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요셉 성인’의 일터에서 (1963년 3월 19일 ‘성 요셉 축일’ 강론)

모든 교회는 요셉 성인을 수호성인이자 보호자로 모십니다. 수 세기 동안 요셉 성인의 삶에 나타난 다양한 특징들은 신앙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에 항상 충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수년 동안 그분을 기꺼이 “우리 아버지요, 고귀한 분”이라고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요셉 성인은 진정한 아버지이자 고귀한 분이십니다. 요셉 성인은 당신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여정에 함께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성장하실 때 그분을 보호하고 항상 동행하셨던 것과 똑같이 말입니다. 요셉 성인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이 거룩한 가장이 내적 삶에 있어서도 최고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나누도록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까닭입니다. 요셉 성인이 우리에게 이런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며, 평범한 가정이 있는 남자이고,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엄청난 의미를 지니며, 우리들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오늘 성 요셉 축일을 지내며 저는 여러분께 그분을 상기시켜 드리고, 그분에 관해 복음서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남편께서 행하신 단순하고 담백한 삶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제 강론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복음서가 기록한 요셉 성인 

복음사가 마태오 성인과 루카 성인은 요셉 성인이 다윗과 솔로몬의 가계, 즉 이스라엘의 왕족 집안 출신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분의 선조들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명확히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두 계보(系譜) 중 어떤 것이 유다 율법에 따른 예수님의 양아버지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또한 어떤 것이 예수님의 육신을 낳아주신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울러 요셉 성인의 출신이 인구조사를 위해 다녀왔던 곳인 베들레헴인지, 아니면 그가 살았고 일했던 나자렛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그가 유복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단지 한 사람의 노동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초라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 성인이 하신 바로 그 일을,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선택하셔서 우리 인간들과 똑같이 생계를 위해 삼십 년 동안 종사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요셉 성인이 장인(匠人)이었다고 일러줍니다. 몇몇 교부(敎父)들은 그분이 목수였다고 설명합니다. 유스티누스 성인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 얘기하면서 요셉 성인이 쟁기와 멍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 성인이 요셉 성인의 직업을 대장장이라고 결론 지은 것은 아마도 그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어쨌든 간에 요셉 성인은 오랜 세월 고되게 땀 흘려 얻은 손재주로 이웃 시민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주던 기술자였던 것입니다.

복음서는 놀랍도록 착실한 성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그분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여러 문제에 직면해서 어려운 상황들을 잘 대처하며,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책임감을 갖고 솔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요셉 성인을 나이든 남자로 묘사하는 전통적인 그림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그림들이 성모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童貞)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긴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저는 그분이 건강하고 젊은 남자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성모님보다는 조금 나이가 들었겠지만, 자신의 인생과 일에 있어서 전성기를 맞은 젊은 남자였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정결의 미덕을 실천하기 위해 굳이 늙고 기력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요. 순결이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요. 젊음의 힘과 유쾌함은 결코 고귀한 사랑의 장애물이 아닙니다. 요셉 성인이 성모 마리아와 결혼했을 때, 그러니까 성모님의 거룩한 모성(母性)의 신비를 알고 성모님과 함께 살게 됐던 그때 요셉 성인은 젊은 마음과 육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주고자 하신 고결함을 존중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들과 삶을 나누고자 오셨다는 또 하나의 징표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에 대해 조금도 알 수 없으며,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정결의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얘기했지만, 요셉 성인은 갈릴래아 출신의 장인(匠人)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처럼 보잘것없는 마을 사람의 삶에 무슨 내세울 것이 있었을까요? ‘일(노동)’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요! 항상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매일 매일의 일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가 저물면 그다음 날을 위해 휴식하며 기력을 되찾을 가난하고 작은 집이 있을 뿐이었겠지요.

