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왕(王)’이신 그리스도 (1970년 11월 22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강론)

교회 전례력 상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제대(祭臺)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드리는 희생 제물을 새롭게 봉헌합니다. 우리가 곧 감사송에서 함께 노래하겠지만, 정의와 사랑,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성스로운 인간애를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의 영혼 깊이 엄청난 기쁨을 실감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지신 왕입니다. 그분은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분이지만, 결코 전제 군주처럼 우리 위에 군림하시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당신의 상처를 우리에게 말없이 내보이며 작은 사랑을 당신께 달라고 하실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여전히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루카 19,14)라는 잔인한 거부의 목소리를 듣는 걸까요?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거부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분 얼굴의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얼마나 놀라운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 때문에 저는 주님께 속죄하고 싶습니다. 말보다 비열한 행동으로 표현되는 끊임없는 아우성들을 들을 때면 저는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행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그분을 반대합니다.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한 접근 방식을 통해, 도덕과 과학과 예술을 통해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말로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악당들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의 행동으로 그분을 모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왕’이란 표현만으로도 기분이 상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 왕직’이 정치적 용어로 생각될 수도 있다는 듯이 그 말에 대해서 고지식하게 반대합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왕이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길 거부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계율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율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경이로운 사랑(愛德)의 계명조차도 말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야망은 스스로의 이기심을 섬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주님께서는 제게 “저는 섬길 것입니다”라고 말없이 반복해서 외치도록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이 굳세지도록 해달라고 주님께 부탁드립시다.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소란 떨지 말고 천진한 마음으로 당신의 부르심에 항상 충실하게 해달라고 간청합시다. 그리고 우리 마음 깊이 그분께 감사드립시다. 우리는 당신 사랑의 대상이자 당신의 자녀로서 그분께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은 젖과 꿀로 넘쳐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해 얘기하며 참으로 큰 기쁨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쟁취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베들레헴에서 목격했습니다. 바로 그 사랑스러운 아기가 온 우주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함께 이 사실을 묵상합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분께서 지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들이 아버지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이 흘린 성혈로 하늘과 땅 사이의 평화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임금이십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말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사도 1,11)

비록 인간의 정치 권력을 가진 임금들은 오래 가지 못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십니다” (탈출 15,18), “그분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이고 그분의 나라는 대대로 이어지리라.” (요한 4,31)

그리스도의 나라는 단순한 비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사람이 되셨을 때 취하셨던 똑같은 육신으로 살아계십니다. 또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을 때의 그 영광스러운 육신 또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모습 그대로 계속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진정한 하느님이시고 또한 진정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주님이십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은 가장 영광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지 않나요? 왜냐하면 당신의 나라는 비록 이 세상에 있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기” (요한 18,36)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요한 18,37) 메시아에게 눈에 보이는 찰나의 권능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잘못 판단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하느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진리와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는 곧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이자, 인간의 역사가 끝나고 마지막 날에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 절정에 이를 하느님의 역사(役事)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가르침을 주기 시작하셨을 때 정치적 계획(政綱)을 내세우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 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기쁜 소식을 널리 알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오실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그분의 정의는 곧 거룩한 삶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필요한 유일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초대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마태 22,2-3)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라는 진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구든 자유롭게 그리스도 사랑의 요청에 응답한다면 그 누구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사랑의 요청이란, 다시 태어나는 것 , 영적으로 단순해져서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 ,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려는 모든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뿐 아니라 행동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결연히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분투하는 자만이 영원한 유산을 받을 자격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지상에서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이나 심판의 최종 판결은 이곳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씨 뿌리는 것과 같고 , 겨자씨가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에 그것은 물고기로 가득 찬 그물과 같을 것입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처럼 모래 위에 던져져서 의로운 삶을 산 이들과 사악한 삶을 산 이들로 가려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 지상에서 사는 한, 하늘나라는 어떤 여인이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었다가 온통 부풀어 올라 버린 누룩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러주신 나라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상인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얻어야 할 진주인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참으로 밭에 숨겨진 보물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얻기 어렵습니다. 그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인간의 겸손한 울부짖음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도둑들 중 한 명이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2-43)

