8,14)

만약 우리가 생명을 주는 원리이신 이 분,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 의해 인도된다면, 우리의 영적 활력은 성장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아버지 하느님의 손안에 두게 될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확신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자기 아버지의 돌봄에 자신을 맡기는 것과 똑같이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유구하면서도 널리 알려진 ‘어린이의 길’입니다. ‘어린이의 길’은 결코 감상적인 표현이 아니며, 인간적 성숙의 부족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어린이의 길’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사랑의 경이로움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주는 초자연적 성숙함을 뜻합니다. 초자연적인 성숙은 우리의 미소함을 깨닫게 해주며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하나로 일치시켜줍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자기 희생과 순명, 그리고 온순함은 사랑으로부터 와서 사랑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주고, 대화와 친교를 이끌어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 위격을 지니신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요구하며, 그런 대화의 친교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코린 2,11) 우리가 성령과 한결같은 친교를 가진다면 우리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우리 아버지께 간청하는 일을 지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과 대화를 나누는 습관을 갖도록 합시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실 분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의 도움을 청하며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오신 그분을 느낍시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가난한 마음이 성장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을 위해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겠다는 더욱 큰 열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묵시록의 마지막 환시를 다시 재연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靈)과 그 배우자, 즉, 성령과 교회,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청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십자가와의 일치’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삶에서 부활과 성령 강림은 갈바리아산(골고타)의 수난 이후에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에서 따라야 하는 순서입니다. 바오로 성인이 얘기한 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 8,17) 십자가와 수난의 결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림으로써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추구하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포기한 결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충실하고 우리 영혼의 한 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울 때에만 성령께서 주시는 거대한 불길과 위대한 빛, 그리고 엄청난 평안을 충만하게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모든 이기심과 그릇된 인간적 안락으로부터 실제적으로 멀리 떨어질 때, 다시 말해 실제로 신앙의 삶을 살아갈 때에만 성령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영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쟁취하시고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평화와 자유를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갈라 5,22-23)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2코린 3,17)

우리들의 현실적인 삶은 숱한 한계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 죄는 여전히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온전히 자유롭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하느님 자녀가 된 풍요로움을 명확히 감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될 때에도 역시 하느님의 자녀된 풍요를 느낍니다. 아무도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감탄하며 바라볼 수 있으며, 창조의 풍성함과 선함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이 지음 받은 그대로의 강인함과 순수함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로 인한 슬픔이 고통스러운 절망이나 오만함으로 악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슬픔과 자각은 우리 스스로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연대를 더욱 깊이 실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삶에서 성령의 확실한 힘을 체험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실패가 더 이상 우리를 낙담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초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삶의 모든 순간에 언제나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충실한 증거자가 되도록 우리를 이끄는 초대인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개별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런 단계에 이르면 우리의 개인적인 나약함은 더 이상 우리 영혼을 동요시키지 않는 작은 결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약점들이 심각한 죄가 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진정한 회개의 슬픔으로 고해성사를 드린다면 우리는 하느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고 다시금 당신 자비의 선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도록 한다면 우리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풍요로움을 하나로 집약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다음과 같은 얘기로 오늘 강론을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전례에서 부르는 찬미가 중 한 대목을 소리 높여 부릅시다. 마치 온 교회가 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간구하는 기도의 메아리처럼 말입니다. “임하소서, 성령이여! 창조주여 임하소서. 당신께 속한 이들 마음에 오셔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창조한 마음들을 채우소서… 당신을 통해 성부를 알고 성자도 알게 되었으니, 당신을 믿게 하소서. 성령께서는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시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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