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우리 주님의 공현(公顯) (1956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

얼마 전에 저는 어느 대리석 부조(浮彫) 작품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모습이었지요. 작품의 중심인물들이 네 명의 천사들에게 둘러싸였는데, 천사들은 저마다 상징물을 갖고 있었습니다. 왕관, 지구본(地球本) 위에 떠오른 십자가, 그리고 검(劍)과 지휘봉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는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 공현’이라는 사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익숙한 상징들을 선택했습니다. 몇 명의 현자(賢者)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전승(傳承)은 이들을 왕(王)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물어봤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마태 2,2) 하고요.

이 질문은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 “구유에 누워 있는” (루카 2,12) 예수님을 묵상해봅니다. 그분은 동물한테나 어울리는 곳에 누워계십니다. 주님, 왕으로 오신 당신의 위엄은 대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의 왕관과 왕검, 그리고 지휘봉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당연히 당신의 것인데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포대기에 싸여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왕께서는 이토록 아무런 꾸밈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무방비 상태의 어린 아기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필리 2,7).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구유에 누우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이미 실천하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거룩하게 되라는 성소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과 함께 구원사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첫 번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시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이기려고 아등바등하는 대신에 우리 자신을 이겨내기 위해 분투함으로써 모두가 구원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비워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종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 데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왕은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군림하길 원하셨을까요? 그래서 아기로 오셨을까요? 누구나 어린 아기를 좋아하니까요. 그렇다면 왕은 어디에 계신 걸까요? 성령께서 우리 영혼 안에 머무르기를 바라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어디 계시나요? 그분은 교만이 있는 곳에는 계실 수 없습니다. 교만은 우리와 하느님을 갈라놓으니까요. 그분은 사랑이 결핍된 곳에도 계실 수 없습니다. 사랑의 결핍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차단시키니까요.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곳에 계실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 없는 상태에서는 인간은 홀로 남겨지게 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에 아기 예수님의 발아래 무릎 꿇고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자신이 임금이라는 표시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왕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분께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 교만함을 없애주십시오. 제 자신만을 사랑하는 마음을 없애주십시오. 제 자신만을 믿으며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을 앗아가 주십시오. 제 심성의 근본이 당신과 일치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신앙의 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목표입니다. 그러나 어렵지도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매일 그분의 말씀에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성사적 실재(聖事的 實在)인 ‘성체’로 우리의 생명을 채우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양식(糧食)으로 주신 그 성체로 말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여정이 실현 가능한 길로 입증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하고도 틀림없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는 별을 발견했습니다. 그 별은 우리들 영혼의 하늘에서 비춰주시는 빛이며 안내자입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태 2,2) 우리도 동방박사들과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역시 우리들 영혼 안에서 빛나는 새로운 빛을 보았고, 그 빛이 갈수록 밝아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겠다는 열망이자 하느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간절한 바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자신의 성소를 어떻게 느꼈는지 아주 상세하게 큰 소리로 말한다면, 그 얘기를 듣는 다른 이들도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곧바로 결론 짓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하느님이신 성자께, 하느님이신 성령께,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모든 은총의 길이 되어주시는 성모 마리아께 감사드립시다. 우리의 신앙과 함께 오시는 이 은사는 주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사랑을 온전히 이뤄내고자 하는 명확한 열망입니다. 동시에 사회생활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중에도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반드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다정하게 우리를 초대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분의 말씀은 인간적 온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말과도 같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이사 43,1) 하느님은 아름다움과 위대함, 그리고 지혜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분의 한없는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가 선택받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의 섭리가 주신 경이로움에 감사하기 위해 굳센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동방박사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막도, 폭풍우도, 오아시스의 고요함도, 그 어떤 것도 영원한 베들레헴에 도달하고자 하는 우리의 목표를 앗아갈 수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완벽한 삶을 향한 목표 말입니다.

신앙의 삶은 희생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소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위치를 결코 폄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이제 막 반짝이기 시작한 빛을 만났다는 것은 첫 걸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빛이 별처럼, 더 나아가 태양처럼 밝게 비추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빛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페르시아에 있는 동안 그들은 단지 하나의 별을 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이 집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섰을 때 그들은 정의(正義)의 태양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나라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면, 결코 그 별을 계속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둘러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모두가 나서 가로막더라도 아기 예수님이 계신 집을 향해 우리 함께 달려갑시다.”

굳세게 성소의 길을 걸어갑시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마태 2, 2-3)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마주하거나, 신앙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놀라워하면서 심지어 추문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으로 심오한 결정을 내린 사람들을 자신들의 편협하고 세속적인 시야에 어긋나는 삶의 방식이라 여기며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의 관대한 행동에 대해 히죽거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소를 받은 이들의 헌신에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병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온전히 자유롭게 스스로를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한 이들의 거룩한 결정을 방해하기 위해 온 힘을 쏟습니다.