하지만, 요셉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하느님께서 더하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삶에 전혀 예상치 못한 영역을 더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에 의미를 주는 중요한 영역, 거룩한 영역을 부여하십니다. 이를테면 요셉의 겸허하고도 거룩한 삶에 동정 마리아와 우리 주님 예수님의 삶을 더해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한없이 너그러우십니다. 요셉 성인은 당신의 아내인 성모 마리아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새겼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 28-29).

요셉 성인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에게 위대한 일들을 하게 하시고 그를 신뢰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모든 사건들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성경이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찬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 1,19). 히브리말로 ‘의로운 사람’은 ‘착하고 충실한 하느님의 종’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 (참조 창세 7,1. 18,23-32) 혹은 이웃에게 훌륭하게 행동하고 자애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참조 토빗 7,5. 9,9)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고 자기의 온 생애를 형제와 동료들을 위해 바침으로써 스스로의 사랑을 증명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셉 성인의 믿음, 희망, 사랑 

‘의롭다’는 것은 단순히 규칙을 잘 준수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면에서부터 선한 마음이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심오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쳐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하바 2,4) 라고 했습니다. 자주 바오로 사도의 묵상 주제가 되었던 이 말씀은 요셉 성인의 경우에 정말로 딱 들어맞습니다. 그분은 결코 마지못해서 형식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했습니다. 요셉 성인에게 있어서 모든 유다인들이 지키는 율법이란 그저 그런 규칙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냉정한 훈계의 목록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율법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이 말로 표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도 예기치 않게, 너무나도 놀랍게 하느님의 목소리가 그에게 들려왔을 때 요셉 성인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 성인의 삶은 단순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요셉 성인은 얼마간 매우 불안해하며 걱정했지만, 마리아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알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인 그 아기는 동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했고, 먼 나라로부터 귀한 손님들(동방박사들)이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왕은 아기를 죽이려 했고, 그들은 피신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겉으로 볼 때 무방비 상태의 아기로 이집트에서 사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마태오 성인은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요셉의 충실함을 계속 강조합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계명을 흔들림 없이 지켰습니다. 그 계명의 의미가 때로는 모호했고, 또 하느님의 다른 계획들과의 연관성을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굳세게 계명을 수행했습니다.

교부(敎父)들과 영성가들은 요셉 성인의 굳건한 믿음을 자주 강조합니다. 헤로데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한 천사의 명령과 관련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요셉 성인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 참 이상하다. 얼마 전에 천사님께서 이 아기(예수님)가 자기 백성들을 구할 거라고 직접 말씀하셨는데, 이제 와서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 아기가 자기 자신조차 구할 수 없다니. 그래서 우리가 피난을 가야 하고 긴 여행을 거쳐 낯선 땅에서 오래도록 지내야 한다니, 이건 천사님의 약속과 모순이지 않은가’…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참조 마태 2,13) 하고 모호한 말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언제 돌아올지 묻지 않습니다. 요셉은 반항하지 않고 순명하고 믿으며, 이 모든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요셉의 믿음은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순종합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즉시’ 순명합니다. 이 가르침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요셉의 믿음이 능동적이었고, 그의 순명이 사건의 흐름에 그저 따라가는 수동적인 복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무기력한 순응이나 타성(惰性), 그리고 적극성의 부족 등과는 일말의 연관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보호에 맡겼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성찰했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일’을 그토록 높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계획은 인간의 계획들을 단박에 뒤엎어버리는 논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일생 동안 다양한 상황들과 마주했지만, 요셉 성인은 결코 생각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요셉 성인은 자신의 인간적 경험을 믿음의 봉사에 적용합니다. 이집트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이스라엘로) 가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마태 2,22). 다시 말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일하는 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 성인은 꿈을 통해 갈릴래아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옳았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요셉 성인의 믿음은 충만해지고 확신에 찼으며, 완벽해집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실제적인 헌신과 지혜로운 순명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함께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요셉 성인의 사랑을 키웠습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와 맺은 약속을 이뤄주시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요셉 성인의 믿음은 또한 아내인 마리아와 아들 예수에 대한 애정을 자라나게 했습니다. 이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위대한 사명으로 발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갈릴래아에 사는 한 목수를 통해 이 세상에서 그 일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구원’이었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요셉 성인의 삶을 지탱해주며,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지켜주는 버팀목입니다. 요셉 성인의 헌신은 충직한 사랑과 사랑 넘치는 믿음,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는 희망이 하나로 맺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 요셉 축일은 하느님께서 주신 그리스도교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새롭게 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믿음, 희망, 사랑으로 살고자 할 때, ‘여러분의 약속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무시하고 내버려뒀던 것을 다시 시작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새롭게 한다’는 것의 의미는 ‘하느님 손 안에 머무른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의 숱한 인간적인 잘못과 실수,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약속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충실함을 확인하여 새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사랑을 행동으로 드러냄을 뜻합니다.

