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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기쁨 

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한 주제를 다시 봅시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국에 가셨고 천사들이 기뻐합니다. 천상 낙원에서 성모님을 기다리셨던 그분의 가장 순결한 배필 요셉 성인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남은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바로 여기 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모두 순례자요, 여행자라고 우리의 신앙은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몫은 희생과 고통, 가난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은 기쁨의 율조로 새겨져야 합니다.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시편 100, 2) 주님을 섬기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기쁘게 주는 이’란 온 마음을 다해 희생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낙관주의가 도에 지나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단점과 실패들에 익숙해 있지 않나요? 고통과 권태, 배은망덕, 그리고 심지어 증오조차도 우리에겐 낯설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존재들이라면, 우리 인간의 본성에 항상 따라붙는 이 고통의 동반자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끈질기게 마주치는 고통과 좌절, 슬픔과 고독을 그냥 무시해버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확실하게 가르쳐줍니다. 삶의 이러한 수긍할 수 없는 일면들이 결코 눈먼 운명 때문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의 운명은 행복에 대한 열망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은, 우리 주위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뜻하심이 깃들어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초대를 담고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물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이러한 초자연적인 이해가 인간 삶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초자연적 이해는 오히려 인간 삶의 이런 복잡성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유쾌하지 못한 삶의 표면(表面)을 넘어서면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강한 유대(紐帶)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파괴되지 않는 강한 유대’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천국에서 누릴 최종적인 삶이 서로 굳게 이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이 기쁨에 찬 희망의 근거를 우리가 인정하도록 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가 우리보다 앞서가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신 그곳에서 우리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해주십니다. 우리가 성실하다면 우리는 천국의 집에 도달할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우리의 본보기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당신이 우리 어머니이심을 보여주세요” 하고 그분께 간청한다면, 성모님께서는 어머니의 돌보심으로 당신 자녀들을 보살펴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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