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개인과 그들의 자유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존중 (1961년 3월 15일 강론)

우리는 오늘 미사에서 방금 요한 성인의 복음 말씀을 읽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 우리 모두 다시 한번 감동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행을 무심하게 바라보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엄존할 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존경심을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움츠러들 때,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무분별하고 무자비하게 침해할 수 있는 위험이 움튼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요한 9,1)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자비를 이렇게 간단하게 묘사하는 성경 말씀에 저는 자주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로 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인간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요한 9,2)

충동적인 판단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제자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충동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증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 생각을 혼자만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의 성급한 판단을 여기저기 퍼뜨립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그나마 호의적으로 보자면, ‘근시안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시종일관 그런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바리사이 같은 자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사이들을 얼마나 비난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말한다.” (마태 11,18-19)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명성을 비방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에 고통받으셨습니다. 그분의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을 중상하고 욕하며 상처 입히는 비난들이 쏟아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성적인 결함을 가졌고 개인적으로도 실수를 저지르지만, 자신의 그런 단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려 합니다. 그들이 지닌 인간적 나약함이란 워낙 흔하고 피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마저도 예수님과 똑같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의 명성을 해코지하는 죄와 불의가 용납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런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그저 “이상한데”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자신들의 행적을 지우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마태 10,25)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 5,22)

이렇게 부당하게 남을 헐뜯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마치 ‘시선을 왜곡하는 안경’을 쓰고 있는 듯합니다. 원론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인 삶의 가능성을 거부하거나, 최소한 옳은 일을 하려는 끊임없는 노력들을 부정합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미리 왜곡해버린 모습들로 얼룩져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귀하고 이타적인 행동들조차 단지 착하게 보이려고 꾸며낸 위선적인 작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확실히 찾아냈을 때 그 일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그 선한 일 안에 숨겨진 결점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서 말입니다.”

이렇게 왜곡된 성향이 제2의 천성처럼 굳어버리면 도움을 주기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생각하는 것이 더욱 인간적이고 진실한 태도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다음과 같은 경험칙을 들어 조언합니다. “여러분의 형제들에게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미덕들을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갖추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더 이상 그들의 단점들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자신이 그런 단점들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이 행동방식을 순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더 영리하고 “실질적인” 이들입니다.

자신의 편견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난할 땐 재빠르지만, 남의 말을 경청하는 데는 매우 느립니다. 그들은 남을 비난한 뒤에도 “편견 없거나 정정당당하게” 보이려는 듯이 자기들이 비난한 사람에게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가장 기초적인 정의나 도덕성에 따르면, 남을 고발한 사람이 먼저 증거를 제시해야 하겠지만, 그들은 이렇게 당연한 원칙을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고발을 하고 나서 무슨 특혜나 주는 것처럼 무고한 사람에게 스스로의 결백을 입증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 생각이 교회법이나 윤리신학에서 빌려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겠습니다. 이것은 아무런 잘못 없이 비난받았던 상처를 가진 많은 사람들의 경험에 근거합니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그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되풀이해서 비난의 표적이 되어왔습니다. 험담과 비방, 중상에 목매는 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리고 상대방의 비난을 되받아치지 않는 천성 덕분에 조금의 비통함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오로 성인처럼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코린 4,3) 더 흔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러거나 말거나 별 상관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맞는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른 사람들의 진심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자들 때문에 슬퍼진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모욕을 일삼는 자는 스스로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방자하고 난폭한 비난에 직면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떱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상황이 정말로 있을 법한 일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악몽이 아닐까 의심합니다.

며칠 전 미사에서 우리는 수산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순결한 여인 수산나가 음행을 저질렀다고 두 음탕한 원로들에게 거짓으로 고소당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꼼짝 못할 곤경에 빠졌소. 그렇게 하면 그것은 나에게 죽음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오." (다니 13,22) 시기와 음모가 불러온 그따위 속임수들 때문에 수많은 고결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자주 수산나처럼 궁지로 내몰렸습니까? 그들에게는 한 가지 선택만 주어집니다. 하느님께 죄를 짓거나 아니면 그들의 명성을 더럽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정직하기도 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그렇게 하지 않고 당신들의 손아귀에 걸려드는 편이 더 낫소.” (다니 13,23)

사생활의 권리 

예수님께서 눈먼 남자를 치료해주시는 장면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눈먼 남자의 불행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놀랍도록 간단하게 눈먼 남자에게 빛을 되찾아 주시기로 결심하십니다.

