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성체, 신앙과 사랑의 신비 (1960년 4월 14일, ‘성목요일’ 강론)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 13,1) 요한복음의 이 구절을 읽는 사람은 곧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한 이 도입부는 루카복음의 다음 구절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루카 22,15)”

성령께 간청하면서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동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은총을 달라고 간구합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초자연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자 하는 열망을 내보이신 까닭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분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요한 6,68)을 가지고 계심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베드로가 말한 그대로를 선언하게 합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9) 신심(信心)과 신앙(信仰)은 우리가 요한 성인의 대담함을 닮게 해주고,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스승님의 가슴에 안겨 의지하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렬히 당신과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을 사랑하시며, 우리가 방금 읽은 말씀 그대로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어떤 말로도 성목요일의 신비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갈바리아산에서 돌아가시기 전날에 당신의 벗들(제자들)과 함께 보내신 마지막 저녁, 그 때의 예수님의 심정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데 헤어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의 인간적 체험에 관해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영원히 함께 머물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짊어진 어떤 의무가 그들을 억지로 갈라놓습니다. 그들은 서로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열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큼 위대하건 간에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러기에 인간의 사랑은 상징적인 표현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작별하는 사람들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거나 사진을 교환하지요. 그 사진을 태우고도 남을 만큼의 서로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을 담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힘은 그들의 열망만큼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완벽한 하느님이자 완벽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상징이 아닌 실재(實在)를 우리에게 남겨주십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실 것이지만 동시에 인류 가운데 남아 계실 것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당신을 기억하게 하는 선물을 우리에게 남기시지 않을 것입니다. 금방 바래져 누렇게 되는 사진처럼 세월이 가면 흐려지는 그림을 남기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같은 시대를 사는 당사자들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성체와 성혈로, 그분의 영(靈)과 신성(神性)으로 영원히 현존하십니다.

성목요일의 기쁨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성체께 항상 불러드렸던 그 찬미가를 우리는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요? “입을 열어 찬양하세. 영광의 성체 신비. 세상 구원 이루시려 흘리신 성혈 신비. 강생하신 만민 임금. 당신 피 흘리셨네. 순결하신 동정녀가 낳으신 아드님이 구원을 이루셨네” 우리는 성체 안에 숨어 계신 우리 하느님을 열렬히 경배해야 합니다. 그분은 예수님 당신 자신입니다. 동정 성모님께 잉태되어 나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당신 생명을 내어주신 그분이신 것입니다. 창으로 당신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은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 안에 받아 모시는 거룩한 잔치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수난을 새롭게 기억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미래의 영광을 약속받습니다. 교회 전례는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의 역사의 정점(頂點)을 이렇게 몇 마디의 말씀으로 요약해왔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의 운명과 열망, 분투와 고통을 무관심하게 지켜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멀리 계신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복되신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신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을 수 있게 하신 겁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은 사랑 넘치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 지금도 우리를 당신께 친절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목요일에 우리가 느끼는 기쁨의 원천입니다. 창조주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이토록 사랑하심을 깨닫는 것이 바로 기쁨의 근원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써 항상 우리 곁에 계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그때까지 주님께서 행하신 다른 모든 자비의 증거들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당신 자비의 새로운 증거로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하신 이유 중 한 가지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그분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지만, 우리와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복되신 삼위일체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은총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주셨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세 1,26)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인간 개개인의 죄는 물론이고,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뻗친 원죄로부터 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인간의 영혼에 거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3)