사랑에는 어느 정도 기준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랑이 자기만족을 위한 충동이거나 자기 인격의 이기적인 충족을 위한 수단인 듯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런 건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쁨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뿌리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희생과 고통 없이는 진정한 사랑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다가올 영원하고 충만한 삶에 도달할 때까지 사랑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고통은 달콤하고 사랑스러워집니다. 고통은 내적 기쁨의 원천이지만, 이것은 진짜 아픔입니다. 왜냐하면 저마다의 이기심을 이겨내고, 사랑을 우리들 각자의 원칙으로, 또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원칙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처럼 보이더라도, 사랑으로 한 일은 소중합니다. 우리가 가련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잠언 8,31).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고 하찮은 일로 여겨지더라도, 모든 것이 소중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아무것도 헛되지 않으며, 쓸모없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를 더불어 나누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가정에서, 일터에서, 시민적 의무에서, 그리고 권리의 행사에서 자신의 성소를 수행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요셉 성인의 삶은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요셉의 삶은 단순하고 일상적이며 평범했습니다.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고 단조롭기 짝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저는 종종 요셉 성인의 삶에 관해 묵상하며 이렇게 단조로운 인생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요셉 성인을 특별히 공경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요한 23세 교황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첫 회기를 마치면서 미사 전문(典文)에 요셉 성인의 이름이 포함될 것이라고 발표하셨습니다. 그때 어느 고위 성직자가 제게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교황님의 발표를 듣고 곧바로 호세마리아 신부님을 떠올렸습니다. 신부님이 얼마나 행복해할지 생각했지요.” 저는 실제로 행복했습니다. 공의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로 모인 전체 교회를 대표합니다. 그런 공의회에서 요셉 성인이 사셨던 삶의 위대한 초자연적 가치가 선포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뤄내기 위해 부단히 노동하며 살아오신 평범한 일상의 가치가 선포된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제가 행복했던 이유입니다.

여러분의 일을 거룩하게 만드십시오. 그러면 여러분과 다른 사람들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제 삶을 모두 바친 ‘오푸스데이’의 영성을 설명하면서, 저는 오푸스데이의 영성이 세상 한가운데서 수행하는 우리의 평범한 노동과 직업적인 일들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말해왔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합니다. 그 사명은 교회의 특별한 임무를 함께 나누고, 우리 동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함으로써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이끌어가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들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 보입니다. 이는 곧 믿음을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이유를 확신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우리 삶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넓이와 깊이를 획득합니다. 지나간 모든 일과 사건들이 진실한 시선으로 다시 조명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면서 우리 자신이 새로 태어나는 것을 실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무지의 그림자로부터 끌어내셨습니다. 인류의 역사 내내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던 방황의 그림자로부터 우리를 빠져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진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건 간에 하느님께서는 힘찬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예전에 부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19).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어려움을 겪고 악전고투하며,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비탄에 젖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의기소침해지거나 번민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이 충분히 살 가치가 있으며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12)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빛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충분히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처럼 이야기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 68-69) 우리가 진정 이렇게 베드로처럼 말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어둠 속을 걷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깊이 들어오도록 했으니 말입니다. 왜냐하면 폭풍우 위에서 태양이 빛나듯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빛이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들 각자의 결점을 비춰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소명은 우리네 존재의 일부분이 아닌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는 필연적으로 우리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라고 요구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새로운 시선으로 삶을 바라봅니다. 삶의 일부가 아닌 모든 측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선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오늘 저와 함께 성 요셉 축일을 축하하는 여러분은 각기 다른 분야의 직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각자의 집을 따로 갖고 있고, 각자 국적도 여러 나라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릅니다. 강의실에서 교육을 받았을 수도 있고,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배웠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마다의 직업에서 여러 해 동안 일해왔습니다. 여러분의 동료들과 직업상의 관계 또는 개인적인 친교를 쌓아왔고, 여러분의 회사와 공동체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어왔습니다.

