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maría Escrivá Ob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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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 털어놓을 것이 있습니다. 저를 매우 유감스럽게 만들어 행동하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얘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엄청난 행복에 관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 관한 생각입니다. 그들은 이름도 모르는 기쁨을 찾으려고 눈먼 사람들처럼 살아갑니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길 위에서 방황합니다. 이들 중 어느 누가 트로아스에서 꿈에 환시를 본 뒤 바오로 사도가 가졌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오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사도 16, 9-10)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통해서 그분께서는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따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을 별것 아닌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상적으로 불화와 질시 속에 시간을 낭비합니다. 훨씬 더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지닌 신앙이나 신심의 특정한 측면을 꼬투리 잡아 억지로 분노하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는 대신 파괴를 일삼고 비판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우리는 가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심각한 문제점들을 발견합니다. 그런 문제들이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들의 단점이 아닙니다. 진짜로 중요한 유일한 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얘기해야 하는 주제는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예수님의 성심을 공경하는 데 있어서 위기가 닥쳤다는 추측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위기가 아닙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진정한 공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진정으로 살아 있으며, 인간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의미로 충만합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를 회개와 자기희생으로 이끌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구원의 신비를 사랑하며 이해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정한 성심 공경과 쓸모없는 감상의 표현을 구별해야 합니다. 정통교리가 배제된 허울뿐인 신심과도 구분해야 합니다. 여러분 못지않게 저도 그저 보기에만 그럴듯한 가식적인 예수성심 조각상이나 모형 같은 것들을 싫어합니다. 그런 것들은 일반적인 상식과 그리스도인의 초자연적 관점을 함께 지닌 사람들에게 공경의 마음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이런 특별한 문제들은 앞으로 사라지게 되겠지만, 이를 일종의 교리나 신학적 문제로 돌리는 것은 그릇된 논리입니다.

만약 실제로 위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 마음속의 위기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편협하며 워낙 시야가 좁아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사랑의 깊이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성교회가 ‘예수 성심 대축일’을 제정한 이후 대축일 전례는 바오로 성인의 서간을 독서에 포함시킴으로써 참된 신심의 양식을 제공해왔습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 바오로 성인은 지식과 사랑, 기도와 생활을 아우르는 ‘관상하는 삶’의 전체적인 흐름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러한 관상의 삶은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의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여정을 우리가 따라오도록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에페 3,17-19)

하느님의 충만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드러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머무르는” (콜로 2,9) 곳이 바로 예수 성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생과 구원, 그리고 성령 강림을 통해 이 세상에 넘쳐 흐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이 위대한 계획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섬세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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