성체와 삼위일체의 신비 

인간에 대한 복되신 삼위일체의 사랑은 성체를 통해서 숭고한 방식으로 영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우리는 모두 성체가 희생제물이며, 성사(聖事)로 생각할 수 있다는 교리를 배웠습니다. 또한 (성체)성사는 영성체 안에 현존하며, 동시에 제대의 보물로서 감실 안에 계시다고 배웠습니다. 교회는 성체의 신비를 기념하기 위해 또 하나의 축일을 봉헌합니다. 바로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감실에 계시는 성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목요일인 오늘, 우리는 거룩한 미사와 영성체 안에서 거룩한 성체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생제물이자 우리의 양식으로서 성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복되신 삼위일체께서 인간에게 주신 사랑에 관해 여러분께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 사랑을 미사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가 알 수 있는 현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거룩한 세 위격께서는 제대에서 거행되는 희생제사 안에서 함께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본기도와 봉헌기도, 그리고 영성체 후 기도의 마지막 말씀을 즐겨 반복합니다. “성자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미사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께 쉬지 않고 기도드립니다.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영원한 사제이시며 동시에 이 희생제사에서 봉헌되는 제물이십니다. 그리고 참으로 성령의 활동도 미사 안에서 매우 명확하고 신비롭게 나타납니다. 이에 대해 다마스쿠스의 요한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빵이 그리스도의 성체로 변화합니다.”

봉헌된 예물에 대해 사제가 하느님의 축복을 간구할 때에 성령의 활동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오소서 성령님,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소서” 이렇게 봉헌되는 예물은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에 마땅히 드려야 할 제물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간청하는 성화(聖化)는 성부와 성자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에 의해 이뤄집니다. 우리는 영성체 직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따라 성령의 힘으로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셨나이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이 희생제사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을 깨닫게 됩니다.

성삼위께서는 제대의 희생제사 안에서 현존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령의 함께하심으로,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구원의 희생제물로 봉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되신 삼위일체와의 관계를 어떻게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할지 배웁니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을 가지신 한 하느님입니다. 당신의 사랑과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시는 활동 안에서 하느님의 본질이 하나로 일치하신 세 위격이십니다.

세수식(洗手式)이 끝난 직후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받으소서, 거룩한 삼위일체시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승천을 기념해 드리는 이 예물을 받으소서” 그리고 미사 말미에 삼위일체께 흠숭 드리는 또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저희가 드리는 예물이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보잘것없는 제가 주님께 드리는 제물을 허락해주시고, 당신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되게 하소서. 제 예물이 저와, 제가 봉헌하며 기억한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자비로 용서의 은총을 가져오게 하소서.”

미사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활동’이라고 저는 강조합니다. 미사는 인간의 예식이 결코 아닙니다.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자신의 몸과 목소리를 삼위일체의 활동에 연결시킴으로써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를 이행합니다. 사제는 결코 자신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격과 그분의 이름으로 (persona et in nomine Christi) 행동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인해,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온 교회와 인류에게 모든 은총을 가져다주십니다. 이는 말라키 예언자가 선포한 바로 그 희생제물입니다.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내 이름은 민족들 가운데에서 드높다. 내 이름이 민족들 가운데에서 드높기에, 곳곳에서 내 이름에 향과 정결한 제물이 바쳐진다.” (말라 1,11) 이는 곧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바쳐진 그리스도의 희생인 것입니다. 이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봉헌입니다. 이 봉헌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구원사업을 영원히 지속하게 하며, 구약의 희생제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서 거룩한 미사 

거룩한 미사는 우리들 신앙의 신비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신비를 마주하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미사는 복되신 삼위일체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사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적 삶의 중심이요, 원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미사는 모든 성사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은총의 삶에 들어섰습니다. 그 은총의 삶은 견진성사를 통해 커지고 굳세어집니다. 그리고 미사 안에서 충만하게 자라납니다.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성체성사에 참여할 때 우리는 성령의 거룩한 활동으로 인해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더불어 나누게 해주십니다. 세례성사에서 그런 것처럼요. 그뿐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이끌어,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성령의 강림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해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십니다. 사랑이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이 애덕(愛德)에 흠뻑 젖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consummati in unum. 요한 17, 23) 해주십니다. 그렇게 하나가 된 우리 자신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에게 성체가 해주시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대로 “일치의 표징이자 사랑의 끈”이 되는 것입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미사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죠. 그런 신자들에게 미사는 사회적 관습까지는 아닐지라도 순전히 외적인 의식(儀式)입니다. 우리의 빈약한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을 판에 박힌 일상의 일처럼 대할 수 있는 이상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미사를 단순히 외적인 의식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봉헌하고 있는 이 미사에서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현존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이 위대한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는 영육 간에 우리들 자신을 온전히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말씀드리며, 그분을 보고, 그분을 음미합니다. 우리의 언어로는 부족할 때 우리는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의 혀가 주님의 위대하심을 온 인류에 선포하도록 재촉하며 ‘찬미하라, 내 혀야(Pange, lingua!)’라고 노래합니다.