저는 이른바 ‘동원(動員)’이라고 부를 수 있을 몇몇 경우들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대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주님께서 당신에게 봉사할 이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당사자들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은 분명히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사랑의 제안에 대해 인간이 분명하게 ‘네’ 또는 ‘아니요’ 하고 자유롭게 답할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자연적인 삶이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초자연적인 삶이란 사소한 안락과 인간의 이기심이 충족된 다음에야 비로소 고려해봐야 하는 것이지요.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앙 가운데 무엇이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이 넘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듣기만 할 건가요? 아니면, 듣고 실천에 옮길 것인가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만나러 오라고 모든 인간에게 요청하십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고 영향력 있는 동방박사들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전에, 별이 아닌 당신 천사들 중 하나를 베들레헴의 목동들에게 보내셨습니다. 부자건 가난한 이건, 지혜롭거나 또는 그렇지 못한 것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성품을 마음 깊이 길러야 합니다.

헤로데 임금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이 세상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이었고,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마태 2,4) 하지만 헤로데의 권력과 지식은 그가 하느님을 알아보도록 이끌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완고하기 그지없었기에 권력과 지식이 악(惡)을 행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없애려 들었고,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경멸하는 만행만을 저질렀을 뿐입니다.

다시 복음서로 돌아가 봅시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마태 2, 5-6)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드러나는 이 표현들을 우리는 결코 그냥 지나쳐선 안 됩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거듭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태어나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한 사람을 온전히 신앙에 따라 살아가도록 초대하실 때에는 그의 재산도, 계급도, 혈통도, 배움도 결코 따지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세상의 모든 가치들에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마태 2,9)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먼저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알기도 전에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랑을 우리 안에 심어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정의롭기만 한 분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것에 앞서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다가가기를 기다리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먼저 나서십니다. 아버지가 주는 사랑의 명백한 징표를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시고, 착한 인도자이신 분 

하느님의 부르심은 항상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 앞에서 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별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오는 길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내적 삶의 어떤 순간에는 별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는 대부분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신 성소의 거룩한 광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부르심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들 자신의 고행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일으킨 먼지들이 투박한 구름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 구름이 우리 앞에 비추던 빛을 가렸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방박사들을 본보기로 삼아 질문해봅시다. 헤로데는 자신의 지식을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데 써버렸습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선한 일을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헤로데에게 갈 필요도 없고, 세상의 현자들을 찾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명확한 가르침(교리)을 주셨고, 성사 안에서 넘치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줄 사람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항상 되새겨주는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도록 주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우리에겐 또한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지혜의 보물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보전해온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사를 통해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그것입니다.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증언과 본보기 또한 지혜의 보물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선한 삶을 통해 하느님께 충실하게 나아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께 충고 한 마디 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밝게 빛났던 빛을 잃어버린다면, 그때마다 착한 목자에게 의지하십시오. 그런데 누가 착한 목자일까요? 착한 목자는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입니다. 그는 삯꾼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립니다.” (요한 10,1-12). 이 성경 말씀들을 되새겨보십시오. 결코 헛된 말이 아닙니다. 목자와 양들, 그리고 양의 우리와 양 떼에 관해 애정을 가득 담아 얘기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영혼에게 좋은 인도자가 필요하다는 실질적인 증거로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좋은 목자’에 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만약 나쁜 목자가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리를 보고 도망하는 삯꾼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쁜 목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나쁜 목자는 영적 자유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나무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리는 양의 목을 물어 낚아채고, 사탄은 인간을 유혹해 불의를 범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침묵하며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삯꾼인 것입니다. 이리를 보고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니야, 나는 여기 있다고. 달아나지 않았어’… 하지만 저는 여러분께 대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침묵했으니 달아난 것입니다. 두려웠기 때문에 여러분은 침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는 항상 풍성하게 많은 착한 목자들을 통해 스스로의 거룩함을 드러냈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단순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둔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하는 삯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얘기를 하는 삯꾼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착한 목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서조차 주님께서 우리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신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야말로 우리는 착한 목자에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당연히 우리 영혼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랑 넘치는 영혼이 되고자 합니다. 그 역시 죄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그리스도의 용서와 자비를 믿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러분의 양심이 말해준다면, 그 잘못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거나 잘못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더라도 고해성사를 드리러 가십시오. 여러분을 돌봐주는 사제를 찾아가십시오. 그는 굳건한 믿음과 영혼의 정화,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여러분에게 요청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적합한 자격을 갖춘 사제라면, 누구에게나 찾아가서 고백할 수 있는 엄청난 자유를 여러분에게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신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완전한 자유의지로 자신이 착한 목자로 알고 있는 사제에게 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제는 여러분이 다시 한번 주님의 별을 올려다보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황금, 유향, 그리고 몰약 