네 좋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여러분이 가진 직업은 여러분이 하느님께 받은 소명의 아주 중요한 일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거룩해지기 위해서 분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격에 특별한 품성을 부여해야 하고, 여러분의 생활이 일정한 양식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여러분의 동료들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기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일과 여러분의 환경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환경이란 여러분이 하루를 보내는 직업과 직장, 여러분이 태어나고 사랑하는 여러분의 가정과 가족, 그리고 국가 등을 말합니다.

‘일’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 삶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일은 노력과 권태와 피곤을 모두 포함합니다. 일은 고통과 분투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고통과 분투는 인간 존재에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며 죄의 현실과 구원의 필요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보면, 일은 불이익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며 벌(罰)도 아닙니다. 일에 관해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널리 외쳐야 할 때입니다. 일은 하느님이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어떤 직업이 다른 직업보다 귀하다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며, 직업에 따라 사람을 나눠 차별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외쳐야 합니다. 모든 일은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증언합니다. 일은 각자의 인격을 성장시키는 기회이며, 다른 사람들과 유대를 맺는 끈입니다. 일은 또한 저마다의 가족을 부양하는 길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개선과 모든 인류의 발전을 돕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의 지평은 확장되고, 더욱 폭넓게 자라납니다. 일이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고 축복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창세 1,28)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당신 손으로 직접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받음과 동시에 구원하는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일은 인간 삶의 배경일 뿐 아니라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며 여정입니다. 일이란 거룩하게 되어야 함과 동시에 거룩하게 하는 그 무엇인 것입니다.

일이 존엄한 근거는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의 위대한 특권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덧없이 흘러지나가는 것들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을 향해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나’와 ‘너’라고 부르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를 당신 가족의 일원으로 만드시고, 서로 마주 보고 친교를 나누며 하느님께 이야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은 물질적 생산에 스스로를 가둬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일은 사랑의 산물(産物)입니다. 일은 사랑의 현시(顯示)이며, 사랑을 지향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경이로움에서뿐만 아니라, 일을 하며 노력한 우리의 경험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봅니다. 그러기에 일은 ‘기도’와 ‘감사’가 돼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땅 위에 두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고, 또한 하느님께 우리가 사랑받고 있으며, 그분이 하신 약속을 우리가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1코린 10,31)

또한 직업은 하나의 사도직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들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고, 아버지 하느님께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넘치는 사랑입니다. 바오로 성인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그들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설명했는데, 그 가운데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도둑질하던 사람은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애써 좋은 일을 하여 곤궁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에페 4,28). 인간은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현실적으로 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그들의 마음을 밝히고, 가슴을 뛰게 할 ‘하늘의 빵’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이 주는 기회들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일터에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거래할 때 여러분은 이러한 사도직의 계명을 수행할 수 있고, 또한 수행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일한다면, 여러 인간적 한계가 있더라도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그분의 성인들과 더불어 통공하는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오직 자기희생과 충실함, 친교와 기쁨만이 넘쳐납니다. 여러분의 일상적인 직업 노동은 진실되고 굳건하며 고귀한 재료들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재료들을 가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은총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여러분의 일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위해 직장의 일을 하면, 그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작동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이 수반하는 여러 가지 사건과 문제들, 그리고 친분 관계 등은 여러분에게 기도의 양식(糧食)을 선사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일상 업무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십자가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나약함을 감지할 때, 인간적인 일에서도 좌절을 느낄 때, 여러분의 객관성과 겸손이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고요. 여러분이 얻는 성공과 기쁨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끔 해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것입니다.