거룩한 미사에 “온전히 참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기도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미사야말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란 사실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확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 죄를 씻고, 우리가 정화되며,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경험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하나 됨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 사랑의 위대하심에 응답할 수 있을지, 아마도 한두 번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을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명료하게 설명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답은 간단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애정을 다해 미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깊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요약한 희생제사, 미사성제 안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사 때 계속 이어지는 기도에서, 그리고 여러분 눈앞에 펼쳐지는 행동에서, 그 수많은 경우에 여러분이 보아온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립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다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 삶의 여러 모습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모습들 가운데는 우리가 개선해야 하는 것들이 있고,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악덕(惡德)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를 생각하며 우리가 발전시켜야 할 형제적 태도도 있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제대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우리의 청춘에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의 제대입니다. 미사는 기쁨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그리스도와 모든 성인들의 상징인 제대에 입을 맞출 때에 사랑, 감사, 그리고 기쁨이 드러납니다. 제대는 작은 평상(平床)이지만 거룩하게 마련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성사가 우리 앞에서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참회’는 우리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죄를 추상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죄와 연약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Kyrie, eleison, Christe, eleison)” 라고 반복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공로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면, 쓰라린 슬픔을 맛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자비로 인해 우리는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대영광송(Gloria)’이 바로 그것입니다.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

우리는 지금 성경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독서와 복음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빛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지력(智力)이 알아듣고 묵상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하고, 행동하려는 우리의 열망을 효과적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 성령의 일치 안에 모여 있는” 하나의 백성이므로 우리들 신앙의 일치를 확신하며 사도신경을 암송합니다.

이어서 봉헌입니다. 인간이 만든 빵과 포도주를 주님께 바칩니다. 참으로 미소한 제물이지만 기도와 함께 바쳐집니다. “주 하느님, 저희를 받아 주소서. 겸손한 마음과 속죄하는 마음으로 저희가 드리는 이 예물을 기쁘게 받아주소서. 주님, 오늘 저희가 봉헌하는 제물이 당신께 건네져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소서”.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우리의 미소함을 되새기고,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모든 것이 깨끗해지고 정화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떠올립니다. “저는 제 손을 씻을 것입니다… 저는 주님 집의 아름다움을 사랑해왔습니다.”

방금 전 세수식(洗手式) 직전에 우리는 성령께 간구하였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드리는 이 희생제사를 축복하시기를 간청합니다. 손을 씻은 후 사제는 미사에 함께하는 모든 이들의 이름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받으소서, 거룩한 성삼이시여(Suscipe, Sancta Trinitas)”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기리며, 또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을 기억하며 우리의 예물을 받아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봉헌된 이 제물이 모든 이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사제는 신자들을 기도로 초대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바치는 이 제사를… (Orate, fratres,)” 왜냐하면 이 희생제물은 여러분의 것이기도 하고 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온 교회가 비치는 제물인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비록 미사에 참례한 사람이 많지 않더라도, 실제로 한 사람만 참석했거나 주례 사제 혼자만 있더라도, ‘형제 여러분 기도하십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미사는 보편적인 희생제사이자, 모든 종족과 국민과 민족과 나라를 구원하는 전례인 까닭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인들의 통공을 통해서 봉헌되는 모든 미사로부터 은총을 받습니다. 미사에 수천 명이 참석했든지, 아니면 딴생각만 하는 복사(服事) 소년 한 명만 있든지 간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어느 경우이건 하느님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과 땅이 같이 노래합니다. “거룩하시도다(Sanctus, Sanctus, Sanctus…)”