그로 인해 불쌍한 남자에게 행복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고뇌도 함께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요한 9,8)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는 그들이 눈을 뜬 남자를 괴롭히면서 기뻐했다고까지는 전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 눈이 멀었던 그 남자는 자신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으나 지금은 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을 뜬 남자가 새로 맞이한 행운을 평화롭게 즐기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를 바리사이들에게 데려갔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냐고 캐물었지요. 그러자 그 남자는 다시 한번 대답했습니다.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요한 9,15)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그 남자에게 일어난 이 명백한 은총의 기적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고 우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지요. 그들 중 몇몇은 옹졸하고 위선적이며 비논리적인 주장을 폈습니다. 그 남자가 안식일에 치유되었다고 트집을 잡은 거죠.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율법에 위배된다면서 이 경이로운 사건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바리사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진상조사라고 부를 법한 일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우선 눈먼 남자의 부모들에게 접근합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요한 9,20-21) 남자의 부모는 그들의 권위가 두려워서 있는 그대로의 내용만을 기술적으로 대답합니다. “이 아이는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요한 9,20-21)

눈먼 남자의 부모를 조사한 바리사이들은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안 믿겠다고 작정을 했으니까요.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하고 말하였다.” (요한 9,20-21)

요한 성인의 기록을 보면, 부도덕한 자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전형적인 방법에 대해 단 몇 마디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기본적인 자연권을 훼손하는 방법 말입니다.

이런 식의 작태가 비단 과거에만 일어났던 일은 아니지요.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병적으로 파고드는 공격적인 호기심은 오늘날에도 여러 경우가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그 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요. 실제로 뭔가 잘못이 있다고 의심되는 경우에도, 아주 조금이라도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도록 조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우 주의 깊게, 절제해서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최소한의 정의입니다. ‘법에 어긋나지 않는 명확히 선한 행동’에 대해서 불건전한 호기심으로 이를 검증하려 들면 사건을 왜곡하게 됩니다. 이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선의(善意)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사생활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존엄함을, 평화롭게 살아갈 그들의 권리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모든 정직한 사람들은 이러한 권리 수호의 필요성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가치가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가치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이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권리이며, 가족 안에서 희로애락을 누릴 권리입니다. 세상에 알리지 않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권리와, 순수한 사랑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권리 역시 그런 보편적 가치에 포함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개인의 노력을 사방에 선전하지 않으며 이웃에 대한 봉사가 허용돼야 하는 것이지요. 분별없고 뒤틀린 자들의 눈에 우리의 내적 생활을 드러내지 않고도 그러한 봉사가 가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뒤틀린 시선을 가진 자들은 우리의 내적 생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설령 관심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걸 빌미로 우리를 조롱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집요하게 남의 뒤를 캐는 자들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사람을 홀로 가만히 놔두지 않기 위해 고안된 방법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기술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제법 알려진 논쟁의 방식들까지 포함합니다. 너무 교묘해서 그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의 명성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그런 논쟁 말입니다. 그런 논쟁 중 흔한 방식을 예로 들자면,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한다’고 억지 추정을 하는 겁니다. 이런 그릇된 일련의 사고방식에 끌려가다 보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내 탓이요”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고 자기비판에 빠져들고 맙니다. 만약 우리가 먼저 자기비판을 하지 않는다면, 비난하는 자들은 지체 없이 나서서 우리가 교활한 악당일 뿐 아니라 위선적이고 거만하다고 떠들어댈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난하는 과정이 다릅니다.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의도를 가진 작가나 호사가들이 여러분을 개인적으로는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올바른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두고 도둑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자신이 도둑이 아님을 증명하겠습니까?” 아니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죠. “여러분은 언제나 여러분의 행동이 깨끗하고 고귀하며 올바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여러분의 행동이 더럽지 않고, 삐뚤어지지도 않고, 비열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해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예들은 제가 마음대로 뽑아낸 게 아닙니다. 누구나 제가 제시한 목록에 들어갈 수 있으며, 나름 유명한 단체나 기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려는 그릇된 사고들은 특별한 환경에서 생겨납니다. 특별한 환경이란, 다른 사람의 삶의 가장 은밀하고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 알아내고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어떤 특정 대상에게 주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 특정 대상이 대중이거나 미디어이거나, 그 명칭을 뭐라고 하든지 간에 말입니다.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얘기를 해드려도 될까요? 삼십 년 이상 저는 오푸스데이가 세속적이거나 정치적인 목적을 결코 추구하지 않는다고 얘기해왔고 또한 그렇게 글을 써왔습니다. 오푸스데이는 모든 민족과 모든 사회적 상황과 모든 나라들에서 그리스도 구원의 가르침을 더 잘 알리고, 더 잘 실천하는 일에만 오로지 매진해왔다고 수많은 방법을 통해 말해온 것입니다. 오푸스데이는 이 땅에 하느님의 사랑이 더 많아져서 같은 아버지의 자녀인 모든 사람들 사이에 더 많은 평화와 정의가 생겨나도록 헌신하길 바랄 뿐입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오푸스데이의 지향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희를 이해하시는 분들께는 더욱더 마음 깊이 다가가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맥락에서, 저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분들도 더 존경하고 사랑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존엄함 역시 마땅히 존경받고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 또한 모두가 하느님 자녀가 되는 영광으로 부르심 받은 이들이니까요.

