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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활동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 

가능한 일입니다. 공허한 꿈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마음 깊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기만 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 높은 십자가로부터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것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요한 12,32-불가타 성경) 다시 말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매 순간 의무를 다함으로써 지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활동, 그것이 중요하게 보이거나 아니건 간에 그 중심에 나를 세운다면, 나는 모든 것을 내게로 이끌어 들일 것이다. 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현실로 이뤄질 것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인간을,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합니다. 하느님의 손으로 선하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담이 거역했습니다. 오만한 인간의 죄가 창조의 거룩한 조화를 깨뜨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때가 차자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셔서 성령으로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인간의 육신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죄로부터 구원받음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갈라 4,5)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회복시킴으로써 온 우주가 무질서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고, 우리들 사도직의 과업이며, 우리 영혼을 사로잡아야 할 열망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현실로 만드는 것, 증오와 잔인성을 없애는 것, 온 세상에 강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향유를 퍼뜨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열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임금님께 우리가 겸손하고 열정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시다. 그래서 부서진 것들을 새로 고치고,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며, 인간이 초래한 무질서를 바로잡고, 올곧은 길에서 벗어난 모든 이들에게 옳은 방향을 정해주며, 창조된 모든 것들의 조화를 회복시키는 하느님 사업을 위해 우리 모두 힘을 모으게 해달라고 부탁합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품어 안는다는 것은 사람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제2의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 (Alter Christus, Ipse Christus)’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 거대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찰나에 불과한 세상의 모든 구조(構造)들에게 구원의 누룩을 가져다줌으로써 그들을 내부로부터 거룩하게 만드는 일, 그 어마어마하고 끝없는 과업을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에 관해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종교운동’을 결성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런 운동들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전파하겠다는 열망으로부터 비롯됐다 하더라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일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그가 누구이건 간에 그들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모셔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스스로의 본보기와 언어를 통해 그들의 신앙을 증언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여기서 각자가 처한 상황이란 교회에서의 위치, 시민사회에서의 지위, 그리고 그들이 수행하는 일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아갈 완벽한 권리를 가집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자기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사시게 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그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효과를 눈에 띄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의 사회적 위치가 높건 낮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성취로 보이는 것들이 하느님의 눈에는 아주 저급한 것일 수 있으며, 반대로 수준이 낮거나 별것 아니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들이 그리스도교의 언어로는 거룩함과 섬김의 정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언어로 된 이 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