저는 천사들과 함께 경배하고 찬미합니다.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미사를 집전할 때 그들이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찬미하며 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서도 함께 계심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이시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동시에 그분의 성체와 성혈의 모친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하느님이시며 완벽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자의 관여 없이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성모 마리아께 잉태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혈관에는 당신 어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 피가 갈바리아산에서, 그리고 미사에서 구원을 위한 희생제사에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감사기도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인자하신 아버지”라고 부르며 감사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의 모든 지체들 즉, 교황과 우리 가족과 친구들, 동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가톨릭 신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의 사랑에서 그 누구도 배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구합니다. 또한 평생 동정이신 은총의 성모님과 그리스도를 처음 따르고 그분을 위해 순교한 이들을 떠올리며, 그분들과 우리의 일치를 되새깁니다.

“주님, 저희 봉사자들과 온 가족이 바치는 이 예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소서…” (Quam oblationem)… 성체축성(聖體祝聖)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제 미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사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바뀌는 실체변화(實體變化)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기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순간이 다시 왔습니다. 이때, 아무것도 당신과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 주님께 말씀드립시다. 언어는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 손에 놓아주실 때, 빵과 포도주라는 약한 모습으로 무방비로 놓아주실 때, 주님은 우리를 기꺼이 당신을 섬기는 종으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주님께 말씀드립시다.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더 많은 기도가 이어집니다. 주님께 간청해야 할 것들의 절실함을 거의 매 순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떠난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한 우리들 자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충실함의 부족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그 무게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견디시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감사기도는 복되신 삼위일체께 드리는 또 다른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per ipsum, et cum ipso, et in ipso.)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예수님께서는 길이시며 중재자이십니다.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고, 그분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께서 가르치신 대로 우리는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당신께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시는 사랑 가득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삶에서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가 되풀이되듯이 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Ecce, Agnus Dei… Domine, non sum dignus…). 우리는 우리의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중요한 사람을 맞이할 때에 우리는 등불과 음악, 격식을 갖춘 옷 등 최상의 것들을 꺼내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때에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만약 우리가 인생에 단 한 번 그분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제가 어렸을 때는 성체를 자주 모시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영성체를 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했는지 기억합니다. 성체를 모시려면 영육 간에 모든 것이 올곧아야 했습니다. 최고로 좋은 옷을 입고 머리도 잘 단장해야 했습니다. 신체적인 청결함도 중요했고요. 아마 향수도 몇 방울 뿌렸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온갖 정성을 들여 영성체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사랑으로 사랑을 되갚을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미사를 마칩니다. 이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축복이 우리와 온종일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정직한 사람들의 활동을 거룩하게 만드는 단순하고도 일상적인 우리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미사에 참례하면, 여러분은 하느님의 세 위격과 개별적으로 깊은 친교를 맺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성자를 낳으신 아버지 하느님과 성부에 의해 탄생하신 성자, 그리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시는 성령… 하느님의 이 세 위격과 각각 친교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 위격 중 어느 한 분께 다가서면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부와 성자 성령께 모두 가까이 갈 때 우리는 다시 진정한 한 하느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섭니다. 미사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이 아무리 차갑더라도 영성체를 통해 우리 주님을 모시기를 갈망하십시오. 여러분의 감정이 여러분의 열망에 화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 성체를 영하십시오.