하지만 저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무시하는 소수의 편파적인 부류가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푸스데이에 관해 우리가 자신들의 언어로 설명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말은 배타적으로 정치색을 띠며, 초자연적인 실재(實在)와는 무관하고, 오로지 권력 놀음과 압력 단체들에만 동조할 뿐입니다. 오류투성이고 왜곡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설명이 주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여기 계신 여러분이 거짓되고 사악한 계획을 가졌다고 계속 주장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제게 닥친다면 저는 슬퍼하지도,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한 말씀 더 드려야겠네요. 그들이 부정과 죄악을 범했고, 그 정도가 하늘에 대고 바로잡아 달라고 호소해야 할 지경인데도 제가 그 사실을 합법적으로 보아 넘길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웃을 일 아닌가요? 그런데 저는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습니다. 저는 솔직함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한 지역 출신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저는 진심(眞心)을 존경합니다. 저는 속임수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본능적으로 반대합니다. 저는 비난받을 때마다 교만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려고 언제나 노력해왔습니다. 심지어 저를 헐뜯는 사람들이 난폭하고, 거만하며, 적대적이고,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보이지 않을 때조차 저는 최선을 다해 진실만을 얘기해왔습니다.

눈(眼)의 노약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던 그 남자의 대답이 제 마음속에 자주 떠오릅니다. 바리사이들이 그에게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여러 차례 물었지요.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요한 9,27)

바리사이들의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들 안에 가둬버린 데 있습니다. 자신을 걸어 잠금으로써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바로 바리사이들의 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빛이어야 한다고 믿으며, 하느님께서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은 부당하고 오만한 태도로 자기 이웃을 대할 것입니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도둑질하고 속이고 간음이나 하는 그들과 같지 않게 해주시고, 여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요한 9,39-41)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한때 눈이 멀었던 그 남자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치유됐다고 진심으로 설명하지만, 바리사이들은 그를 모욕합니다.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요한 9, 34)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 중에도 정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스스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며, 진실하고 친절하며 고상합니다. 만약 그들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닫힌 눈을 치료해주시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그분의 손에서 치료약으로 변한 진흙을 우리에게 발라주시도록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참된 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믿음의 빛으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거룩한 현실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지향점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소입니다. 우리는 사랑(愛德)으로 충만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1코린 13,4-7)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 이웃에 대한 친절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선(慈善)을 선호하는 경향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부어주신 것이고, 우리의 마음과 의지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사랑은, 우정을 나누고 옳은 일을 한 기쁨을 누리는 초자연적인 기반을 제공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불구자의 치료 장면을 묵상해봅시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데 문 옆에 앉아 있는 불구자와 마주칩니다. 그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눈먼 남자의 치유와 흡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불구자의 불행이 그의 죄 때문이거나 그 부모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그에게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사도 3,6) 이전에 제자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모욕했지만, 지금은 자비로 그를 대합니다. 이전에는 사람을 경멸하며 판단했지만, 지금은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의 기적을 그에게 선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우리 곁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도와 제자들의 모습으로 이 세상의 거리와 광장들을 계속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제 말씀을 듣고 계신 여러분의 영혼으로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시기를 간구합니다.

존경과 사랑 

처음에 우리는 날 때부터 눈먼 남자에 대한 예수님 제자들의 태도에 놀랐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나쁘게 생각하라, 그러면 네가 옳을 것이다”라는 불운속담(不運俗談)에 딱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그 후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으면서 사도들의 생각은 각자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점차 달라졌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리2,3)

라고 말했는데, 이 말씀에 따르면,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길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이 같은 영성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미덕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다른 사람의 명성과 성실과 사생활에 대한 존중의 표시는 겉으로 나타나는 관례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드러내는 첫 번째 표징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이거나 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데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한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기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판과 명예를 헐뜯는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하는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떤 경우건 그런 사람들에겐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똑같은 미덕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나누는 이 대화로부터 여러분이 실제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맙시다. 그들의 선한 의지를 의심하지 맙시다. 우리 주위에 돈독한 친교와 정의, 평화의 씨를 뿌림으로써 그 넘치는 선함 속에 악(惡)을 빠뜨려서 없애버리자고 다짐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올바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더라도 슬퍼하지 않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주님의 부단한 도움에 힘입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선한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더라도 슬퍼하지 않겠다고 다짐합시다. 우리의 선한 일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동기(動機)를 부당하게 억측하면서 기뻐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악한 계획을 갖고 있으며 거짓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항상 용서합시다. 그리고 양심상 말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악한 감정을 배제하고 명확하게 얘기합시다. 만약 우리가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다면, 그 공격이 아무리 잔인하고 수치스럽더라도, 거룩한 침묵 안에서 -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셨다.” (마태 26,63) -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깁시다. 오직 선한 일을 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입시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선한 행동이 빛이 되어 “사람들 앞을 비추도록” (마태 5,16)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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