복음서는 동방박사들의 심정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마태 2,10) 왜 동방박사들은 그토록 기뻐했을까요? 왜냐하면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확증을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별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확증 말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별을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별이 그들의 영혼 속에서 항상 빛나도록 간직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소입니다.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별은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야말로 “세상 끝날까지” (마태 28,20) 우리와 함께 계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면, 사라졌던 별은 또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소가 진짜라는 이 생생한 증거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더욱 크게 만드는 위대한 기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마태 2,11)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인성(人性) 안에 숨으신 하느님, 예수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의 거룩한 부르심에 등 돌리기를 원치 않겠습니다. 결코 주님과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충실히 따르는 길에 장애물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치워버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영감에 진심으로 따르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온 마음으로, 그리고 저는 제 온 마음을 다해, 깊은 침묵의 외침으로 충심을 담아 기도하며 아기 예수님께 얘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예화에 나오는 착한 종처럼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마태 25,23) 라는 주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의무를 다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고 말입니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마태 2,11) 성경의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잠시 생각해봅시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우리가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 성경을 읽어봅시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야고 1,17). 주님의 선물이 지닌 심오함과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싶어도 인간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요한 4,10) 하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라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따라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구원경륜(救援經綸)’ 안에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 가득히 보살펴 주십니다. “이 사람은 이런 은사, 저 사람은 저런 은사, 저마다 하느님에게서 고유한 은사를 받습니다.” (1코린 7,7). 그러므로 하느님께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봉헌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염려일 것입니다.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이 없는 채무자처럼 (마태 18, 25)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예물은, 더 이상 하느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구약 성경의 제물과도 같을 것입니다.“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히브 10,8)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직접 당신이 원하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분은 재물에도, 땅의 열매나 짐승들에게도, 바다나 대기(大氣)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당신께 속한 것이니까요. 그분께서는 무언가 친밀한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신께 기꺼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나에게 다오.” (잠언 23,26) 아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나눠 갖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하느님께 드릴 때에 다른 예물도 우리 주님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황금을 드립시다. 우리가 영적으로 돈과 물질적 재화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 우리가 얻은 그 귀한 금을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왜냐하면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것들을 사용하되 우리 마음이 그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모든 인류의 선익(善益)을 위해 그것들을 잘 사용해야 한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세속의 재물이라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것들을 우상으로 삼아 떠받들고 숭배할 때 재물은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선한 일을 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 재물은 고귀해집니다. 의롭고 자애로운 그리스도교적인 일에 쓰일 때 재물은 고결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재물을 마치 보물인 양 추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여기, 이 구유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과 소망의 중심에 그분이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6,21)

우리는 주님을 향해 피어오르는 유향을 봉헌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 를 풍기는 고귀한 삶을 살고 싶은 우리의 소망을 봉헌한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향기로 충만하다면 이해와 친교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배제되거나 버려졌다고 느끼지 않도록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애정이 넘치고 인간적인 온기로 가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류는 수 세기 동안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들이 수많은 방법으로 그분이 오심을 선포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먼 구석진 곳일지라도 하느님을 향한 열망은 생생했습니다. 죄와 무지 때문에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계시 중 상당 부분이 사라진 곳이라 하더라도 주님을 그리는 갈망은 살아 있었습니다.

때가 찼을 때, 구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나타난 것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같은 천재적 철학자들이 아닙니다. 알렉산더 대왕처럼 이 세상을 모두 가진 강력한 정복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아기가 그 일을 했습니다. 그 아기가 바로 세상을 구원하실 분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말씀하시기 전에 행동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가져오신 것은 마술 같은 비법이 아닙니다. 그분이 주시는 구원은 인간의 가슴 깊이 스며들어야 함을 당신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처음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그분은 자신이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낳은 아기와 똑같이 무방비 상태로 웃고 울고 잠을 잤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있고, 우리의 품에 그분을 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행동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물론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실패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단지 인간이 아닌 숫자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밟고 올라설 발판으로도 여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장황한 말을 들어주거나 여러분이 모욕을 줄 수 있는 군중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 마음대로 칭찬받거나 무시당할 수 있는 무리로 여길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경이로운 이름에 걸맞는 완벽한 존엄성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에게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자녀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헌신적인 사랑이어야 하며, 매일 실천에 옮겨져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숨은 희생, 눈에 띄지 않는 자기증여와 같은 수많은 섬세한 행동들로 이뤄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의 첫 신앙공동체를 살았던 형제들로 하여금 ‘보라 그들이 어떻게 사랑하는지!’ 라고 외치게 했던 바로 그 향기인 것입니다.