예수님과 만나기 

미사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요하고 평화롭게, 공경과 사랑으로 미사에 온전히 참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영혼의 섬세함과 감수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감수성은 아주 섬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 섬세한 감정은 열정적인 마음의 사랑을 표현하기 때문에 때로는 매우 미세하지만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항상 의심합니다. 무감각하게 미사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제대에서 구현되는 희생제사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만약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미사 후에 잠시 개인적으로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의 시간은 우리 마음의 침묵 안에서 또 다른 감사로 확장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체성사는 곧 감사기도입니다. 주님께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요?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까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엄격한 규율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영혼들을 집단적으로 인도하시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감(靈感)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영혼이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이행할 수 있도록 결심과 예감과 애정으로 영감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많은 경우에, 미사 후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드리는 대화의 주제가 다음과 같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임금이시며, 치료자이시고, 스승이며 친구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임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의미의 다스림을 상상하려 해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배하시거나, 군림하시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기” (마태 20,28) 때문입니다.

그분의 왕국은 평화와 기쁨과 정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관념적 추론에 시간을 낭비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동을 기대하십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치유자(治癒者)이십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을 우리의 영혼 깊이 스며들게 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이기심을 낫게 해주십니다. 가장 나쁜 병은 위선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위선은 우리들 자신의 죄를 숨기게 만드는 교만인 까닭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온전히 진실해야 합니다. 그분께 온전히 진리만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얘기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언제나 원하시는 바를 말하십시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 8,2). 주님은 제 약점을 아십니다. 그런 조짐을 저도 느낍니다. 제 결점들 때문에 저도 고통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께 상처를 보여드립니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대놓고 보여드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상처가 곪았다면 그 고름까지도 보여드려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수많은 영혼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러니 제 마음에 당신을 모셨을 때, 또는 감실에 계신 당신의 현존을 제가 묵상할 때, 당신이야말로 거룩한 치유자임을 제가 깨닫도록 도와주소서.

그분은 스승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하느님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하느님 안에 계신 무한한 사랑을, 인간을 향한 끝없는 사랑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포기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른다면, 다른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지 않고 이기적인 방법으로 우리 삶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섬기며 살아가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며, 여러분의 말과 모범을 통해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그리스도교적 헌신의 정도를 보여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마음에 품길 기대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거듭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요한 7,37) 그리고 우리는 대답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도록 가르치소서. 그래서 우리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대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우리가 글씨 쓰는 법을 배울 때와 똑같이 우리 주님께서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마구잡이로 글씨를 쓸 때 선생님이 손을 잡고 글쓰기를 직접 가르쳐주셨던 기억을 갖고 계시죠?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보이는 기쁨을 맛보기 시작할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또 하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쁨 또한 맛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우리의 행동에서 모두가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요한 15,15) 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친구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부르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분은 당신의 사랑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을 주실 뿐입니다. 그분은 가장 분명한 표징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그분은 라자로의 친구였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죽음을 보시고 그를 위해 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만약 우리의 내적 삶이 죽어 뻣뻣해져서 냉정하고 반항적이며 완고해져 버린다면, 그 모습을 보시고 그분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내 친구여, 일어나 걸어라.” (요한 11,43, 루카 5,24) 그러니 주님께서는 결코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편협한 삶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성목요일 묵상도 이제 막바지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에서 일치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께 마음의 문을 여는 한 주님께서는 당연히 항상 우리를 도울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섬김의 삶을 통해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요한 13,15) 마지막 만찬의 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교만과 야망, 그리고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거부합시다. 그리하면, 우리들 저마다의 희생의 결과로 우리 주위와 내면에 평화와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끝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사랑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또 어린 시절 얘기를 하겠습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께서 영성체를 자주 하라고 격려하셨을 때였죠. 제가 어렸을 적이었는데 그 당시 제가 살던 시골 마을에는 성체조배를 하시는 성모님 그림이 매우 흔했습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언제나 우리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께 다가오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상황에서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을 찾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특히 현재의 시간이 영원(永遠)과 만나는 미사성제, 그 절정의 순간에 예수님을 찾으라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분께서는 고결한 사제의 몸짓으로 모든 것을 당신께로 끌어들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숨결로 그 모든 것을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두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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