유용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봉사하며 섬기십시오 

이렇게 우리의 직업과 일을 거룩하게 하면서 살고 싶다면, 우리는 정말로 일을 잘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도 초자연적으로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화제를 돌려서, 이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태도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외경(外經)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목수였던 예수님의 아버지는 쟁기와 멍에를 만들었다. 어떤 유력한 인사가 그에게 침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침대의 다리 하나가 다른 다리들보다 짧게 만들어지고 말았다. 요셉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자 어린 예수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두 개의 다리를 땅바닥에 놓고서 한 쪽 끝을 맞춰 똑같은 길이로 만드세요.’ 요셉은 어린 예수가 말해준 대로 했다. 어린 예수가 한쪽 끝으로 가서 더 짧은 나무 기둥을 잡아 다른 기둥과 길이가 같아질 때까지 잡아당겼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이러한 기적에 몹시 놀랐으며 어린 예수를 안고 입을 맞추었다. 요셉은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런 아이를 주셨으니, 나는 정말 행운아로구나!’”

물론, 요셉 성인이 그런 식으로 감사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쉬운 해결책이나 작은 기적 같은 것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내하고 노력하며, 필요할 때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며, 수 세기 전에 기적을 일으키셨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기적을 행하고 계시며, 지금도 여전히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손이 짧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적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권능의 징표입니다. 기적은 무능함을 치료하는 방편도 아니고, 무언가를 노력하지 않고 쉽게 해결하려는 방법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기적’은 이렇습니다. 매일 여러분이 맡은 일을 성화(聖化)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주신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소명을 최선을 다해 계속 이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요청하시는 기적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매일매일의 평범한 산문(散文)을 영웅적 서사시(敍事詩)로 바꾸는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은 여러분이 일상적인 일에 쏟는 사랑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곳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이 사도로서의 열정과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훌륭한 능력을 가진 책임감 있는 인간이 되길 기대하고 계십니다.

더불어, 저는 여러분이 일하는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봉사하십시오.’ 제대로 일을 하려면 우선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전문적인 직업 기술을 습득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들을 올바로 수행하려고 분투하지 않는다면, 저는 그런 사람들의 성실성을 믿지 않습니다. 단지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만약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이 진심이라면, 그 일을 하기에 꼭 맞는 방법을 행하려는 우리의 노력으로부터 그러한 열망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일을 잘 해내고 인간적인 완벽함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활용하려는 노력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적 봉사와 그에 걸맞는 기술, 그리고 직업에 관한 지식은 하나의 일관된 특징을 가져야 합니다. 그 바탕을 요셉 성인의 ‘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됩니다. 그것은 바로 봉사의 영성이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려는 열망입니다. 비록 요셉의 활동적인 삶이 그를 강인하고 힘찬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어 주었을지라도, 요셉 성인은 일의 중심에 결코 자기 자신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을 할 때 항상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을,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를, 그리고 나자렛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나자렛의 유일한 목수는 아니었겠지만, 그는 나자렛에서 몇 안 되는 장인(匠人)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골 마을이 늘 그렇듯이, 요셉은 목수일 말고 다른 일도 해달라는 요청을 분명히 받았을 겁니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방아를 고쳐주고, 겨울이 다가오면 지붕의 기와를 수리해주었을 겁니다. 여러 일들을 잘 처리하려면, 어떻게 사람들을 도와야 할지 요셉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을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과정에서 그의 숙련된 노동은 마을의 다른 가족들의 삶을 밝게 비춰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한 줄기 미소와 친절한 말 한 마디로, 그리고 부담스럽지 않게 슬쩍 지나가는 얘기로 이웃 사람들의 힘을 북돋워 주었을 것이고요. 덕분에 자신감과 행복을 잃을 뻔했던 이들이 활력을 되찾았을 겁니다.