우리 영혼을 다스리시는 주님 

우리 주님, 우리 하느님은 얼마나 위대하신지요! 우리 삶에 초자연적인 의미와 거룩한 생명력을 주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당신 아드님의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존재, 영육 간의 모든 것을 걸고 우리가 이렇게 말하도록 하십니다. “그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참으로 나약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그분께서 다스리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당신께서는 우리가 진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피조물들입니다. 우리는 발에 묻은 진흙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과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내가 네 안에서 다스리기 위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하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저는 당신의 은총이 절실하다고 답하겠습니다. 오직 당신의 은총이 있어야만 제 모든 심장 박동과 호흡, 그리고 최소한의 진지한 시선과 가장 평범한 제 언어들과 기본적인 제 감정이 저의 임금이신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미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임금으로 모시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들 자신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 마음을 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공허한 노릇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에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요소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존재하지도 않는 신앙을 겉치레로만 보여주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잘못 쓰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저나 여러분이 완벽해야만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신다면, 우리는 정말로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딸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요한 12,15)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시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동물을 왕좌(王座)로 쓰십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의 눈에 제가 한 마리의 당나귀로, 짐승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저는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 앞에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늘 당신과 함께 있어 당신께서 제 오른손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시편 73,22-23) 예수님 당신께서 제 고삐를 쥐셨습니다.

당나귀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그 짐승의 모습을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난데없이 발길질을 해대는 늙고 고집스럽고 고약한 당나귀 말고, 귀가 안테나처럼 쫑긋한 어린 당나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녀석은 많이 먹지 않고 힘들게 일하며 잽싸고 경쾌하게 걷습니다. 더 말쑥하고 날래고 힘센 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군중의 환호에 답하시며 임금으로서 백성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이 택하신 동물은 당나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활한 사람들과 냉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공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십니다. 그분이 좋아하시는 것은 젊은 마음, 소박한 발걸음,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지니는 활달함, 그리고 당신의 애정 어린 충고에 주목하는 맑은 눈동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시는 방법입니다.

섬김으로써 다스리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시게 한다면, 우리는 결코 권위주의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섬길 것입니다. 저는 “섬기다”라는 말을 정말 좋아합니다. 제 임금을 섬기고 그분을 통해 당신의 성혈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방법’을 알기 바랍니다. 오직 섬김으로만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분을 널리 알리고 사랑받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의 모범을 통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우리가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행동을 통해 그분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네 모든 삶의 주님이시며 우리들 존재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한 번 이 섬김의 증거자가 되면 우리의 언어로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신 방법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사도 1,1)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 행동으로 가르치시고, 그런 다음에 거룩한 강론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사람을 섬기려면 진정으로 ‘인간적’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인간적이지 못하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 위에 아무것도 세우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질서와 이기심, 또는 자만(自慢) 위에는 아무것도 정상적으로 세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불의(不義)를 정의(正義)라고 불러서는 안 되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악을 선이라고 말해도 안 됩니다. 악과 마주했을 때 또 다른 악으로 대항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굳건한 교리와 선한 행동으로 맞서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충만한 선 앞에 악이 굴복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과 우리 주위 사람들의 영혼을 다스리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을 담으려 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에 평화를 세우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평화를 이루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평화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나라는 거룩함을 향한 열망과 은총을 받아들일 겸손한 준비를 필요로 합니다. 동시에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과 거룩한 사랑의 분출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인간 활동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 

가능한 일입니다. 공허한 꿈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마음 깊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기만 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 높은 십자가로부터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것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요한 12,32-불가타 성경) 다시 말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매 순간 의무를 다함으로써 지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활동, 그것이 중요하게 보이거나 아니건 간에 그 중심에 나를 세운다면, 나는 모든 것을 내게로 이끌어 들일 것이다. 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현실로 이뤄질 것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인간을,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합니다. 하느님의 손으로 선하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담이 거역했습니다. 오만한 인간의 죄가 창조의 거룩한 조화를 깨뜨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때가 차자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셔서 성령으로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인간의 육신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죄로부터 구원받음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갈라 4,5)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회복시킴으로써 온 우주가 무질서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고, 우리들 사도직의 과업이며, 우리 영혼을 사로잡아야 할 열망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현실로 만드는 것, 증오와 잔인성을 없애는 것, 온 세상에 강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향유를 퍼뜨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열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임금님께 우리가 겸손하고 열정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시다. 그래서 부서진 것들을 새로 고치고,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며, 인간이 초래한 무질서를 바로잡고, 올곧은 길에서 벗어난 모든 이들에게 옳은 방향을 정해주며, 창조된 모든 것들의 조화를 회복시키는 하느님 사업을 위해 우리 모두 힘을 모으게 해달라고 부탁합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품어 안는다는 것은 사람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제2의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 (Alter Christus, Ipse Christus)’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 거대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찰나에 불과한 세상의 모든 구조(構造)들에게 구원의 누룩을 가져다줌으로써 그들을 내부로부터 거룩하게 만드는 일, 그 어마어마하고 끝없는 과업을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에 관해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종교운동’을 결성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런 운동들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전파하겠다는 열망으로부터 비롯됐다 하더라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일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그가 누구이건 간에 그들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모셔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스스로의 본보기와 언어를 통해 그들의 신앙을 증언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여기서 각자가 처한 상황이란 교회에서의 위치, 시민사회에서의 지위, 그리고 그들이 수행하는 일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아갈 완벽한 권리를 가집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자기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사시게 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그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효과를 눈에 띄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의 사회적 위치가 높건 낮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성취로 보이는 것들이 하느님의 눈에는 아주 저급한 것일 수 있으며, 반대로 수준이 낮거나 별것 아니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들이 그리스도교의 언어로는 거룩함과 섬김의 정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자유 