이런 이상(理想)은 결코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쾌활한 타르타랭’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소설 속 인물인 타르타랭은 자기 집 복도에서 사자를 잡겠다고 용을 쓰지만 당연히 사자를 찾을 수 없었던 허풍선이입니다. 저는 항상 실제적인 일상의 삶에 관해 얘기합니다. 노동의 성화(聖化), 가족 간 유대의 성화, 교우관계의 성화 등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런 일상의 생활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까? 기분 좋은 향(香) 냄새는 불타는 숯 위에 올려진 향의 보이지 않은 작은 알갱이들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도 마찬가집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갑작스럽게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 꺼지지 않고 오래 가는 숯불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 충직, 성실, 이해, 관용, 기쁨과 같은 여러 미덕으로 타오르며 꺼지지 않는 숯불입니다.

동방박사들과 함께 우리는 또한 몰약을 봉헌합니다. 몰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코 부족해선 안 되는 희생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몰약은 우리 주님의 수난을 떠올리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병사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드렸죠. (마르 15,23). 그리고 주님의 시신이 묻히실 때 발라드렸던 것 또한 몰약이었습니다. (참조 요한 19,39). 하지만, 주님의 수난을 되새기며 희생과 고행의 필요성을 묵상하기 위해 오늘 이 기쁜 주님 공현 축제의 날을 슬프게 지내자는 뜻은 아닙니다.

고행은 결코 비관적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다면 고행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행은 세속의 유혹들을 우리가 적절하게 이겨내도록 성장하는 데 도움이 돼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와 함께 사는 이들을 당황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위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할 자격이 없습니다. 고행을 한다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스로를 비참하고 가엾은 사람으로 여겨지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행동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며, 고통을 이겨냄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증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반드시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보통 엄청나게 많은 것을 포기한다고 해서 고행이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마어마한 금욕을 요구하는 상황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행은 작은 성취들로 이뤄집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웃어주고, 육신이 요구하는 지나친 욕망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경청하는 데 익숙해지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최선을 다해 잘 이용하고… 고행은 이런 수많은 작고 섬세한 일들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우리는 작은 문제들에서 이런 고행을 발견합니다. 일상생활에서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곧잘 일어나는 어려움과 걱정 속에서 고행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동방의 별, 성모 마리아님 

오늘 복음에 나온 말씀을 다시 얘기하면서 강론을 마치려 합니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았다.” (마태 2,11) 성모님께서는 당신 아드님 곁에 항상 계십니다. 동방박사들은 높은 보좌에 앉은 왕에게 영접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성모님의 품 안에 계신 한 아기가 그들을 맞이한 것입니다. 우리의 어머니이기도 한 하느님의 어머님께 부탁드립시다. 사랑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우리를 위해 준비해달라고 성모님께 간구합시다. “향기로운 성모성심이시여, 안전한 길을 예비하소서! (Mariae dulcissimum, iter para tutum)” 향기로운 성모성심께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을 알고 계십니다.

세 명의 동방박사들은 그들의 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바다의 별이시고, 동방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님이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께 말씀드립니다. ‘거룩하신 성모님, 바다의 별이시며 샛별이신 성모님, 당신 자녀들을 도우소서…’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한 열정은 경계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 명의 동방박사들은 이방인 중에서 가장 먼저 부르심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구원은 이뤄졌고, 주님 안에서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갈라 3,2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도 배척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차별하거나 계층화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올 것이다.” (마태 8,11) 모두가 그리스도의 성심(聖心)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구유 안에 계신 예수님을 다시 한번 감탄하며 바라봅니다. 그때 그분의 팔은 한 아기의 팔입니다. 그러나 그 팔은 십자가 위에서 펼쳐지실 주님의 팔과 같은 팔입니다.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끌어 들이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팔인 것입니다.

끝으로, 바로 그 남자, 우리의 아버지이신 요셉 성인을 생각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그랬듯이 예수님의 공현 사건에서도 확실히 매우 작은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다해 하느님의 아들을 보호하면서 기도하고 계신 요셉 성인을 말입니다. 그가 보호하는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셨으며, 요셉 성인이 아버지가 되어 돌보도록 맡겨졌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 특유의 경이로운 품격을 지녔습니다. 이 거룩한 가장은 그렇게 조용히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봉사하면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기도하는 삶의 실천과 사도직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요셉 성인보다 우리를 더 잘 가르쳐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제게 조언을 원하신다면, 최근 여러 해 동안 반복했지만 결코 질리지 않는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요셉에게 가십시오 (Ite ad Ioseph).” (창세41,55) 그분이 예수님께 다가가는 명확한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보여주시는 길은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거룩한 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곧 요셉 성인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를 위해 태어난 하느님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입 맞추고 옷을 입히며 돌보게” 될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께서는 당신의 모든 청춘과 사랑하는 마음을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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