요셉은 때때로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에게 아주 적은 수고비를 받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고객이 그래도 뭔가를 지불했다고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 수준에서 수고비를 조금만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그는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게 정당한 수준의 보수를 청구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하다는 것이 권리를 포기한다는 의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권리는 사실상의 의무이기도 하니까요. 요셉 성인은 정당한 보수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그에게 의탁하신 가족을 부양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이유로 요구해선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도 똑같이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의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른 사람들의 결핍을 잊어버리고 종교가 주는 안락함 속에 스스로를 걸어 잠근다면 그건 정말로 잘못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정의로운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서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고귀한 열망을 이루기 위해 일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성인의 유명한 말씀을 통해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정당하게 행동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의 마음속엔 진실이 없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수호 성인이신 성 요셉을 기념하는 축일을 선포한다는 교회의 결정을 듣고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듯이 저도 기뻤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이 축일은 노동의 거룩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복음의 중요한 진리에 대해 어떻게 공식적으로 화답하는지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묵상하길 바라시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말입니다.

전에도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요셉 성인의 삶이 보여준 자연스러움과 소박함에 관해 한 번 더 얘기하겠습니다. 그분의 삶은 이웃의 삶과 결코 유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웃을 대함에 있어서 인위적인 벽을 쌓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가톨릭 노동자, 가톨릭 기술자, 가톨릭 의사라고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시대나 상황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게 맞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떤 종(種)에 속한 류(類)를 얘기하듯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마치 가톨릭이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작은 집단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리스도인과,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 틈이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반대 의견들도 존중합니다만, 저는 ‘가톨릭 신자인 노동자’, 혹은 ‘노동자이거나 기술자인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적인 직업이건, 기술적 직업이거나 육체노동이거나 간에, 직업을 가진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로 살아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고, 또한 실제로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더 발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며, 공동의 문제에 직면해 그 문제를 풀어가려는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고자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 가톨릭 신자는 일상의 삶을 통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증명할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통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증명은 결코 과장되거나 상황에 따라 변할 필요가 없는 담백하고도 평범한 증언입니다. 가톨릭 신자의 삶이 가진 활력은 교회가 이 세상에 변치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그 자신이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 안에서 하나의 백성이 되는 권리를 가졌고, 그러한 권리를 나누는 구성원들이 곧 그들인 까닭입니다.

요셉과 예수님과의 관계 

저는 얼마 전부터 요셉 성인께 바치는 감동적인 기도문으로 즐겨 기도드려 왔습니다. 미사를 준비하는 기도문으로 교회가 우리에게 권고한 것입니다. “은총 받으신 행복한 성 요셉이시여, 당신은 하느님을 뵙고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허락받으신 분입니다. 수많은 왕들이 그토록 하느님을 뵙고 싶어 했고 목소리를 듣길 원했지만,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인께서는 그분을 뵙고 목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당신 품에 하느님을 안고, 그분께 입맞추며, 옷을 입히고 돌보십니다. 성 요셉이시여. 저희를 위해 기도하소서.” 이 기도문은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마지막 주제의 시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끝으로 말씀드릴 주제는 요셉 성인이 예수님을 대하는 사랑 가득한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요셉 성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삶은 자신의 성소를 끊임없이 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서로 상반된 상황들로 가득했던 요셉 성인의 초기 체험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영광과 이집트로의 탈출이 이어졌고,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장엄한 순간과 가난하고 미천한 구유가 공존했습니다. 천사들은 노래했지만 인류는 침묵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요셉은 제물로 바칠 비둘기 한 쌍을 가져갔습니다. 요셉은 시메온과 한나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선포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루카 2, 33) 라고 루카 성인은 기록했습니다. 그 후에 12살 소년이 된 예수님이 예루살렘 축제에 갔다가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 모르게 혼자 예루살렘에 남았고, 마리아와 요셉은 사흘 동안 찾아다닌 끝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부모는 무척 놀랐다.” (루카 2, 48) 라고 복음사가 루카는 우리에게 전합니다.