자신의 일을 할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는 일들이 가진 의무를 회피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인간의 모든 활동을 축복한다”는 표현이 그들의 고유한 본질에 대한 모욕이나 무시를 뜻한다면, 저는 그런 표현을 결코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알리는 플래카드나 종교를 드러내는 명찰을 달고 다니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게 반대하는 의견들을 존중합니다만, 그런 식의 표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우리 신앙의 거룩한 이름을 헛되이 사용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톨릭”이란 이름 또한 때로는 인간의 기준에 따라 점잖지 못한 활동과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죄를 제외하면 이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은 선합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긍정적인 방법으로 분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시민들과 어깨를 맞대고 세속에서 꾸려가는 모든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한 모든 가치들을 수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야만 할 한 가지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자유를 보호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이웃의 자유 또한 지켜야 할 그들 나름의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만 인간적인 동시에 그리스도교적으로 진실되게 자기 자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초자연적 능력, 즉 거룩한 은총, 그리고 다른 놀라운 인간적 능력, 바로 ‘개인의 자유’를 거저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개인의 자유가 방종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우리는 더욱더 성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의 율법에 따르도록 진심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유일한 종은 하느님 사랑에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묶어 맨 이들뿐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사랑의 노예들인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은총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주님께 우리들 자신을 거리낌 없이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가장 초자연적인 이유를 들자면 우리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제 말씀을 듣는 분들 중 몇몇은 저와 오래 알고 지냈습니다. 그러니 제가 평생 ‘책임을 수반한 개인의 자유’를 강론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등불을 들고 정직한 사람을 찾으려 했던 디오게네스처럼 저는 온 세상을 돌며 자유를 찾았고,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더더욱 자유를 사랑하게 됩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 저는 자유를 가장 사랑합니다. 자유는 우리가 그 가치를 충분히 가늠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

제가 개인의 자유에 관해 말할 때, 사제로서 제 능력 밖에 있는 정당한 문제들에 관해 참견할 핑계로 사용하려는 게 절대 아닙니다. 세속적이고 시민적 영역에 속하는 현실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제게 맞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주제들은 우리 주님께서 인간이 자유롭고 차분하게 논의해야 할 문제로 남겨 두셨습니다. 사제의 입은 모든 인간적이고 당파적인 논란을 피해가야 한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제는 오직 하느님과 그분께서 주신 구원 교리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서만 입을 열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와 하느님께 더욱 가깝게 다가가는 내적 생활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만 말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정치 공학적인 면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는 신앙의 초자연적인 목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과는 전혀 무관한 양심의 무거운 짐을 질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가벼운 멍에이고, 그분이 주시는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사제로서 제 역할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들의 정당한 자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과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로서의 평화로움 

하지만 아마도 여러분은 이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하라는 말을 실천에 옮기기는커녕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고 말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자유는 튼튼하고 건강한 식물과 같지만, 돌밭이나 가시덤불 또는 차도에서 발에 밟혀서는 잘 자라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오래전에 이 사실을 배웠습니다.

시편 제2장을 기억하십니까?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 부음 받은 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 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음모를 꾸미는구나.” (시편 2,1-2) 시대가 바뀌어도 새로운 것은 전혀 없지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도 전에 그분을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니시며 평화의 여정을 이어가실 때도 그분을 적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박해했으며, 그분이 이루신 ‘진정한 신비체’의 구성원들을 공격함으로써 박해를 계속합니다. 왜 그토록 증오했을까요? 그 단순한 사람들을 왜 그리도 학대했을까요? 왜 세상 전체가 모든 양심의 자유를 질식시키려 했을까요?

