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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녀들 

여러분은 이 확신에 찬 기도를, 악(惡)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 깨달음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이런 확신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자녀됨’이야말로 언제나 제게 경이롭게 다가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순시기에 우리의 변화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결코 포악한 지배자도, 엄격하고 무자비한 심판자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관대함과 우리의 죄와 실수에 관해 말해주십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기 위해서이며, 당신과 나누는 친교와 사랑을 약속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기쁘게 회개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는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가 되돌아오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오푸스데이 영성의 바탕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를 여러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깨닫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상 한가운데 있는 당신 집으로 우리를 데려가서 하느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것이 곧 우리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 바로 그분의 것입니다. 마치 달을 따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간구하는 친근함과 자신감을 키워가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주님을 아버지로 모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첨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단순히 격식과 예의만을 차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참으로 진실되고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진노하시게 만들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불신(不信)을 참으실 수 있습니다. 당신 자녀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회개하며 용서를 청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어떤 잘못도 용서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도 좋은 아버지여서 용서받고 싶어 하는 우리의 소망을 항상 기다리시며, 은총 가득한 당신의 팔을 벌리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지어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예화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예화를 기억해봅시다. 바로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20) 성경에 기록돼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보다 더 인간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부성애를 이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달려오실 때 우리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과 함께 ‘아빠, 아버지(Abba, Pater)’라고 외칩니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우주의 창조주이시지만,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찬양하며 반기지 않더라도 괘씸하게 여기지 않으시며, 당신의 위대하심을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길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기쁨에 가득 차서 이 ‘아버지’라는 말을 음미하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이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통회(痛悔)를 통해서, 마음의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마음의 회개는 스스로 변화하고픈 열망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굳센 결심, 희생과 자기증여(自己贈與)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 확고한 다짐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입고, 그분의 형제이자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용서의 성사(고해성사)’를 통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화 속 아버지처럼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비록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없을지라도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빚이 얼마나 많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방탕한 아들과 똑같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열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응답은 너무나 초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실제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선물에 놀라고 기뻐하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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