요셉 성인은 정말로 놀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당신의 계획을 그에게 드러내셨고, 요셉 성인은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알게 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며 의심을 가질 여지 또한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요셉 성인도 곧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수준에 올라섰다고 해서 그 상태에 그냥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스스로의 성취에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더 많이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같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마음과 정신이 항상 깨어 있는 법을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요셉 성인이 예수님으로부터 거룩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면, 인간적으로는 요셉 성인이 하느님의 아들을 가르친 것도 많았을 거라고 저는 감히 얘기하겠습니다. 요셉 성인에게 이따금씩 주어지는 ‘양아버지’라는 호칭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호칭이 요셉 성인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어쩐지 차갑고 형식적인 것처럼 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육신적으로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육신의 부자 관계가 부성(父性)의 유일한 특성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한 강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란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넘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성인은 어땠을까요? 그의 부성(父性)이 정결하였던 것만큼이나 성인은 아버지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다른 아버지들과 똑같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사랑의 결실이 아닌, 육신으로 아들을 가진 다른 아버지들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랬기 때문에 루카 성인은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왜 루카 성인은 ‘사람들이 생각했다’고만 얘기할까요?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생각과 그러한 인간적 판단이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요셉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의 깊은 신심과 사랑이 있었기에 그에게 아들이 생긴 것입니다. 태어나신 그 아기는 동정 마리아의 아드님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친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 예수님을 사랑했고,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들을 아들에게 줌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아이를 돌봤으며, 자기의 전문 기술을 전수해 예수님을 장인(匠人)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자렛의 이웃사람들이 예수님을 ‘장인(匠人-목수)이자, 장인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 성인의 작업장에서, 요셉 성인의 곁에서 일했습니다. 요셉 성인은 어떤 분이어야 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왜 요셉 성인을 통해서 이 세상에 그토록 큰 은총을 주셨을까요?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아들을 인간적으로 양육하는 사명을 어떻게 완수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요셉 성인을 닮으셨을 것입니다. 일하는 방식, 성품과 말투를 닮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특유의 현실주의와 세세한 것들에 대한 섬세한 시선,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나누는 방법, 그리고 가르침을 주실 때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상황을 주로 활용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요셉 성인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이스라엘 어느 특정 지역의 말투를 쓰고, 요셉이라 불리는 목수와 닮은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장엄한 신비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누가 하느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이셨고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로, 그런 다음에는 소년으로 요셉의 작업장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성인이 되어서 삶의 절정기를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루카 2,52)

인간적 삶의 측면에서 보면, 일상의 관계에서는 요셉 성인이 예수님의 스승이었습니다. 절제된 애정으로 예수님을 더 잘 돌보기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 의로운 인간을, 이 거룩한 가장을 우리네 내적 삶의 스승으로 여길 만한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요셉 성인에게서 구약의 계약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내적 삶이란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직접적인 대화를 나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에 관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 성인에 대한 공경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구약에 기록된 그리스도교의 전승 그대로 하십시오! - “요셉에게 가라.” (Ite ad Ioseph–창세 41,55)

요셉 성인은 내적 삶의 스승이십니다. 자신의 일에 깊이 헌신하는 노동자이시며, 예수님과 끊임없이 소통하신 하느님의 종이 바로 요셉 성인이십니다. 그러니 요셉에게 가십시오 (Ite ad Ioseph). 요셉 성인 덕분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또한 세상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소임을 온전히 떠맡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요셉 성인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예수님도 만날 것입니다. 요셉 성인과 얘기하십시오. 그러면 나자렛의 멋진 일터에서 당신 주위로 항상 평화를 드리우셨던 성모님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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