“저들의 오랏줄을 끊어 버리고 저들의 사슬을 벗어 던져 버리자.” (시편 2,3) 사람들은 편하고 온순한 멍에를 끊어 버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거룩함과 정의, 그리고 은총과 사랑, 평화의 경이로운 짐을 벗어 던져 버립니다. 사랑은 그들을 화나게 합니다. 그들은 당신 자신을 돕기 위해 천사들의 군단을 부르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그 온화한 선하심을 비웃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협상을 하시기만 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한 대다수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소수의 죄 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려고만 한다면, 약간의 양해를 얻을 가능성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하느님이 뜻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단 열 명의 의인만 있어도 수 천 명의 악인을 용서하실 준비가 돼 있는 진정한 아버지이십니다. 증오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이런 자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불의에 기대어 삶으로써 갖게 되는 세속적인 면역에 갈수록 더욱 길들여지게 됩니다.

“하늘에 좌정하신 분께서 웃으신다.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마침내 진노하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분노하시어 그들을 놀라게 하시리라.” (시편 2,4-5) 하느님의 진노하심이 얼마나 당연한지, 그분의 노여움이 얼마나 정당한지, 그리고 그분의 관대하심이 얼마나 위대하신지요!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시편 2,6-7)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친절하셔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임금으로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위협하실 때도 다정해지시며, 화났다고 말씀하실 때도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그리스도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제2의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이 되겠다고 결심한다면, 여러분과 제게도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결코 하느님의 선하심에 감화된 마음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도 아니고, 대접 잘 받는 종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그분은 이미 우리를 ‘아들’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로서 당신을 대할 수 있는 자격을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겁니다. 아들의 신심으로, 아들의 대담함으로 저는 감히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거부하지 못하신다.’ 라고까지 말하겠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의’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너는 그들을 쇠 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 (시편 2,8-9) 이것은 진정 강력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해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낮출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 아버지 하느님의 오른편에서 임금으로서 다스리십니다. 삶이란 끝나게 되어 있고, 그 삶이 끝나면 무엇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은 역사가 끝났을 때 악과 절망으로 마음이 굳어버린 모든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정복하실 수 있더라도 먼저 그들을 설득하실 것입니다. “자, 이제 임금들아, 깨달아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징계를 받아들여라.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의 발에 입 맞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 노하시어 너희가 도중에 멸망하리니 자칫하면 그분의 진노가 타오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 (시편 2,10-12)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고 왕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이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 그러니 예언서들에서 말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보아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다 망해 버려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하리라.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어도 너희가 도무지 믿지 못할 그런 일이다.’” (사도 13,32-33, 38-41)

이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곧 구원사업이며, 우리 영혼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이자 하느님 자비의 드러내심입니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 (시편 2,1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선포해야 할 권리를 지닙니다. 비록 불의가 만연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나라를 염원하지 않지만, 악을 숨기고 있는 똑같은 인간 역사 안에서도 구원사업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들 

“나는 너희를 위하여 몸소 마련한 계획을 분명히 알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계획이지 재앙을 위한 계획이 아니므로, 나는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고자 한다.”(예레 29,11) 우리 모두 평화의 사람, 정의의 사람,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심판자가 아닌 우리의 친구이자 형제요, 사랑이 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의 동행을 즐깁니다. 이에 관해서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천사들과의 친교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원죄와 우리가 매일 짓는 죄들이 천사들의 눈부신 순결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임금님을 알게 된 그 순간 이후 천사들은 우리를 그들의 동료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임금께서 우리 인간의 육신을 취하길 원하셨음을 알게 되면서 천사들은 더 이상 우리의 비참함을 피해가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사람이 되신 하늘의 임금님을 경배하는 그들 자신의 본성을 감히 열등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간의 본성은 그들의 본성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려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인간을 자신들의 동반자로 간주합니다.”

우리 임금님의 거룩한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우리 마음의 모후시여, 오직 당신만이 우리를 돌보는 방법을 알고 계시니 알고 계신 그대로 우리를 살펴주소서. 자비의 어머니시여, 은총의 왕이시여, 당신께 청하오니, 시인이 한 구절씩 시를 짓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에서 소박한 사랑의 시를 지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가 쓰는 사랑의 시는 “평화의 강물”(이사 66,12)과 같을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마르지 않는 자비의 바다이시기 때문입니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코헬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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